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계명 (출 20:4-6)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은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偶像)이란 어떤 형상을 만들어 신처럼 떠받들거나 하나님보다 더 위하는 그 무엇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보면 우상이라는 의미는 다른 신 그 이상으로 포괄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2계명이 담고 있는 주요 내용은 무엇일까요?

 

1.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보이는 하나님을 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는 그 시점에 모세가 속히 돌아오지 않자 답답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우리를 방황하게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우상을 만들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바친 금목걸이 귀걸이 등을 받아 금 송아지를 만들고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면서 그 앞에서 절하고 제사하며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걸 보신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전히 멸하려고 하셨는데, 여기서 볼 때 비록 하나님의 형상일지라도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닐지라도 숭배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다 포함합니다.

 

4-5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먼저 우상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송아지가 아니라 다른 것일지라도 우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여기 하늘에 있는 것은 해 달 별 천사나 용이나 영물 조류, 땅에 있는 것은 사람 짐승 산 바위 나무, 땅 아래 있는 것은 어류 고래 악어 등으로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금송아지, 부적, 장수하게 하여 달라는 거북이 형상, 복 달라는 금으로 만든 돼지는 하나님이 금하시는 우상입니다. 마리아상, 바울상도 성인에게 기도하는 카톨릭의 관점에서 볼 때 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십자가 자체를 우상으로 보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교인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우상화할까봐 강단에 금지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자녀가 우상은 아니지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됩니다. 이처럼 우상은 분별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의 설명을 참고하면, 가령 십자가를 자동차에 둘 때 사고 나지 말라고 걸어 두는 것은 우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기 위해서 목걸이를 하거나 자동차에 달아 두는 것은 우상이 아닙니다.

 

사업장에 예배실을 만들 때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만든 것은 우상이 아니지만 예배실을 만들면 하나님이 복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든다면 우상입니다. 교회 교패를 대문에 붙이면 복이 온다고 생각하고 붙이면 그건 부적이요 우상입니다.

 

혹은 우상에게 헌금하거나, 우상 노래를 따라 하거나, 우상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공부하거나, 우상 축제에 참석하거나, 죽은 사람이나 조상 제사에 절하거나, 사주팔자 토정비결 손금 관상 궁합 보는 것도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아무 쓸데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부적이나 우상을 소지하는 것도 금해야 합니다. 관광지의 상품도 우상이 새겨져 있으니 함부로 사지 마세요. 성도가 그보다 훨씬 강한 건 사실이지만 소지해서 좋을 리는 없습니다. 이방 종교 전파 효과나 사탄의 참소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 의료 선교하던 선교사의 간증인데 선교하다가 아내가 병이 들었습니다. 병명이 나오지 않아 미국의 큰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병명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아내는 이왕 죽을 바에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선교하다가 죽겠다고 결심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왔는데, 그때 영적으로 깊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선교사 부인 팔목에 걸려 있는 장신구를 즉시 발견하더니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난 것이냐?

 

마을에 사는 마술사가 준 장신구였습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마술사는 예수 믿는 이들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이들에게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그것을 주고 날마다 믿는 자들을 저주해 왔습니다. 선교사 부인은 그 팔찌를 빼내 산산조각을 내버렸습니다. 그 후 병이 거짓말처럼 나았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미신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내 몸에 주술의 팔찌를 차고 있으면서 행복하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5-6절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셨습니다.

 

고전10:20에는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했고, 시16:4에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했습니다.

 

사44:9-11에 “우상을 만드는 자는 -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했고, 시97:7에는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했습니다. 만드는 자도 섬기는 자도 수치를 당합니다.

 

그 예로 야곱의 아내 라헬을 들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우상 드라빔을 훔쳐 간 라헬이 복을 받았을까요? 라헬은 그 우상을 품고 있다가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을 때도 그 험한 에브랏 길에서 산고가 나서 베냐민을 낳다가 베노니를 외치며 고통 중에 죽었습니다. 라헬이 지은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 을 뜻하며, 그러나 야곱은 그의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 이라는 의미의 '베냐민' 으로 바꾸었습니다.

 

3. 2계명은 형상을 만들지 않았어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골3:5에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말씀합니다. W.H. 훠드(Ford) 박사는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이 7가지라고 말했습니다. 1. 자연 우상 2. 건강 우상 3. 스포츠 우상 4. 과학과 학문의 우상 5. 쾌락 우상 6. 인기 우상 7. 돈 우상입니다.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족이 있었습니다세 자녀를 두고 다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남편은 유능한 사업가였습니다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이였습니다하나님의 일도 잘 하였습니다그런데 이상하게 5년 전부터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그러더니 얼마 안 가서 사업이 완전히 파산나고 말았습니다그 후 하는 일마다 되지 않았습니다한 채 남은 집마저 날라가 버렸습니다아무리 노력하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제 거지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그 때 우연히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까닭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잠 23;2) 부부는 집안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하나님가증한 것이 집안에 있으면 가증한 것이 올무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우리 집안에 우상이 있으면 그 가증한 것과 함께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우리 집안에 가증한 우상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옵소서그리고 그 가증한 물건을 없애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는 데 침실에서 무엇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깜짝 놀라서 가보고 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몇 년 전에 할아버지가 멕시코를 여행하다가 길거리에서 90센티쯤 되는 걸인 모습 조각 품을 사다가 선물로 주었습니다아주 정교하고 잘 조각하여 비싼 조각품이라 침실에 두었던 것이었습니다잘 조각된 거지상이었습니다. 귀중하게 간직하여 두었었는 데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쓰러져 깨지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부부는 그 깨진 걸인상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완전히 부수워 버렸습니다그 순간 궁핍의 저주도 깨지기 시작하였습니다다시 사업은 번성기를 맞았습니다그 동안 잃어 버렸던 재산도 다시 찾았습니다. 가증한 우상을 집안으로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집안 구석구석을 살펴 보십시오그리고 가증한 우상이 발견되면 아무리 비싼 것이라 할 지라도 버려야 합니다우상을 가지고 있으면 괴로움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카톨릭에서는 우상을 섬기려고 2계명을 고의적으로 없애 버렸습니다. 성인을 숭배합니다. 마리아를 경배합니다. 교황을 하나님처럼 받들고 있습니다. 유골이나 천사를 높입니다. 그래서 카톨릭은 은혜가 없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그 어떤 것도 우상 삼지 말고 안 보이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이는 것처럼 섬기며 사랑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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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강해] 제1계명 (출 20:1-3)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오늘부터 십계명을 강해하겠습니다. 이 시간은 제1계명입니다. 3절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하신 1계명을 모르신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십계명이 있지만 첫 계명은 가장 중요하고 근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첫 단추에서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됩니다. 다른 종교 믿으면서 도둑질하지 않는다고 하나님 백성일까요? 천만에입니다. 그래서 1계명이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계명입니다. 그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3절) 하셨는데 다른 신이 무엇입니까?


1. 잡신이 다른 신입니다.


사44:6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고는 다른 신이 없고, 모두 잡신입니다.


고대 바벨론에는 약 700만의 다른 신이 있었습니다. 앗수르에게도 다른 신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갈데아 우르도 다른 신이 있었습니다. 태양신 샤마쉬(Shamach), 폭풍신 아다드(Adad), 아다드의 부인신 닌갈(Ningal)은 대표적인 신입니다. . 애굽에도 모세의 열 재앙에서 나오듯 다른 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리스에도 제우스를 비롯해 약 3만의 신이 있었습니다. 로마에도 쥬피터 같은 신이 있었습니다. 인도에는 3억 3천만의 다른 신이 있고, 일본에도 800만 가지 다른 신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다른 신이 많습니다. 성황당신, 헛간신, 장독신, 조상신, 처녀 신까지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까지 있었습니다.


2. 다른 종교가 다른 신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종교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를 비롯해서 수많은 종교들이 다른 신입니다. 불교는 신을 인정하지도 않고 우리와 가르침도 다르지만 부처를 숭배하든 하지 않든 자신들의 교리를 절대화하기 때문에 다른 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 역시 다른 신입니다. 이슬람교는 알라가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이슬람교의 표식이 초승달임을 볼 때 그들의 신은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에서 믿었던 그 달신이지, 아브라함이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온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살던 갈대아우르나 하란은 달(月神)을 극성스럽게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달’이란 뜻이며, 그의 부인 "사래"는 달신(月神)인 「쉰」(Shin)의 아내 ‘사라투’에서 왔고, 그의 동생 나홀의 부인 "밀가"는 달신 「쉰」의 딸 ‘말가투’에서 나왔습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의 가정은 본래 달신을 숭배하는 집안의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옛날 섬기던 그 신은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전인 꾸란은 아브라함 이후 2000년 후에 무함마드가 제 맘대로 쓴 경전으로 그들이 이스마엘의 후손이라는 것 말고는 2000년 동안 아브라함의 신앙과 어떤 연관성도 없고 내용으로 볼 때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전혀 다른 신입니다.


