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세 개의 십자가 요19장17-27

nam씨 2023. 4. 1. 13:34

세 개의 십자가 요1917-27

 

성경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중심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인간의 죄악을 알며,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은 곧 새 생명을 얻는 것이며, 십자가를 깨닫는 것이 바로 복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도 잊을 수 없고 항상 묵상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이고 구원의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 살다가 죽어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저주스런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잠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을 우리는 고난주간이라고 칭합니다. 고난주간이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고 친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종려주일) 그곳에서 보내신 일주일의 삶을 묵상하며 지내는 시간입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바르게 깨달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해골이라 이름 붙여진 언덕에 세 십자가가 세워졌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십자가이지만 세 개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는 모두 다릅니다.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첫 번째 십자가 멸망의 십자가

 

예수님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게 하는 죄인은 반란자나 노예들을 극형에 처할 때입니다. 로마 시민권자들에게는 아무리 무거운 죄를 범했다 해도 십자가 형틀에 못 박아 죽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은 그야말로 반인륜적이고 극악무도한 죄인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고의 형인 십자가 형틀에 달린 것입니다. 첫 번째 십자가는 죄의 결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십자가였습니다.

 

첫 번째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범한 모든 죄악은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종류가 어떠하든 결국 인간은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고 누구도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가 첫 번째 십자가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회개할 기회마저도 놓쳐버린 십자가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예수님을 조롱하고 불신했던 멸망의 표상(表象)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멸망 그 자체를 보여주는 십자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의 전형을 보게 됩니다. 죄를 범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죽은 후에 영원한 지옥의 세계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자들의 완악함을 첫 번째 십자가를 통해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막가는 인생종착을 보는 십자가란 말입니다. 1996(10)에 우리 사회에서도 소위 <막가파>란 범죄 조직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때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무참하게 죽이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죽어 간 자들입니다. 첫 번째 십자가를 보면서 깨닫는 것은 구원은 누구에게나 다 열려있지만 그렇다고 구원은 누구나 다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화)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밀양>을 보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빈정거림이 나옵니다. 전도연씨가 열연한 주인공 신애는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아들을 데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들이 유괴를 당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슬픔과 번민에 휩싸인 신애는 우연히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어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에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신대로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신애가 유괴범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러 왔다.” 고 하자 유괴범은 너무나 평안한 얼굴을 한 채 나는 용서받았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신애는 충격을 받고 교도소를 나와 쓰러지고 맙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였느냐?”는 것입니다. 그 후 영화는 내내 신애의 방황을 묘사합니다.

 

이 영화는 죄 사함 받았다는 오늘날의 기독교인의 믿음을 이렇게 빈정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어도 예수 믿으면 다 용서 받았다.’ 면서 자기 죄에 대한 애통함도 없고, 피해자에게 잘못했다는 고백 한 마디 없는 살인자, 그가 오늘날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자기 죄를 눈물로 회개해본 적이 없이, 죄를 반복해 짓고 살면서 단순히 예수가 내 죄를 위해 죽었으니, 나는 용서 받았다.”는 교리를 지적으로 동의하면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뛰게 될 줄 아는 것은 십자가 복음을 곡해한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죄를 범하면 회개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끝까지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회개하지 않고 그냥 막가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가 그런 류의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2339절에 보면 이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조롱합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예수님을 마치 꾸짖듯 모독하고 조롱합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힐 장면입니까?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네가 메시야가 아니냐? 네가 구세주가 아니냐? 그런데 왜 죽느냐? 정말 메시야라면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보라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자신처럼 십자가에 달렸으니 자신과 비슷하게 무슨 흉악한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함께 십자가를 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구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행악자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조롱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죗값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게 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행악자를 보면서 죄의 결말, 죄의 보편적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행악자가 달린 첫 번째 십자가를 천천히 바라봅시다. 그리고 좀 더 앞으로 나가봅시다. 그는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면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호소합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생명의 주님을 만났으나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일생을 살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으로 생의 마지막을 마감했습니다. 죽음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죄인으로 죽었으니 하나님께 정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라고 부르는 영원한 죽음, 즉 영벌에 삼켜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행악자가 달린 십자가는 영원한 죽음의 십자가였습니다. 영원한 멸망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류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이 귀동냥으로 들은 것은 천만분의 일도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마치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다 아는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자신이 하나님 위에 있다고 외칩니다. 하나님을 믿을 바에 내 주먹을 믿겠다고 외쳐댑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을 기회가 생기는데도 일부러 피합니다. 지옥으로 치닫는 열차를 타고 있지만 천국의 기차로 갈아탈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주어짐에도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그냥 타고 지옥을 향해 달려갑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고마운 나의 지인이, 지금 첫 번째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그들을 바라보십시오. 추수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십자가 회개의 십자가

