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것을 향하여 사는 자 시130:1-8, 골3:1-4
‘몽실 언니’의 작가 권정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도쿄 빈민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이 되어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지만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폐결핵에 걸려 거리를 떠돌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 상황에서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안동에 있는 일직교회 문간방에서 교회 종지기로 살면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신앙을 가졌고, 그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글에서 나타나는 인간애는 세상을 감동시키며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습니다. 책이 많이 팔려 호화롭게 살 수 있는 조건이 이루어졌지만 그의 생활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뀐 것이라곤 마을 청년들이 지어준 두 평 남짓한 작은 집 한 채가 전부였습니다.
권정생 작가는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부당한 것이며, 내 몫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진 돈으로 옥수수를 사서 북한 어린이들에게 보내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그가 죽은 후 책의 인세로 들어오는 돈이 한해에 무려 1억 원 가까이 되는데 전액을 북한 어린이들을 돕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가 사는 삶의 방식이 세상에 속한 모습이 아닌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의 모습으로 위에 것을 향하여 사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은혜를 나눌 말씀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위에 것을 향하여 사는 자”라는 제목입니다. 위에 것을 향하여 사는 자의 모습은,
1.거듭난 성도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영적 생명을 가진 자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입니다. 부모로부터 태어나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영적 생명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속한 자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고 오로지 세상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적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은 땅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경외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위엣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힘씁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변화되기 전에 육의 소욕을 따라 세상 것에 가치를 두고 살지 않습니다. 신약 본문에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가 되었으니 골3:5-6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라는 말은 옛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지체의 욕망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음란과 부정, 사욕과 악한 정욕 이런 것들은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만 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본성 곧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마치 거지가 냄새나는 속옷을 벗지 않고 겉옷만 말쑥하게 갈아입는 다고 신사가 되는 것이 아닌 것과도 같습니다. 멀리서 보면 멀쩡한 신사지만 풍겨나는 냄새는 감추지 못합니다.
거듭나 새사람이 된 성도는 죽는 날까지,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계속하여 새로워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했고,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노라’했으며, ‘날마다 나를 처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노라’고 한 것입니다.
거듭나 새 사람이 된 성도는 바울과 같이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더럽고 추악한 죄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역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쓴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리에 나왔는데 술 취하여 난동을 부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대는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하기를 사실 나는 예전에 불구였는데 예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멋있게 살려고 날마다 술을 먹습니다.
또 탐욕과 색정으로 지나다니는 여자를 치근덕거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삽니까? 나는 과거에 소경이었는데 예수님이 눈을 뜨게 했습니다. 이제 보게 되었으니 좋은 세상을 즐기려고 이렇게 삽니다.
또 창녀를 만났습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삽니까? 주님을 만나 과거의 생활을 청산했는데 이기지 못하여 다시 이렇게 삽니다.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자기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갈5:16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자기의 지체의 욕구를 죽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때 은혜 받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간 자의 모습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1-22)했습니다. 우리 모두 거듭난 성도의 모습으로 살다가 이기는 자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간구하고, 교제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구약 본문 시130:7-8에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했습니다. 이 시편의 배경은 이스라엘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고통을 당할 때 지은 시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징계를 받아 바벨론의 극한 고통을 호소하며 민족의 죄를 자복하고 구원을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죄를 회개할 때,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당할 때 본문의 말씀처럼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깊은 곳이란 땅의 가장 낮은 곳을 뜻 합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며 간구하는 모습입니다. 마치 요나의 기도의 자리가 스올의 뱃속이며 깊음 속 바다 가운데 (욘2:2∼3) 인 것처럼, 요셉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의 심정처럼, 야곱이 얍복강에서의 간구처럼, 다니엘이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서의 간구처럼, 민족이 멸절 될 위기의 때에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했던 간구의 자리처럼, 히스기야 왕이 벽을 향하여 통곡하고 드린 기도도,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의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간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며, 문제 해결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어떤 여자 분의 얘기입니다. 남편은 실직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학교에서 퇴학당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불량한 소년으로 자라났습니다.
이 여자 분은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어느 날 동반자살을 하기로 결심하고 아이들이 자는 틈에 가스 밸브를 열어 놓았습니다. 조금 후에 집안이 가스로 가득 차고 정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옆집 열린 문틈으로 찬송이 울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쌓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찬 337장)
그 찬송을 들으면서 갑자기 그녀의 눈이 달라졌습니다. 근심과 고통만 보이던 그녀의 눈에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언뜻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생을 맡기고, 자기의 모든 근심을 맡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혼탁한 공기를 몰아냈습니다.
며칠 후에 그녀는 자녀들과 함께 시골로 내려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 자연 속에서 그녀는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이 여자가 바로 "근심이여 안녕"이란 책을 썼던 메니큐스 마네 부인입니다.
이 세상에 근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죄를 회개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근심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과의 막힌 담이 무너지고, 교제가 회복되며, 주님의 축복 가운데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간구하며,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절제하는 삶을 사는 모습입니다.
구약 본문 5-6절에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하다는 것입니다. 밤을 새워 보초를 서는 파수꾼은 얼마나 밝은 아침을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외로움과 위험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침이 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하나님을 바라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위기를 해결하시고 구원해주시고 그분만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소망입니다. 홍해 앞에 사면초가를 만났을 때 그 길을 여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하나님, 아무것도 없는데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십니다. 간절히 찾고 찾으면 만나주시고 모든 것을 만족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바라 볼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신약 본문 골3:4에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란 재림의 때입니다. 우리가 위엣 것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으로부터 다시 오실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재림에 대해 오해하거나 악용해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신앙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주님의 재림을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 오실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소망을 성경은 산 소망이라고 합니다. 이 복스러운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리는 손양원 목사는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하여 나환자들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인생을 바쳤습니다.
그러한 삶 가운데 그가 남긴 시가 있습니다. ‘주님 고대가’입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부르면 주님 계신 그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신부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손양원 목사는 오직 예수만 기다리며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세상의 것에 취하여 살지 않고, 주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절제 하는 삶을 삽니다. 잘 단장한 신부의 모습으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신랑이 오기를 고대하며 기름 등불 예비하여 있다가 신랑 되신 주님을 맞는 자가 됩니다. 우리 모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다가 주님을 맞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위에 것을 향하여 사는 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위에 것을 향하여 사는 자의 모습은,
◆.거듭난 성도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간구하고, 교제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절제하는 삶을 사는 모습입니다. 아멘.
<2023. 07. 05. 호현낙선>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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