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증인 2 (계 11:4)
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계속하여 “두 증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두 증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성령을 나타낸 것이라 했습니다.
그럼 각 개인에게 이를 적용하시는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5. 성령님은 보좌 앞으로 인도하시는 영이십니다.
4절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감람나무와 두 촛대가 이 땅에 주 앞에 서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땅의 주 앞이라. 대단히 희귀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배경은 슥 4장입니다. 슥4:14에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했습니다. 스가랴서에는 하나님을 온 세상의 주라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당시 그 쪽 온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메데바사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바사왕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에 돌아가 성과 성전을 짓게 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온 세상의 왕은 고레스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44:28에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고레스는 하나님께서 잠시 사용하신 이방의 왕일뿐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스가랴서와는 약간 달리 왜 하나님 앞을 이 땅의 주 앞이라고 했을까요? 먼저 주 앞이란 그 앞에까지 나아감을 전제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은 나아가야만 설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하나님 그 자체이신데 보좌 앞에 나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잘 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택한 백성들을 부르셔서 감동시켜 아버지 앞으로 이끄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16:13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랬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얻기 위해 온갖 보물을 나귀에 가득 싣고 가서 리브가를 만나 데리고 오는 것처럼 온갖 은혜와 은사로서 죄인을 감동시키시고 믿음과 사랑의 마음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런데 보좌 앞이면 천상인데 이 땅의 주 앞이라 했을까요? 영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했지만 몸은 아직 이 세상 영역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죄인이 이 세상에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스가랴서에 보좌 앞의 감람나무의 두 가지가 지상에서 사명 받아 충성했던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였던 것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죽어 천국 가기 전에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선 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성령께서는 이 땅의 죄 많은 우리 인간들을 온갖 은혜로 회개시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 복된 자리가 바로 하나님 앞입니다. 구원의 자리입니다. 은혜의 자리입니다. 행복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성막에서도 하나님 앞은 시은소라 불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곳입니다. 혹은 속죄소라. 그 앞에 나아오면 다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그래서 시16:11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했고, 히4:16에도 “은혜의 보좌 앞”이라 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들을 이 복된 자리에 오게 하신단 말씀입니다.
그런데 나아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 있습니다. 선다는 것은 굳센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엡6:13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보좌 앞에 굳세게 서야 합니까? 우리가 몸을 떠나 온전히 천상에 산다면 우리가 굳이 주 앞에 견고히 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우리이기에 아직 육체에 속했고 또 하나님의 은혜 보좌 앞에 나아가는데 사탄의 방해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미혹하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다짐해도 얼마나 많은 것에 매여서 그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다짐하고 좁은 길 가야 합니다. 에스더와 같이 목숨 건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제일로 삼기로 작정하고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우리에게 이런 강한 믿음 주셔서 아버지 보좌 앞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6.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시고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4절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감람나무와” 금 촛대 옆의 감람나무의 두 가지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둘을 말하는데 그 둘은 당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스룹바벨 총독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슥 4장을 배경으로 한 말씀이지만 내용은 조금 다릅니다. 슥4:12에는 “금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 계시록과 비교하면 두 금관은 두 촛대니까 맞지만 계시록에선 감람나무는 나무만 소개될 뿐 가지는 소개되지 않습니다.
요15:5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신 것처럼 만약 감람나무 가지가 소개된다면 그 가지는 스가랴서의 스룹바벨 총독이나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같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사명감으로 충만한 사명자를 가리키겠지만 계시록에는 가지는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감람나무는 스가랴서와는 달리 그냥 감람나무 자체 즉 곧 성령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감람나무=두 촛대=성령 이런 공식입니다.
박태선씨는 한 편 감람나무가 자기라고 선전했지만 감람나무는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지 인간 누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의 결말을 보더라도 그는 결코 감람나무도 그 가지의 자격도 없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성령님을 감람나무에 비유한 것일까요? 감람나무는 좋은 기름을 많이 생산하는 나무입니다. 올리브유가 감람유입니다. 그런데 감람나무가 기름을 흘리는 금 촛대 곁에 있었듯 감람나무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상징합니다.
이 거룩한 기름은 먼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시고, 지체된 성도와 하나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13:1-3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죄악 세상에서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가 되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이건 외형적 연합이나 통합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이 신비적 연합은 무형적 교회를 말하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를 헬라어로 엨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에크(밖에, 바깥) + 클레시아(부름,초대) = 엨클레시아(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밖으로부터 안으로 부른다.”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부름 받은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성령께서 바로 그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보세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교회가 부흥되고 말씀 안에서 더욱 든든해갔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기름이 부어질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갈 사명자들이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감람나무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성령의 은혜를 강조한 것입니다.
7. 성령님은 우리 눈을 여시는 계시의 영이십니다.
“두 촛대니” 성막이나 성전에서는 두 촛대는 없습니다. 성막에서는 일곱 등불 가진 촛대 하나였고, 왕상7:49을 보면 성전에는 일곱 등불 가진 등대가 열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계시록에서는 촛대가 둘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어둠을 밝히는 성막이나 성전의 촛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수효는 두 개라는 증거의 수효에 맞춤으로 그 촛대의 역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성령은 촛대와 같이 어둠을 밝혀 진리를 알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깨닫게 하사 회개케 하십니다.
마치 성막 안의 떡상과 분향단을 밝히는 등대와 같이 떡인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의 제목을 깨닫게 하셔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 의지하지 않으면 영적 소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을 밝히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약1:5에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도우심으로 더 깊이 성경을 깨닫고, 우리의 기도 역시 성령의 도우심으로 무엇을 빌지 알게 되는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를 아버지 보좌 앞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고 몸 된 교회를 세워 나가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 진리를 보게 하시고 우리의 빌바를 알게 하시는 계시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여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육 간에 큰 도우심 속에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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