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7(계 13:7-9)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이 시간에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는 제목으로 오늘은 “육신의 권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을 지나실 때 군대 귀신 들려 온갖 흉악한 일을 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안에 귀신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8절) 하셨을 때 귀신이 나오면서 자기를 인근의 돼지 떼 속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했습니다. 귀신 한 번 쫓았다가 돼지농장이 일순간에 파산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유대에서는 돼지를 키우는 것이 위법이었기 때문에 그냥 떠나시기만 원했을 뿐 별 일은 없었지만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탄이 들어가면 멀쩡한 사람도 흉악해지고 사탄이 들어가면 그 무엇도 다 파산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도 이 땅에 사는 날까지는 사탄의 시험을 당할 수 있는데 깊이 당하면 어떤 짐승이 되고 괴물이 될지 그리고 어떻게 파산할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깨어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 하신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계속하여 육신의 권세란 어떤 것일까요?
25. 그 권세는 성도를 늘 시험에 빠뜨리는 권세입니다.
7절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여기 짐승이 성도를 이긴다 했는데 세대주의적인 해석으로 보면 참으로 불길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짐승에게 박해를 받아 질 것이라는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반즈 성경주석에 “싸워 이기게 된다”는 것은“그가 극심한 박해를 시행하는데 성공했음을 뜻한다.”, 이상근 주석에서는 “육적으로 또 임시적으로 사단의 수족인 세상 권력이 교회를 능가하고 제압하는 것이며 종말에 또 한 번 허용될 것이다.” 뉴인터네셔널 주석에서는 “안티오쿠스를 대항한 예루살렘의 방어자들과 같이 새 예루살렘의 시민들도 핍박하는 황제 앞에서 당연히 쓰러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대부분 세상 권력이 교회에 가하는 박해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시록의 복음성을 망각한 주장들입니다. 성도에게 박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있을 수 있지만, 성경은 박해 시 순교하는 것을 결코 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엉뚱한 결론이 나와요. 잠시 여러분의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여러 예를 들었지만 우리는 본 구절을 육신의 권세적인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정답이 나옵니다.
즉 짐승이 성도를 이긴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은 언 듯 성경적이지 않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 한 그 누구도 성도를 이길 수 없으며, 믿음으로 세상도 사단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사본, 에브라임 사본, 풀피리안 사본 등에서는 이 본문을 의도적으로 삭제했습니다. 그러나 삭제할 이유도 없고 육신론과 관련하여 정답을 말씀드리면 짐승이 권세를 받듯 성도라 할지라도 사탄의 시험에 깊이 들면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닙니다. 롬8:12-13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했습니다. 육신에게 질 때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고전1:2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 했습니다. 이 성도라는 고린도 교인들 얼마나 문제가 많았습니까? 얼마나 육신에 자꾸만 졌습니까? 심지어는 자기 계모까지 범하는 파렴치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전2:14-3:2에서 영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고 아직 너희들은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고전3:3에서는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책망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체험도 많이 한 성도였지만 육신 따라서 행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늘 육체에 졌습니다. 옛날 성도들이 자주 쓰는 말대로 이 썩을 육신을 위해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죄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라고 해서 완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체험이 많다고 온전해진 것도 아닙니다. 정말 새롭게 변화되었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그렇다는 것도 아닙니다.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방심하면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는 항상 근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1:17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고, 2:11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고 했습니다.
26. 육체는 인격 전체를 지배하려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7절 하 반절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문자적으로는 통합된 막강한 국가의 권세를 말합니다. 마치 바벨론이나 로마와 같이 여러 나라를 통합하고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랬기에 로마는 다민족에다 다양한 백성들, 다양한 언어, 그리고 그 아래 예속된 왕들이 많았습니다.
한 민족, 한 언어, 한 나라, 한 종교라면 비교적 단조롭지요. 우리나라나 프랑스는 단일민족이라 비교적 편했는데 점점 다인종 다민족 국가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특히 이슬람이 몰려오면 어떻게 될까요? 이건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는 외국인 지문날인까지 하지 않으니 외국인 범죄에 속수 무책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나라와 민족들이라면 얼마나 다스리기 어렵고 혼란스럽겠습니까? 그래서 로마는 각 나라의 언어 풍속 종교 등을 그대로 두는 대신 로마의 통치 아래만큼은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걸 ‘팍스 로마나’라고 하는데 로마의 지배 하의 평화라는 그럴 듯한 말이지만 로마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립을 원한다면 그것은 멸망일 뿐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대나라가 로마에 항거하다가 완전히 망하게 되고 유대군사들이 마사다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죽습니다. 한 마디로 로마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육체가 이런 강력한 통치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과 멀어져 육신적으로 떨어지면 육체는 우리 인격의 모든 요소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끼쳐 정복하고 맙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기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란 우리의 전 인격 혹은 모든 인격적 요소들, 즉 사탄의 시험에 빠지게 되면 우리 생각, 판단, 언어, 본능, 결심 등 지정의 전체가 잘못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갈등도 두 세력이 비등할 때 나타나는 것이지 시험에 깊이 들면 갈등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어온 것은 절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37:24에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무의 그루터기와 같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조금 남겨 두셨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죽고 싶어도 한 자락 남은 믿음 때문에 죽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붙드시는 것입니다. 사1:9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했습니다. 이런 붙드심이 계시기에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주님을 배반할 수 없을 것입니다.
27. 그런데 육신에 속하지 않을 예외가 있습니다.
8-9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여기 8-9절은 짐승에게 경배할 자가 누구일지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힌트가 있어요.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을 자를 우회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으라.”는 말씀으로 주의를 환기시켜 줍니다.
그 힌트는 몇 가지인데 먼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란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라면 이길 수 있다는 힌트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갈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다음은 녹명 되지 못한 자들이 짐승을 경배했다는 데서 거듭난다면 이길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왜냐하면 요일5:4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5:18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이기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땅에 사는 자가 경배했다는 점에서 하늘에 속한 자는 이길 수 있다는 힌트가 있습니다. 그래서 골3:2-3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는 다 짐승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영에 속하면 경배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창세 이후”라는 언급에서도 그 힌트가 나타납니다. 창세 이후는 다 경배하니까 창세 이전이면 되겠지요. 성도는 창세 이전에 택함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이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구원 받아 늘 하나님을 경배하여 성령으로 늘 충만할 때 우리 육신까지도 통제해 나갈 수 있는 절제의 은사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괴물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고, 사탄이 아무리 시험한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 가운데 있다면 우리를 결코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를 멀리하고 근신하지 않고 은혜 받는데 게으르면 그 때는 100%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항상 근신하여 깨어 기도함으로 사탄의 시험 다 물리치고 성령의 은혜 따라 신령한 사람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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