3. 다른 신은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합1:11에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신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위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강하고 능력이 있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나약한 사람들만이 신이 필요하다..” 이런 건방진 소리를 합니다.


행12:21-23에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사람들이 높여주니까 자기가 신처럼 행동하다 급사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2천 명쯤 된다고 합니다. 허경0이도 자기를 신이라면서 하늘궁을 지어놓고 하나님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다른 신입니다.


마6: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돈일 수도 있고, 명성이나 성공일 수도 있고, 돈이나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자식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습니다. 윗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영국의 윌지 추기경은 “만약 내가 왕을 섬기는 것의 반 정도만이라도 하나님을 섬겼더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외롭게 만드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했습니다. 우리가 돈사랑, 자식사랑, 자기사랑의 반만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해도 이렇게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못한다는 것입니다.


3절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하셨는데 이 명령 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사45:5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신 여호와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을 사람들이 신으로 만든 것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2. 하나님만 섬기라는 뜻입니다.


여기 “나 외에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 “알파니아”, “나와 대립시켜서”라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다른 신을 두는 것은 하나님과 대립시키는 것입니다. 성도가 건축기술을 가졌어도 다른 신전을 지으면 안 됩니다. 다른 신을 위하여 음식을 차리거나, 다른 신에게 기도해도 안 됩니다.


“나 외에는”이란 혼합주의를 피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었다면 온전히 돌아서야 합니다. 타종교와 교류한다고 교인들을 혼란에 빠뜨리면 안 됩니다. 성도들을 지옥으로 인도한 큰 죄입니다.


솔로몬이 망한 것도 하나님과 우상을 혼합하여 섬겼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한 때 마니교에 깊이 빠진 적이 있었는데 마니가 만든 마니교는 예수 공자 그리고 조로아스터를 섞어서 마니교를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잡신들이 활개를 칠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사람이 차지하거나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가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이것이 배도입니다. 종교 다원주의의 하수 단체가 WCC입니다.


3.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모두 1인칭이거나 2인칭입니다. 하나님은 지구상에 수십 억이 살고 있지만 일대 일로 말씀하시고, 일대 일로 상대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만 섬겨야 할까요?


하나님은 제1계명을 말씀하실 때 전제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2-3)


이처럼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우리를 억만 죄악에서 구원해 주시고 천국까지 예배해 놓으셨으니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밖에는 없고 하나님만 경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 앞에 다른 신을 두면 안 됩니다. 다른 것을 사랑해도 안 됩니다. 어리석은 자처럼 하나님이 없다 해도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충분히 존경과 영광을 받으실 만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하나님만 최고로 높이고 사랑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광채 나는 얼굴/34:29-35

 

H. 발작은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다. 한 권의 책이다. 용모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A. 프레보는 "남자의 얼굴은 자연의 작품, 여자의 얼굴은 예술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을 지냈던 아브라함 링컨은 "40을 지낸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얼굴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기 전에 거울을 여러 번 들여다보았을 것입니다. 어땠습니까? 여러분의 얼굴은 광채가 나는 얼굴이었습니까? 기미 잡티 때문에 짜증나는 얼굴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두 번째 올라갔다가 하산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은 한마디로 광채 나는 얼굴이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로마에 가면 성 베드로 성당이 있습니다. 그곳에 유명한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모세의 상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515년에 오늘 본문을 주제로 하여 235cm모세상을 조각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모세의 머리에 뿔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왜 모세상을 조각하면서 머리에 뿔이 있다고 생각했을 까요? 그것은 그가 읽은 라틴어로 된 벌게이트 역본 때문이었습니다. 벌게이트 역본을 비롯하여 몇 몇 역본들은 광채가 나다.’라는 말을 뿔이 달린 모세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빛이 나다.”(, 카란)라는 동사와 ”(, 케렌)이라는 명사의 어근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본문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얼굴이 빛이 나다.” 또는 얼굴에 광채가 나다.”라는 번역이 더 조화를 이루는 것을 봅니다.

1.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이유를 살펴봅시다.

1)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모세는 이미 사십일 사십 야를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송아지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급히 하산을 하였다가 다시 율법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와 역시 사십일 사십 야를 시내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함께 한 시간이 팔십일 팔십 야였습니다. 그것도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면서 지낸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한 것입니다. 그것도 보통 금식입니까? 떡은 물론이거니와 물도 마시지 않았으니 절대금식입니다. 요즘도 40일 금식기도를 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대부분은 물은 마시면서 금식합니다. 절대금식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40주야를 금식하셨습니다. 모세와 같이 절대 금식을 하신 것입니다.
조다난 에드워드 목사님은 일주일 동안 금식을 한 후에 성도들에게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 얼굴에 나타나는 영감 때문에 많은 교인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은혜 받는 역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금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금식하는 시간은 어떤 일 때문에 바쁘게 뛰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과만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오로지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금식하는 시간입니다. 음식을 굶는 것이 큰 것이 아닙니다. 금식하는 동안에 주님과 나누는 영적인 교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중요한 시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얼굴은 광채가 나십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과 마귀가 함께 하는 사람은 얼굴이 다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까?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그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분명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얼굴은 다릅니다. 광채가 납니다. 그러나 마귀가 함께 하는 얼굴은 살기가 납니다. 어둡습니다.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가 누구 때문에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났다고요. “여호와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얼굴이 다릅니다.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2)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것은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변화산의 사건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에게 어떤 신비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한 목적이었습니까? 누가복음 9장을 보십시다.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님이 뭐 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까?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의 용모가 언제 변화되었습니까?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 되고 그 옷까지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는 얼굴 꺼풀만 광채가 났지만 우리 주님은 옷에서까지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어진 이는 사흘만 보지 않다가 다시 만나도 그 모습이 달라져 있어 눈을 비비고 새롭게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부지런히 갈고 닦는 사람은 그 모습이 날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는 사람의 모습이 어찌 빛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십니까? 그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의 영향력이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대화하는 상대를 잘 골라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과 오랜 친교를 나눈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와위엄의 표시로서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난 것입니다.

3)말씀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첫 번째 돌 판을 받아서 가지고 하산 할 때도 역시 같은 영광의 광채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산하면서 돌 판을 던져 깨뜨리면서 그 영광의 광채를 상실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토록 쉽게 타락의 길로 들어선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서 엄청난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대노하였습니다.
32: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 뜨리니라.
분노는 얼굴의 광채가 사라지게 합니다. 40주야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은혜를 듬뿍 받은 모세였습니다. 분명 그의 얼굴에는 광채로 빛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분노하는 순간 그 얼굴의 광채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 받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말이 40일이지 40일 동안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은혜 받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쏟는 것은 일순간입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를 잠재우지 못하면 순식간에 받은 은혜를 쏟아버립니다. 힘들게 은혜 받았는데 그 은혜를 너무나도 허망하게 상실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자신도 그것을 압니다. 은혜를 회복하는 길이 얼마나 험하고 힘들다는 것을 불 보듯이 뻔히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은혜를 상실하고 맙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다혈질적인 성품의 소유자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항상 은혜를 간직하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 같은 사람도 은혜를 쏟아버리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다시금 은혜를 회복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까? 역시 처음과 똑같은 기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4040 야를 절대 금식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회개하고 다시금 말씀을 회복 할 때 모세의 얼굴은 영광의 광채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광채를 소유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영광의 광채를 상실하셨습니까? 소유하신 분은 더욱 말씀을 의지하는 삶을 사십시오. 만일 상실한 분이 계신다면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각오로 말씀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모세의 얼굴에 빛났던 영광의 광채가 여러분의 얼굴에도 빛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모세의 직분에 영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모세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축복이요 만족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극히 영광스럽게 생각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그의 얼굴에 광채가 있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일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도록 하셔서 모든 백성들이 모세의 말에 복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율법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모든 인류를 구속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무시하고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복종해야 할 영광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복종해야 하고 존중되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정죄하는 율법의 직분이 그토록 영광스럽다면 사람을 살리는 복음의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고후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 3: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 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는 율법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치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얼굴에 영광을 더하셔서 그의 말씀의 권위를 높이셨습니다. 이 모세의 율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것이 복음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을 맡은 우리는 모세가 가졌던 것보다 훨씬 큰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복음의 사역자의 얼굴에 직접적으로 광채가 있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의 광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면 그 누구도 복음을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광채를 숨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반드시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탄의 세력이 무력화 되고 죄 가운데 빠져 있던 자들이 그 악한 습관과 의식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영광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입니다.