 

이 사람은 비록 흉악한 죄를 범했으나 회개한 자의 십자가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란 엄연한 사실 앞에서 그래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즉 죄의 값은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그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참으로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임을 이 사람을 통해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습니다.

 

이 선물이 너무나 비싸서 도무지 값을 매길 수 없는 은혜란 것입니다. 값이 너무 비싸면 가격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은 화랑에서 고가로 값을 매겨 놓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1500년경에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그림은 값을 매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그림에는 '프라이스레스'(Priceless)라고 써 놓았다고 합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니까 값으로 따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렇습니다. 쓸모없는 무가치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 보여준 것이 바로 두 번째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그것도 죽는 순간에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놀라운 비밀을 보여준 것이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사람을 죽이며 흉악범으로 잡힌 이 사람,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이 죄인도 구원해 주신 예수님, 그렇다면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확신을 보여준 십자가가 바로 두 번째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감출 수 있는 죄도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가 큽니다. 아무 공로 없는데 나를 사랑하신 주님, 보잘 것 없는데 어느 순간엔가 나를 부르신 주님, 자격이 없는데 자녀로 삼아주시고 기업을 이을 자로 세워주신 주님, 그 주님의 은혜가 크고 놀랍습니다.

 

(찬송가 305)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아멘.

 

 

세 번째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구원의 십자가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대신해 죽은 속죄(贖罪)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십자가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부터 십자가는 이제 흉악한 죄인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의()를 위한 희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주의 십자가가 아니라 존경과 영광과 찬양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희생, 봉사, 사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드린 희생 제물로서의 십자가입니다. 모든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은 감격의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10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름을 확인시켜 준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일까요? 죄의 세력을 다 이기고 승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불의의 세력을 사랑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의 완성이며, 사명의 완성이며, 죄인을 위한 구원의 완성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볼 때,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말과 이론이 아닙니다. 뜨거운 마음과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말과 이론이 아닌 우리를 향한 뜨거운 마음과 실천으로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은혜가 무엇인지도, 구원과 영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을 죄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게 합니다. 오늘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음지에서 묵묵히 희생하는 많은 봉사자들, 그들이 이토록 희생하며 봉사할 수 있는 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작 왓츠(Isaac Watts;1674-1748)는 찬송가 143장에서 4절과 5절에서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라고 눈물의 찬송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이제 아무리 포악한 죄인이라도 저 십자가를 볼 때 마음이 녹아집니다. 아무리 패륜아들도 저 주님의 십자가를 대할 때 눈물로 되돌아서게 됩니다. 술주정뱅이도, 그리고 탕자도 저 십자가 앞에서 결단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승리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살리는 요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감격의 목이 메는 죄인들이 얼마나 많이 돌아오는지 모릅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세 십자가에서 우리는 각각 다른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주님의 십자가가 가운데 세워지지 않았더라면 나 같은 죄인이 어디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오늘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한 주간 동안 묵상하면서 새로운 주님과의 사랑을 이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예화 1) 렘브란트(Rembrandt, 1606-69)의 그림 중에 세 개의 십자가(The Three Crosses)라는 명화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정중앙에는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좌우편에 두 강도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밑에 모여서 야유를 퍼붓는 군중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 하나 하나가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모퉁이 한구석에다가 그림자에 가려 간신히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나 그려 넣었습니다. 미술가들은 이 사람은 렘브란트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렘브란트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그날 폭도들과 함께 동참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때 그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주인공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날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달린 강도들처럼 천국이냐 지옥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입장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십자가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십자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