2)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난 것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하게 될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분과 말씀을 나누고 그분이 주신 말씀을 회복하여 다시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직분을 감당하라고 광채를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대화하는 가운데 그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 전해져서 그도 하나님의 영광을 얼굴에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영광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소유하게 될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우리 구원의 목표는 단지 성품이 변화되어 착하고 의롭게 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몸의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몸의 구속입니다. 우리의 몸이 새로워지는 것이 구원의 최종적인 열매입니다. 지금처럼 병들고 약한 몸이 아닙니다. 날이 갈수록 늙어지고 쇠약해지는 몸이 아닙니다.
모세는 얼굴 꺼풀에서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온몸이 변화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단지 하나님과 영광의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 영광의 광채가 일시적으로 그의 얼굴에 전해진 것일 뿐입니다. 그의 얼굴의 광채는 점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용모가 변하며 심지어는 옷까지도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얼굴 꺼풀에 나는 영광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온몸에서 영광의 광채가 빛나는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여 우리가 여기가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외쳤던 것은 엉뚱한 외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날을 바라보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비록 병들고 아프고 괴로움이 심하지만 우리가 그 나라에 이르게 되면 변화산에서 광채가 났던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3)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복된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34: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심지어 아론조차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위대해서라기보다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광채를 주어서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의 종에게 주신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만 수건을 벗고 말씀선포가 끝나면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었습니다. 그것은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을 배려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지도자는 자신의 표정을 그대로 다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 받습니다. 작은 일에도 지도자의 표정이 어두우면 대중에게 큰 불안을 주게 되고 큰 어려움이 있어도 자도자의 얼굴에 자신감이 있으면 그 얼굴을 보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쁨과 자신감은 일부러 만들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자신도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몰랐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건을 썼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수건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가장 자연스러운 때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면 수건이 필요한 자는 누구였습니까? 모세에게 수건이 필요했습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수건이 필요했습니까? 수건이 필요한 자들은 모세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수건이 필요했다는 것은 아직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어색하고 두려운 것이며 자연스럽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 그들이 모세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가워하지 않고 어색하고 두렵게 느꼈을 까요? 아직도 그들의 양심이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억눌려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편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걸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수건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어색했고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수건을 덮어 씌워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아직도 말씀을 읽으면서 그 얼굴에 수건이 벗겨지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 속에 빛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혀 알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방식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자유 함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대할 때 무엇을 느낍니까?
오늘 우리들의 수건은 율법의 수건이 아닙니다. 이 세상 욕심의 수건입니다. 그것이 씌워져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온전히 돌아올 때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의 욕심을 버리기 전까지는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거리가 멉니다.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 됩니다.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세상의 수건을 벗어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닮아가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애굽의 영광을 버리고 주님과 대화했을 때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게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얼굴에서는 어떤 광채가 빛나고 있습니까?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광채를 소유하셨습니까? 율법을 전수한 모세도 얼굴에 광채가 빛났는데 하물며 복음을 전하는 의의 직분을 소유하는 우리들을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얼굴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와 함께 하는 사람은 마귀의 형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얼굴은 하나님을 반사하는 거울임을 기억하고 얼굴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성한 믿음의 사람 32:30-35, 4:15-16

한생명의 탄생은 온 가족의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은 그 아이가 자라가는 모습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뒹굴다가 앉고 서고 걷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부모의 큰 기쁨입니다. 자라면서 사리판단을 분명히 하고,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질 줄 알고, 자기 생각만 하던 모습이 변하여 부모 형제를 생각하고,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모습으로 자라갈 때 보람을 느낍니다. 생명은 자랍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성도 역시 자라가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라가는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영적으로 이제 막 출발했다면 영적 어린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아도, 학식이 많아도 영적으로는 자라가야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한국 지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어령 교수가 늦게 예수를 믿게 되니 기도하는 것도 감사하는 것도 아직 익숙하지 않아 아내에게 혼이 많이 난다는 이야기를 한 식사 자리에서 했다고 합니다. 신자가 예수 믿고 성령 안에서 거듭나게 되면 성년이라고 바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어린 아이로 영적세계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어린 아이 단계에 머물지 않고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될 때 주님의 기쁨이 되고, 많은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장성한 믿음의 사람은,

 

1.인본주의적인 나 중심의 잘 못된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구약 본문의 배경을 보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3개월 만에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그곳에 진을 친 후 그곳에 머물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체결하고 백성들을 인도할 지시를 받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 머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두 돌 판에 십계명이 새겨진 율법을 받고, 광야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에 관한 내용과, 성막의 설계도와 자제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 시공 방법은 어떻게 할 것 등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을 받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모세가 나타나지 않자, 백성들은 여러 가지 생각과 의견을 나누다가 필경 모세가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를 만든 후 자기 백성의 신()으로 숭배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금송아지 형상을 만든 후 이것이 애급 땅에서 인도해낸 신이라.’ 고 선포하게 된 것은 아마도 그들은 애급에서 사는 동안 그들의 영향을 받아서 였을 것입니다.

 

당시 애급에는 그들이 살았던 고센 근처에 황소의 신 아피스를 숭배했고, 또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머리는 소의 형상을 한 애급의 신 오시리스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집트에 가면 거대한 무덤인 피라밋스핑크스가 있는데, 스핑크스의 모양을 보면 머리는 사람의 모양이고 몸은 짐승의 모양을 한 거대한 상을 보게 되는데, 그런 신()을 섬기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인본주의 적인 생각으로 만든 우상은 하나님의 큰 진노를 사게 했습니다. 모세와 대면 중인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모세로 하여금 이렇게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네 백성들이 부패하였으니 급히 내려가라. 그들이 나를 거절하고 자기를 위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숭배하고 섬기며 말하길 이것이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우리 신이라 하는구나, 내가 그들을 멸망시키겠다.’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우상 종교를 만들어 놓고 섬기는 악한 행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성숙한 신앙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우상을 향하여 돌비로 내리쳤고, 의분을 가지고 우상을 갈아 물에 타서 백성들로 마시게 했습니다.

장성한 신앙의 사람은 이러한 인본주의 신앙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서 떠나게 됩니다.

 

인도에 아주 아름다운 왕비가 있었습니다. 결혼 한지 1년 밖에 안 되었는데 그만 병이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왕은 왕비를 무덤에 묻고 그 슬픔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비의 무덤가에 무엇인가 기념이 될 만한 것을 세워 왕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표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비의 무덤 바로 곁에 자기를 상징하는 최고의 미남 조각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그 조각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하고 왕의 가문을 상징하는 호랑이 조각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1년 후에는 그것도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자기의 재력을 상징하는 호화로운 집을 지었고, 그것도 부족하다 생각해 막강한 자기의 권력을 상징하는 큰 성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왕이 동산에 올라가 보니 미남 동상이 있고, 호랑이 동상이 있고, 호화로운 집이 있고, 훌륭한 성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 가운데 있는 무덤이 미관을 해치는 것 같아 부하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저 가운데 있는 무덤을 치워버려라." 이 이야기는 웰스(H. G. Wells)의 인도의 민화를 중심으로 한 "모험 소설의 왕자"라는 단편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왕처럼 어리석은 과오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처음에는 사랑의 하나님을 마음중심에 모시며 살다가 언제부터인가 내 안에 하나님 대신 자기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재물과 권력을 자랑하기 시작하면서 결국에는 하나님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마음중심에서 치워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장성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사울 왕, 솔로몬 왕도 그랬습니다. 우리 모두 장성한 신앙의 사람이 되어 나 중심의 인본주의의 잘못된 신앙에서 떠나기를 소망합니다.

 

2.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을 가지고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신약 본문 엡4:13-14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성도가 영적으로 장성한 신앙인이 되려면 영적 성숙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어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 때 신앙 성장이 일어나게 됩니다.

벧전2:2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늘 말씀의 양식 먹고서 자라고 뜻이 주님과 같아져야 합니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마치 어린 아이가 분별력이 없어 미혹하는 자에게 넘어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유혹에 넘어지게 되고,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훈련과 연단의 과정을 통해 주님과의 영적 교제가 깊어질 때 신앙 성장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장성한 신앙의 사람들을 보면 시련을 통한 훈련과 연단의 과정을 경험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 남의 집 종살이로, 바른 신앙으로 살려고 하다 모함을 받아 감옥살이를 하는 과정에서 더욱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 하는 법을 배웠고, 애급의 총리가 된 후에도 겸손히 하나님만 높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7년 흉년의 때에 백성을 기근에서 구하고 나라를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욥이나 다윗도 고난을 통해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 장성한 신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 역시 광야에서 양을 치며 40년간의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장성한 신앙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기를 힘쓸 때 믿음의 성장이 일어납니다. 4:15-16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몸의 머리로, 성도들을 몸의 지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영적 교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교회 안의 다른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많은 성도들과 연결되어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연약한 성도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봉사의 일을 할 때 건강한 모습으로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한 교제 가운데서 각자의 문제를 내어 놓고 서로를 위해 중보의 기도로 연합이 될 때 문제가 해결되고,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며 치유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할 때 치유됩니다. 성도의 교제를 나누다 보면 까다롭고 별난 사람과도 교제하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단련시키고 인격을 다듬어 가시고, 나의 약점과 강점을 발견하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으로 자라 장성한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내게 주신 은사로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자로 살게 됩니다.

본문 출32:32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사랑의 기도였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430년 동안 애굽의 노예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던 백성의 부르짖는 간구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출애굽 해서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시내 광야까지 왔으며, 또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지도 얼마 되지 아니 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그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 대신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기들의 신이라고 춤추고 먹고 마시는 그 동족을 볼 때, 그들이 얼마나 밉고 원망스럽겠습니까? 모세는 백성이 지은 죄를 대신 사랑으로 뒤집어쓰고 땅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구합니다. "만약 용서해 주시지 아니하면 차라리 제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십시오." 라고 간구합니다.

 

성숙한 신앙을 가진 모세는 자기를 희생해서 라도 백성들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하고자 했습니다. 사랑이 충만하여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도 바울도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 롬9:1-3에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모세나 바울은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을 살리고, 넘어진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자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출애굽 할 때부터 줄곧 그들을 사랑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한 죄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죄이지만 모세는 그러한 그들의 죄를 끌어안고 백성과 자신의 운명은 둘이 아닌 하나라고 생각하며 간구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낸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여 장성한 신앙을 소유하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열립니다. 관계에도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지만 용서하는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품이 넓어져 사람과의 관계가 넓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영향력 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런 영적인 변화는 세상에도 빛과 소금이 되어 역사가 일어나게 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으로 우뚝 서고 교회 밖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역사가 생깁니다. 모세처럼, 신약 본문을 기록한 바울처럼 남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으로 삽시다.

 

링컨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너무 기도를 많이 한다고 주변에서 말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지혜, 내 능력, 내 노력만 갖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미합중국의 통일을 이룩하고 흑인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그는 남북전쟁 승리 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북군의 승리는 기도의 승리였습니다. 우리에게 남군의 로버트 리 같은 명장이 없었음은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장성한 믿음을 주님께 보여드려 그래도 네가 노력을 많이 했구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힘써 우리 모두 장성한 믿음으로 남을 살리고 세우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사람은,

.인본주의적인 나 중심의 잘 못된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을 가지고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내게 주신 은사로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자로 살게 됩니다. 아멘,

<2022. 08. 04. 호현낙선>

 

출처:성산 사랑원문보기글쓴이:호현낙선

송구영신예배설교. Way Maker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317-22)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 전 세계 인류의 화두는 단연코 “covid-19” 이었습니다. 코로나가 발병된 지 2년이 지났지만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와의 긴박한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백신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갔고, 긴급으로 만들어진 백신은 수급 물량 부족으로 아우성 이었는데, 어렵게 백신을 접종했더니 부작용으로 인해 또 다시 안타까운 죽음이 잇따랐습니다.

 

백신 접종으로 인해 생활환경이 좀 나아지나 싶었더니 델타변이, 오미크론 변이들이 출현되어 언제쯤 이 혼란 상황이 진정 될지 도무지 예측이 안 됩니다. 이런 코로나 상황에, 종교생활도 통제를 받아야 하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가정도, 직장도, 학교도, 온통 초긴장 상태로 살얼음판입니다. 이 모든 어려운 상황이 기약 없이 2022년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간구하면서 기도의 끊을 놓지 않았고, 모두가 예배의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모든 성도들의 안전과 건강이 위협 받았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송구영신예배를 함께 드리게 되어서 무엇보다도 감사합니다. 우리의 안위를 지켜 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올려 드립니다. 우리 다 같이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신 전능하시고 감사하신 하나님께 두 팔을 높이 들어 영광의 박수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과거 중국의 경제 개방 개혁 정책을 이끌었던 등소평 주석은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를 선포했습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으로,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중국 국민들이 잘 살게 될 수 있다면 서방의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과감하게 수용하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고양이는 쥐를 잘 잡아야 실력 있는 고양이 인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 12일 교수신문에서는 고양이와 쥐가 한 곳에 함께 있다는 뜻을 담은 묘서동처(猫鼠同處)’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발표 했습니다. 곡식을 훔쳐 먹는 쥐나, 쥐를 잡지 않고 내버려 두고 쥐와 함께 노는 고양이는 정치 집단의 실상을 비유한 말입니다. 공정한 법 집행과 감시기능이 제대로 작동되도록 앞장서야 할 정치인들이, 오히려 이권에 개입하거나 한통속이 되어 있습니다. 교수신문에서의 비판처럼 선거에만 혈안이 되어 백성들의 궁핍함은 살피지 않고 있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싸잡아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올해의 사자성어 2위에는 코로나 정국을 지나면서, 긴 피난길에 사람도 말도 다 지쳐 있다는 뜻의 인곤마핍(人困馬乏)’이 선정 되었고, 3위에는 진흙탕에서 개들이 싸운다는 뜻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선정되었습니다. 일반 국민들, 특히 취약계층에 있는 약자와 서민층들은 죽어라 죽어라 하고 있는데, 위로 해주고 돌보아 줄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온통 주변에 쥐, 고양이, 개들로 묘사되는 선동꾼들만 가득합니다.

 

코로나의 불안감과 공포 속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따뜻한 한마디를 제대로 위로받지 못한 곤고한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들 모두가 송구영신 예배까지 한 해 동안 살아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묘서동처, 이전투구를 일삼고 있는 자들은 쏙 빼버리고, 인곤마핍의 곤고한 시간을 잘 이겨내신 여러분 모두를 정말 진심으로 칭찬하고 위로합니다. ~하셨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 시간 함께 예배드릴 때, 힘들고 아픈 기억들은 말씀의 큰 은혜를 통해 다 보상 받으시고, 다시 힘내서 한 해를 살아갈 수 있는 체력과 능력과 지혜가 부어지는 복된 예배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Way Maker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가 출애굽 백성이 되어 보겠습니다. 광야 벌판 앞에 서 있다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어떤 길을 만드셔서 우리 모두를 2022년으로 이끌어 가실지, 묻고, 듣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결단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Way Maker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꼭 붙잡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대하고 강력한 은혜의 사건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출애굽 사건일 겁니다. 출애굽 사건은 단순히 오랜 노예생활과 압제에서 풀려난 사건이 아닙니다. 이 사건에는 선택하심, 부르심, 인도하심, 약속하심, 보호하심 등,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모든 과정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가 극대화된 사건 중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나 작고 연약한 소수민족이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고, 말씀의 언약(약속)을 맺었고,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동행과 보호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유대 민족이 선민의식을 지나치게 내세우며 잘난 척 하는 정도가 심해서 그렇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큰 은혜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것에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합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전격적인 구원을 받고 기쁨과 감격 속에 애급에서 나왔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광야였습니다. 노예로 있을 때는 그래도 누울 만 한 집과, 따뜻한 물 한잔이라도 먹을 수 있었지만, 광야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막막함뿐이었습니다.

 

수맥 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어디로 가야할지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길이 없는 곳 광야, 길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곳이 광야 이었습니다. 노예를 벗어난 기쁨과 감격은 마음이 붕붕 날아갈 것 같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지만, 곧바로 마주 닥친 광야의 현실은 답도 없고, 해결도 할 수 없고, 어둠과 찬바람이 엄습해 왔습니다.

 

코로나 시대의 삶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광야로 내 몰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겪어야 하는 냉혹한 삶의 현장속의 광야, 영혼이 메말라가고 은혜가 궁핍해지는 어둠 속의 광야, 누구하나 떡 한 조각, 물 한 조각, 따뜻한 말 한마디 진심으로 건네지 않고 술수와 거짓이 판치는 광야, 이런 광야의 현장이 우리가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야 하는 세상속의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탈출했을 때의 그 감격, 그 기쁨이 있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구원 받은 것으로 인해 평생의 감격과 기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여전히 광야 앞에 서 있다는 것은 냉엄한 현실 입다. 예배를 드리고, 은혜 받은 말씀을 가슴에 품고 세상으로 나아가지만, 역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은 물고 물리고, 경쟁에서 이겨내야 하는 정글 같은 세상의 광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둠과 추위 속의 광야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광야로 탈출한 이스라엘을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길이 나오는 17절을 읽어 드립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급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아멘.

 

첫째로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 나옵니다. 이 길은 이집트에서 나와 해변을 따라 올라가면 블레셋 사람의 땅, 곧 가나안 땅으로 직행 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의 장점은 가깝다는 겁니다. 빨리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은, 너무 노출된 길이고, 블레셋에서도 중요한 길이었기에 군사들이 항상 지키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군대가 조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이 길로 갔다면 대부분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을 겁니다.

 

하나님은 전쟁이 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도망쳐서 다시 애급으로 돌아갈 것을 아시고,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100% 빠른 길을 선택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간섭으로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어느 길로 가라고 하는 인도함도 있지만, 여기에서처럼 어느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인도함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Way Maker,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길을 닫으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각자의 삶의 길을 열심히 걸어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 면서 오셨습니까? 만약에 여러분 앞에 빠른 길, 쉬운 길, 넒은 길, 평탄한 길이 있었다면 십중팔구 그 길로 나아가려 했을 겁니다. 그러나 먼 길, 꼬불꼬불 한 길, 좁은 길, 험한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일부러 선택해서 갈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길을 열어 달라고는 호소를 잘 하는 편이지만, 이 길로는 절대 가지 말라는 말씀은 잘 듣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신실한 믿음을 지녔던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다른 방향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위압적인 신념 때문에 꼭 그 방향으로 가아만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생활에 직접 관여하신다는 것은 성경에 가장 명백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대한 증거를 수도 없이 경험했으며, 내 의지 밖의 어떤 다른 힘에 의해서 조종 됐던 경험을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그 힘이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됐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론상으로는 가시적인 근거가 없어서 결정할 길이 막막할 때도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를 명백하게 제시 받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의 판단에 의해 결정한 적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라거나 하지 말라는 의견에 따라서 결정할 때는 결과가 언제나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판단했을 때는 늘 후회만 남는 결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중대 의사의 결정에 있어서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알려 주십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하나님이 가라고 알려주시는 길은 빠르게 가고, 가지 말라고 막아서시는 길은 주저 없이 포기했던 인물이 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귀중한 믿음의 유산을 남겨 주었습니다. 링컨처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식 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으로는,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셔서, 이 길로 가라고 하셔서 제가 큰 복을 받았습니다. 라는 간증들은 참 많이 들어 봤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 길로 가지 말라고 하셔서 멈추었더니, 포기했더니, 평안과 기쁨을 얻었습니다. 라는 간증은 거의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지나 인도함 보다 자신의 의지나 능력, 또는 외부 사람들의 조언들을 더 중요시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르고 편한 블레셋 사람들의 길을 선택했다면, 다시 애급의 노예로 되돌아갔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노예로 살아가기는커녕 극도로 화가 나 있는 바로 왕에 의해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막아서는 길을 무시하고 내 생각대로 직진했다가는, 죄의 노예로, 사탄의 종으로, 멸망과 패망의 길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당장의 눈앞에 보이는 빠른 길, 쉬운 길, 넒은 길, 평탄한 길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반드시 듣고, 순종하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구하셔서 어떤 길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각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는 순종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의 걸어온 길은 이미 지나온 길입니다. 후회해도 다시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보다 내 의지를 앞서서 다시 애급으로 돌아가게 되는 길을 선택한 일들이 있으셨다면, 2022년에는 다시는 그러한 선택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 합니다. 2022년으로 나아가시는 00교회 모든 성도는 하나님이 막아서시는 길은 절대로 가지 않고, 인도하시는 오직 그 길로만 나아가시는 믿음과 순종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신 두 번째 길이 나옵니다. 18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급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21,22입니다.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서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인도하시지 않고 막으셨던 길은 블레셋 땅의 길이었다면, 이제 나아가라고 인도하여 가실 길은 홍해의 광야 길이었습니다. 빠르고 쉬운 길을 눈앞에 두고, 바다 쪽으로 돌아 돌아서, 막막한 유대 광야로 들어가야 하는 길이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를 받고 있었지만, 내심 마음속으로는 이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저쪽이 가나안 땅인데 지금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잖아, 왜 이리로 가는지 모세에게 따져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이런 의심과 불안의 마음들이 가득했을 겁니다.

 

이 길은 비록 돌아가는 길, 멀고 먼 길, 끝이 안 보이는 광야로 들어가는 길 이었지만, 하나님은 완벽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단지 길 안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명백한 증표입니다. 눈앞에 거대한 구름기둥과 불 기둥이 항상 있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대단한 볼거리였으며, 심리적인 안정을 주는 최대의 효과가 연출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가까이에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해서 더 이상 불안과 염려의 마음을 떨치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이 구름 기둥 불기둥을 보내셔서 밤낮으로 전 세계 모든 인류가 그 광경을 보게 하시면, 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강력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터인데, 한 일 년만 그렇게 해 주시면 어떨까 라는 공상을 해 봤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이 생각났습니다. 이 말씀과 함께, 구름기둥 불기둥 보내 주면 너는 광야에서 40년 살아도 되겠지 라는 말씀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주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즉시 쓸데없는 공상을 거두었습니다.

 

“Way Maker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 홍해 바다의 길만이 이스라엘 백성이 살 길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2022년도에 우리는 돌아서 가는 길, 광야 길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항상 머물러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여 주시고 안전이 철저하게 보장되는 길입니다.

 

여러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의미들을 말씀 드릴 때 잘 들어 보십시오. 이것만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2022년 한 해 동안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잘 따라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믿음).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살아 역사하시는 실존의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증표입니다. 모든 백성이 다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의심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순종). 하나님이 말씀으로가 아닌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여 주시는 이동 명령이었습니다.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행진하였고, 구름기둥이 머물러 있으면 멈추었습니다. 자동적인 명령 법칙이 작동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사랑).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무섭고 두려운 분, 무관심하고 침묵하시는 분, 너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사람들과(나와) 항상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하시면서 살피시고, 도와주시고, 힘주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권능 전지전능). 하나님이 약하고 무기력한 분이 아니라 강력한 권능과 권위를 발휘하시는 분으로, 모든 의심, 두려움, 불안을 다 가두어 가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약속과 성취 구원 영생의 길). 하나님은 단 한 두 번의 짧은 만남으로 우리를 대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의 무거운 짐, 질병의 짐, 고난의 짐을 다 짊어지시고,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약속의 그 땅에 도착 할 때까지 전적인 책임을 지시는 분입니다. 광야를 벗어나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은 한 사람도 포기하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바로, “Way Maker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이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참 좋으신 하나님 이십니다.

 

제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의미를 다섯 가지 말씀 드렸습니다. 이 의미에 따라 신앙생활 하시면 틀림없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존재 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순종, 가까이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불같은 사랑, 연약함과 무기력을 일깨워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 내 모든 시험과 무거운 인생의 짐을 거뜬히 짊어 주시고 구원 영생으로 이끄시는 way maker 하나님, 2022년도에 이런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은 다면, 내가 그 길로만 잘 따라간다면 범사에 형통한 한 해를 넉넉히 보낼 수 있습니다.

 

처음 가는 길이고, 불안하고 염려가 가득한 길이었지만, 홍해 바닷길로 대열을 지어 묵묵히 따라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2022년도에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가 “Way Maker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길만을 따라서 한 명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아니하고 질서 정연하게 이동하기를 소망합니다.

 

코로나의 광야, 불확실한 미래의 광야,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한 병마의 광야, 자녀교육과 재정의 풍족을 염려하는 광야…….모든 광야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하여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 꼭 기억 하십시오. 우리 눈앞에 구름기둥, 불기둥이 뚜렷하고 선명하게 떠올라 있음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한 분이면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Way Maker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만 나와 함께 해 주시고, 내 가족과 함께 해 주시고, 우리 00교회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담대히 선포하며 2022년의 새 날을 향해, 1년 동안의 삶의 여정을 위해 담대하게 나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Way Maker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 2022년도의 길을 열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를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단단하게 붙잡아 주셔서, 오직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로만 나아가도록 끝까지 인도하여 주옵소서. 길과 진리요 생명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 닛시의 은혜 출17:8-16, 6:10-18

 

유명한 피카소 작품 중에 손안에 사람이 들어 있는 조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영어로 'The hand of the God'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입니다. 이 작품이 표현하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것 같고 힘 있는 것 같아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도, 축복도, 성공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고,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한 결과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충성한 결과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한 모든 일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 16:3"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희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전에 미국의 대통령이 우주선을 발사할 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다만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죽는 것, 흥망성쇠는 하나님 손에 맡길 뿐입니다.

 

6월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국군장병들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현충일이 있고, 6.25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는 달이어서 호국의 달로 명명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6.25 상기 주일이기도 한데, 차제에 성도가 싸우는 싸움은 어떤 싸움인지, 그리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어떠해야 하는지를 두 본문을 중심으로 여호와 닛시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성도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들입니다.

 

신약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앞부분에서 우리가 살면서 맺어지는 여러 종류의 인간관계,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상전과 종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종말로라고 본문을 시작하면서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 엡6:10-11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우리가 대항해 싸워야할 적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적은 우리의 행복을 파괴하고, 우리의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의 삶을 패배로 이끌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영적인 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늘 깨어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대적은 바로 사단 마귀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마귀라는 단어가 복수로 기록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언제나 단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로서 적대세력의 우두머리를 뜻합니다. “마귀는 문자 그대로의 뜻은 참소 자입니다. 삶의 무대 배후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이 사단 마귀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C.S. 루이스는 마귀가 가장 조정하기 쉬운 존재는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고 하였는데, 마귀가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마귀는 얼마나 안심하고 들어가 공작을 시작하겠습니까? 이 참소자의 존재에 대해서 계 12:9-10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참소합니다. 또 우리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어 학대하도록 합니다.

 

또한 마귀라는 말의 다른 뜻은 던진다,‘, ’그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뜻과 같이 마귀는 그 하는 역할이 하나님과 믿는 자와의 관계를 갈라놓고, 남편과 아내 사이를 갈라놓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갈라놓고, 주인과 종의 관계를 갈라놓고, 주님을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간의 사이를 갈라놓는 일을 하여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일을 자행합니다. 그 모습을 11절에서 마귀의 궤계라고 하였습니다. 궤계를 메소도이아라고 했는데, 영어의 ‘method'가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마귀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가정을 깨뜨리기 위해서, 우리의 교회를 깨뜨리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깨뜨리기 위해서 실로 놀라운 전략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단, 마귀의 밑에는 귀신들이 있습니다. 본문 엡6: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싸우는 선한 싸움은 인간들, 곧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곳의 영적인 문제입니다. 여기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우리의 싸움의 대상입니다. 이것들을 총칭하는 하나의 단어가 있으니, 바로 귀신으로 마귀의 심부름을 하는 하수인입니다.

 

본문에 정사와 권세라는 표현을 썼는데, ‘정사란 한 마디로 말해 하나의 조직을 가지고 다스리고 통치하는 하나의 세력정부와 같은 조직을 말합니다. 악령들은 하나의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사불란한 조직력을 형성해서 인간의 세계에 침투하여 사람들을 다스리는 세력, 그들이 정사입니다. 세상 군왕들을 이용하여 믿는 자들을 박해하기도 하는 이들은 아주 막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궤계를 쓰는 지혜도 있어, 우리보다 훨씬 지혜롭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의 약점이 무엇인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마음의 생각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심리학 박사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처럼 전지한 존재는 아닙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보다 힘이 있고, 지혜로운 마귀를 이기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이 싸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단 마귀와의 싸움인 것을 알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들이 됩시다.

 

2.선한 싸움에 승리를 위해 영적 무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신약 본문 엡6: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군사의 무장처럼 성도가 취해야 할 전신갑주에 대해 본문에서 몇 가지로 말합니다.

 

*신실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14). 여기서 '진리'란 참, 성실, 진실하다는 말입니다. 마귀를 이기기 위해서는 두 마음을 품어서는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허리띠는 일하려 하는 자의 성실한 자세를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벧전1:3)라고 했는데, '허리를 동이라'는 말과 '근신하라'는 말은 동의어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야 합니다.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14) 했는데, 성도를 참소하고 정죄 하는 마귀를 이기려면 내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예수 십자가의 공로를 앞세우며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가슴에 호심경을 붙이고 있는 사람은 내 의가 아닌 주님 안에서 십자가 공로로, 믿음으로 의로워진 자가 되어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라 고백하며 예수님의 공로만 자랑합니다.

 

*전도가 성도의 무기입니다.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15) 마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갖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하여 전도자의 발을 꽁꽁 묶어 놓으려 하지만 주님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게 되고, 전도할 때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16), ‘구원의 투구와’(17)했는데, 마귀는 성도를 넘어뜨리기 위해 계속 불화살을 쏘아 댑니다. 실패의 불화살, 질병의 불화살, 시험의 불화살을 쏘아 대지만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일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고 능히 다 막아 낼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무기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절하) 여기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말씀은 성도의 무기입니다. 예수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말씀의 검으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성도의 또 다른 무기는 기도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18)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쫒아 내시고,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마귀는 기도하는 자를 무서워합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아말렉과의 전쟁의 가장 큰 승리 비결도 지팡이를 든 모세의 기도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전신갑주로 무장할 때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쓴 책인 승리하는 신앙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의 한 랍비가 어느 유대인에게 "당신이 길에서 돈이 많이 들어 있는 지갑을 주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유대인은 "솔직히 말해서 저에게는 아이들도 많고 몹시도 가난해서 하나님께 제게 주신 선물인 줄 알고 가지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랍비는 그대는 도둑이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다른 유대인에게 "당신이 돈이 많이 들어 있는 지갑을 길에서 주웠다면 어떻게 하겠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대답합니다. ", 그야 물론 즉시 임자를 찾아서 주겠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그대는 바보요."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유대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대는 돈이 많이 들어 있는 지갑을 주었다면 어떻게 하겠소?" 그 사람은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약한 사람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유혹에 약하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정말로 내 앞에 일어났다면 그 돈지갑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랍비는 "그대 말이 옳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죄 앞에 얼마나 당당했으며, 유혹 앞에 얼마나 꿋꿋했습니까? 얼마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유혹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내가 정직했다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시험을 이겼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우리가 시험도 이기고, 자신의 욕심도 이기고, 두려움도 이기고,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영적 무장을 갖추어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선한 싸움에 승리를 위해 합심하여 협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약 본문의 배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 광야 르비듬에 이르고 보니 마실 물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반석에서 물이 나와 백성이 갈한 목을 축이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에서의 후손인 아멜렉 족속이 일어나 지쳐버린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하여 공격해 오므로 불가피 하게 광야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 전쟁을 위해 먼저 여호수아를 전투 사령관으로 하고 전투부대를 편성하여 출전을 시키고, 모세는 아론과 홀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싸우는 이스라엘 군사들을 바라보며 지팡이를 잡은 손을 들어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세의 기도의 손이 올라갔을 때 아멜렉 군이 이스라엘 앞에서 폐하여 후퇴하게 되었지만, 피곤하여 모세가 손이 내려올 때 전세가 역전이 되어 이스라엘이 폐하여 도망치는 희한 한 일이 반복하여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산꼭대기에서 몇 차례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아론과 홀은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붙잡아 드리면 되겠다고 생각하여 아론과 홀이 근처에 있는 큼지막한 돌을 굴러다 놓고 평안히 앉도록 모세를 모셔 놓고 아론이 이편에서, 홀은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하므로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멜렉과 그 백성을 처서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승리의 요인을 보게 됩니다.

 

먼저, 지팡이를 들고 기도하는 모세의 손입니다. 본문 출17:12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 한지라했습니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지팡이가 들려져 있습니다. 그가 부르심을 받을 때, 애급에 재앙을 내리실 때, 홍해가 갈라질 때, 반석에서 물을 내실 때 등 과거에도 이스라엘 승리를 위해서 쓰임을 받은 지팡이였고, 현재에도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서 아멜렉 군대 앞에서 기도하는 모세의 손에 들려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다음에, 아론과 홀의 협력하는 손입니다. 본문 17:12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홀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요, 훌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남편이요 모세의 매형입니다. 80세가 넘은 고령의 모세가 오랫동안 손을 들고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 놓아 그 위에 앉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쪽에서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붙잡아 주었습니다. 그들의 협력으로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했습니다. 그 결과 아말렉을 도말하고 여호와 닛시’, 즉 승리의 깃발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모세도 귀하지만, 협력자인 아론과 훌도 귀합니다.

 

신약 본문을 기록한 위대한 사역자 바울 곁에도 수족처럼 협력해 주었던 바나바, 실라, 디모데, 누가, 브리스길라 부부, 오네시모, 루디아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갈라디아 교인들은 할 수만 있으면 눈이라도 빼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협력자들이 귀합니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도 같이 협력하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사단을 대적하는 담대한 신앙입니다.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군사들이 아말렉을 대항해 담대히 싸웠습니다. 아말렉은 성도들이 대적하여 싸워 이겨야 할 사단의 모형입니다. 구약 본문에 싸우라’ ‘쳐서’ ‘싸우고라는 전쟁 술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전쟁에는 전진, 공격, 후퇴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신앙생활을 왜 공격이라고 표현했는가 하면 성도가 싸워야할 대상인 사단은 대적하고 공격해 물리쳐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그 곳 거민과 싸우게 되는데 너희가 쫓아냈고, 쫒아내지 못했고라는 말이 반복해서 기록된 것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사탄의 권세를 점령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기억할 것은 나와 내 가정에서 나의 생활을 괴롭히는 사탄의 세력을 쫓아내는 것에 신앙생활의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밤낮 공격하는 사탄의 힘은 우리보다 강함을 잊지 말고 신앙생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본문 엡 6:11에서 마귀의 세력을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고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선한 싸움에 승리하기 위하여 한 마음으로 합심하고 협력하여 기도하고, 담대한 신앙으로 무장하여 사단 마귀를 이기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성도가 싸우는 싸움은 어떤 싸움인지, 그리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어떠해야 하는지를 두 본문을 중심으로 여호와 닛시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성도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들입니다.

 

.선한 싸움에 승리를 위해 영적 무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선한 싸움에 승리를 위해 합심하여 협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멘.

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1

 

설교본문: 35:3(참고. 35:1-3; 15:32-36)

설교제목: 안식일과 불

성경봉독: 35:1-3; 15:32-36

요절: 35: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5:3)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1)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2)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35:1-3)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32)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으나(33)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35)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36)”(15:32-36)

 

 

<서론>

이 말씀은 안식일에 관한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죽이라고 하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는 이스라엘의 각 처소에서 불을 피우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준수해야 할까요?

교회사 속에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견해가 존속해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율법주의입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을 오늘날에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킬 것입니다. 유대교 신자들과 안식교가 그러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편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반율법주의 또는 율법 폐기론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을 성취하시고, 우리에게 안식을 주셨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 율법은 신약시대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에 불을 켜지 말라는 이 말씀을 오늘날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구약의 율법을 성경에서 도려내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저열하게 취급하여 쓰레기통에 던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양쪽 주장을 모두 배격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모두 잘못된 것이라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적용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주일에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지 않습니까? 전깃불은 어떨까요? 이것은 불입니까, 아닙니까? 15:32-36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나무하는 자를 돌로 쳐 죽이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잘못된 견해를 정죄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바르게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제가 이 본문에 근거하여 여러분에게 전할 설교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주제: “안식일은 불의 날입니다.”

저는 다음의 순서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겠습니다.

 

대지:

1. 안식일에는 각 개인의 처소에 불을 켜지 말아야 합니다.

2. 안식일에는 여호와의 불만 켜져 있어야 합니다.

 

1. 안식일에는 각 개인의 처소에 불을 켜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 율법을 대할 때, 그것이 문맥(context)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고전 14:33, 40). 이 말을 했다 저 말을 했다, 정신없이 오락가락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율법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며, 때로는 죄가 나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그분의 말씀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또 하나의 편견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편견입니다. 율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문자주의(literalism)].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20:16-18). 그러나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에 살던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들을 살려줍니다(6:22-25). 여호수아가 이들을 살려준 것이 잘못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족속을 모두 죽이라는 하나님의 이 명령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21:23-25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23)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24)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25)”(21:23-25)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 것이며(26) 그 남종의 이나 여종의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줄지니라(27)”(21:26-27)

 

종의 한쪽 눈이라도 상하게 하면, 그 대신 그 종을 해방시켜 자유인이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종의 이빨 하나를 상하게 하더라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이 원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심지어 자신의 노예까지도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지킬 수 없는 명령입니다. 성경 본문이 율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적용하지 못하게 문맥을 통해 자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본문에 담아두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안식일 규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죽이라고 하십니다(2). 이 명령은 출애굽기 31장에도 나옵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14)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15)”(31:14-15)

 

이런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안식일 규정을 어긴 사람들을 모두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조차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사람들을 꾸중했지만, 죽이지는 않았습니다(16:25-29).

이뿐 아닙니다. 느헤미야 13장을 보면, 안식일에 장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3:15-21). 당시 총독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장사하는 사람들을 엄히 꾸짖었습니다. 다시는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13:15).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편견을 버리십시오.

 

첫째, 율법은 앞뒤 문맥과 무관하게 어려운 내용이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둘째, 율법은 마치 기계적으로, 그러니까 예외 없이 문자 그대로 지키도록 주신 것이라는 생각도 잘못입니다.

 

이 두 가지 편견을 버리고 나면, 이제 이 본문 말씀이 우리 앞에 열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죽이라고 하시면서, 단 한 가지 실례만을 언급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

 

이 문맥에서 안식일에 죽임을 당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안식일에 자기 처소에서 불을 피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 실례를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32)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으나(33)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35)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36)”(15:32-36)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무하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나무를 모으다입니다. , 나무토막이나 나뭇가지를 모으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돌로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를 돌로 쳐 죽입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이익을 위해 안식일에 장사하기 위해 짐을 옮기는 자들을 죽이지 않고 꾸짖기만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를 돌로 쳐 죽이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큰 죄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안식일에 나무하는 자에게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가 왜 나무토막을 모으려고 했을까요? 팔려고요? 조각하려고요? 가구를 만들려고요? 목공예를 하려고요? 윷놀이를 하려고요? 거기는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것이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무를 모으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불을 피우기 위해서입니다.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2)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35:2-3)

 

이 말씀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웬만하면 죽이지 않지만, 이 말씀을 어길 때는 죽였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에 불을 피우는 것이 다른 그 어떤 죄보다 더 큰 죄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가는 것보다 불을 피우는 것이 더 심각한 죄입니다. 안식일에 짐을 옮기는 것보다, 자기 이익을 남기기 위해 장사하는 것보다 불을 피우는 것이 더 큰 죄입니다.

왜 그럴까요? 안식일에 자기 개인 처소에서 불을 피우는 것이 왜 그렇게 죽임을 당할 정도의 큰 범죄일까요?

 

2. 안식일에는 여호와의 불만 켜져 있어야 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큰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는 큰 세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단락은 1~18장인데, 애굽에서 시내 산으로 가는 내용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구원입니다. 둘째 단락은 19-24장인데,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서로 언약을 체결하는 내용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회입니다. 셋째 단락은 25-40장인데, 성막 건축 명령과 시행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배입니다.1) 그러니 출애굽기 전체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교회를 이루어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출애굽은 목표 지점이 아닙니다. 출발점입니다. 출애굽기의 목표 지점은 성막 건축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예배를 통해 교제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라고 열 번도 넘게 반복하여 말합니다(참고. 3:12, 18; 4:23; 5:1, 3, 8, 17; 8:1, 8, 20, 25-29; 9:1, 13; 10:3, 7-11, 24-26; 12:31; 13:3-6).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의 세 번째 단락 가운데 위치합니다. , 안식일에 이스라엘 모든 처소에 불을 피우면 안 된다는 이 말씀은 성막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배와 관련된 문맥 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

 

그렇다면 이 말씀이 성막과, 그리고 예배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출애굽기 세 번째 단락의 내용을 이해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전 언급한 바와 같이, 출애굽기 세 번째 단락인 25-40장의 핵심 내용은 성막 건축입니다. 무려 열여섯 장이나 되는 이 긴 내용도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25-31장인데, 성막 건축 명령입니다. 둘째는 32장부터 35:3인데, 금송아지 배교와 회복입니다. 셋째는 35:4부터 40장인데, 성막 건축입니다. 이를 예배와 관련하여 다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25-31)입니다. 성막과 관련한 모든 내용을 하나님께서 친히 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만 예배해야 합니다. 둘째, 인간이 고안한 예배(32-35:3)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꼭대기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이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고, 다시 회복하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35:4-40)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지시하신 대로 성막을 건축합니다.2)

그런데 각 단락의 마지막이 참 흥미롭게 끝납니다. 첫째 단락(25-31)안식일로 끝납니다. 안식일을 범하면 죽이라는 명령입니다(31:12-18). 둘째 단락(32-35:3)의 마지막도 안식일로 끝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 본문입니다. 안식일에 불을 피우는 자는 죽이라는 명령입니다(35:2-3). 세 번째 단락이자 출애굽기의 결론은 로 끝납니다. 여호와의 구름이 완공된 성막을 덮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여호와의 구름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되어 이스라엘을 인도한 바로 그 구름입니다. 여호와의 구름은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보입니다. 이 불 구름이 성막에 덮였으니 성막 전체는 마치 여호와의 불, 여호와의 영광으로 활활 타는 궁궐과도 같습니다.3)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을 함께 찾읍시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34)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35)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36)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37)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38)”(40:34-38)

 

마지막 구절(38)을 한 번 더 읽겠습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38)

 

이렇게 출애굽기는 불로 끝납니다. 성막에 가득한 불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으로 충만한 불입니다. 그분의 구름 속에 있는 불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불입니다. 출애굽기는 이렇게 불로 끝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막에는 여호와의 불이 언제나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

 

여러분!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십시오. 성막이 완공된 이후, 이스라엘은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서 각각 세 지파씩 진을 칩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거주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예배 중심의 삶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되면, 이스라엘 각 처소의 모든 불이 꺼집니다. 그러면 불이 하나도 없습니까? 아닙니다. 단 한 곳에는 계속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성막입니다.

 

먼저, 성막의 뜰(마당)에는 놋으로 만든 제단이 있습니다. 이 제단 위에 짐승을 올립니다. 이 짐승을 태우는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왜 불을 피웁니까? 이 짐승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기 때문입니다. 이 짐승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향한 여호와의 진노의 불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 짐승에게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에 각 처소의 모든 불을 꺼야 합니다. 불을 끄는 것이 이 율법의 목표가 아닙니다. 자신의 처소에 있는 불을 끄고 하나님의 불을 바라보는 것이 이 율법의 목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속의 은혜로 인도하는 것이 이 율법의 목표입니다.

 

회막 뜰에서 커튼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성소가 있습니다. 이 성소로 들어가면, 왼쪽에 정금으로 만든 등잔대(정금 등대)가 있습니다. 안식일에도 이 정금 등대에는 불이 타오릅니다.

여러분! 광야 생활 중에 여호와의 구름이 멈출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멈추었습니다. 여호와의 구름이 이동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구름을 따라 이동했습니다(참고. 40:36-38). 그 구름 속에는 여호와의 영광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이 불만 바라보고 걸어갑니다. 그러면 광야 생활 중에도 길을 잃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19:105)

 

제단의 불이 대속의 은혜를 보여준다면, 정금 등대의 불은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보여줍니다.

 

이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입구, 즉 정면에는 향을 피우는 향단이 있습니다. 안식일에도 이 향단에는 향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향이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장의 중보 기도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141:2)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9)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10)”(1:9-10)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5: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3)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4)”(8:3-4)

 

안식일에 이스라엘 각 처소의 모든 불이 꺼집니다. 그러나 제단 위의 불은 활활 타오릅니다. 대속의 은혜입니다. 정금 등대의 불이 여전히 타오릅니다.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은혜입니다. 향단 위의 향이 여전히 타오릅니다. 기도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성막 뜰에는 제단이 있고, 성소에는 순금등대와 향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안쪽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곳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무엇인가를 밝히는 불이 없습니다. 지성소에는 광명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성소에는 광명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4:24)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12:29)

 

성막 제일 안쪽 방, 지성소에는 여호와 자신이 불이 되십니다. 그 바깥 방 성소에는 정금 등대의 불이 밝혀져 있고, 향단의 향이 피어오릅니다. 말씀과 기도입니다. 그리고 바깥 뜰에는 제단의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대속의 불입니다. 그리고 성막 전체를 여호와의 불 구름이 덮고 있습니다. 성막 전체가 활활 타는 불 텐트입니다. 안식일에는 성막 동서남북에 진 치고 있는 이스라엘 각 처소의 모든 불이 꺼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중심에 있는 여호와의 불은 안식일에도 활활 타오릅니다.

여러분! 낮에도 하늘에 별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는 하늘에 별이 있는 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시골 한적한 곳에 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수많은 별이 반짝입니다. 언제나 하늘에 있는데도 밤에만 보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안식일에 각 처소에 불을 끄는 순간, 그들은 오직 단 한 곳, 그들의 삶의 중심인 성막에는 여호와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어두움이 가득한 순간에도, 여호와의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온 세상을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안식일에 개인 처소에 불을 피우는 것을 금지하셨습니까? 불을 끄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안식일에는, 이 예배의 날에는 거룩한 성소에서 활활 타오르는 여호와의 불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의 불에만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의 날에는 제단 위에 타오르는 대속의 복음이 강조됩니다. 예배의 날에는 정금 등대의 일곱 등잔에 반짝이는 말씀이 강조됩니다. 예배의 날에는 향단의 향에 타오르는 기도가 강조됩니다. 더 나아가, 예배의 날에는 소멸하는 불이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에도 관심이나 집중이 금지됩니다. 이 거룩한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합니다.

 

16세기 개혁자 칼빈이 봉사하던 제네바에는 원래 귀족석이 따로 있었습니다. 행여나 예배 중에 귀족이 지각하여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면, 앉아 있던 모든 평민이 일어나 그 귀족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예배 중에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 시간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만 경의를 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만 모든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만이 찬송 받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인간이 가로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설교자에게 주시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강단에는 인간의 온갖 철학과 도덕윤리적인 설교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날에는 제단 위의 불이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짐승보다 고귀한 피를 흘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이 설교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때때로 설교자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자신의 의도를 하나님의 말씀에 투영하여 설교려는 충동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를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나팔로 사용하셔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설교를 듣는 회중에게도 엄중한 경고입니다. 예배 속에는 제단의 불이 타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이 있습니다. 사죄의 은혜가 있습니다. 예배 속에는 정금 등대의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말씀의 인도가 있습니다. 예배 속에는 향단의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기도와 응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배 가운데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 중에 임하십니다.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십니다. 예배 참석자 중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배의 날에는 이 외에 다른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예배에 참석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을 듣고 사죄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말씀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까? 기도의 응답을 받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 불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를 지성소 안까지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9)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20)”(10:19-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불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만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광야에서 나무를 줍고 있습니까? 다른 불을 피우려고? 다른 불을 바라보려고? 다른 불을 사모하려고?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2)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2-3)

 

하나님께서는 거짓으로 예배하는 자를 알고 계십니다. 예배 시간에 나무하는 자를 알고 계십니다. 다른 불을 피우는 자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심판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이 피워놓은 불을 끄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염려와 고난을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그리스도께 맡기십시오. 예배를 사모합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모합시다. 여호와의 불을 바라봅시다. 자신의 몸과 피로 휘장을 찢으신 그리스도를 따라 불이신 여호와를 만나러 들어갑시다. 그분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아멘!

 

 

 

<설교 이해를 위한 질문>

1. 구약의 율법에 대한 잘못된 두 가지 견해가 무엇입니까?

율법주의

()율법주의(율법 폐기론)

 

2. 다음의 편견 두 가지는 우리가 율법을 엉터리로 읽게 만듭니다.

율법은 문맥과 무관하다!

문자주의(literalism)

 

3.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까?(31:14-15) 그렇게 하지 않은 실례를 말해보십시오.

 

4. 성경은 안식일을 범하는 모든 사람을 죽이지 않고, 오직 단 한 가지 경우에만 죽입니다. 그 사건이 무엇입니까?

 

5. 사형 당한 사람은 안식일에 왜 나무를 모았을까요?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습니다.

 

6. 출애굽기 전체는 세 개의 큰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 어떤 내용입니까?

1-18

19-24

25-40

 

7. 출애굽기의 세 번째 단락 역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 어떤 내용입니까?

25-31

32-35:3

35:4-40

 

8. 안식일에 불이 켜져 있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성소

지성소

성막 전체

 

9. 예배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에만 집중해야 합니까? 또한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보여줘야 합니까?

 

10. 안식일에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왜 나무하는 것이 더 큰 죄가 됩니까?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11. 이 말씀이 나와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교제합시다.

 

12. 한 걸음 더: 사도행전 28장에는 나무를 모아서 불을 피웠으나 죽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죽지 않고 오히려 그를 물고 있던 독사()가 죽습니다. 그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추종자들로부터 (다른 불을 피우는) 이단자로 정죄 된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가 죽지 않은 것(28:3-5)과 사도행전의 결론(28:25-31)을 읽고, 누가 과연 이단자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사도행전이 왜 이런 내용으로 끝나는지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봅시다.

 

 

 

 

주님의 치료 15:22-26, 고후5:15-21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 존 헌튼은 분을 내는 자는 자살하는 사람이다. 분과 노는 남을 괴롭히기 전에 자기를 죽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박사가 어느 해부학회의에 참석했다가 다른 의사가 그를 비평하고 비난하자 그만 분을 참지 못하고 대항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죽고 말았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이런 실험을 하였습니다. 개를 묶어놓고 개를 4시간 동안 때리며 괴롭혔습니다. 개가 바짝 독이 올랐을 때 그 개의 피를 뽑아 조사해 보니 피 속에 시안이라는 독이 생겼는데 한 마리 개에서 나온 독은 무려 80마리의 개를 죽일 수 있는 치사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독이 오르면 개보다 독이 더 나옴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병들어 미움을 품게 되면 미움은 우리에게 큰 피해를 줍니다. 사람이 육신의 질병, 정신의 질병, 영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으면 그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고, 그 질병이 깊어지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질병을 우리의 치료자가 되시는 주님께 나와 치유함을 받게 될 때 영육 간에 강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승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의 치료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주님은 우리의 치료자이십니다.

구약 본문인 출애굽기 15장 전반부는 뒤쫓던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고 홍해를 가르고 건넜던 모세의 승리의 영광송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의 소리는 우렁찬 노래로 하나님의 행하신 능력을 찬양하고, 그 분의 위대하심을 마음껏 찬양함으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사라질 것 같지 않던 그 구원의 기쁨과 감격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광야 길에 들어서서 3일 동안 물을 만나지 못해 각자 가죽 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떠났던 물들이 차쯤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불평과 원망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3일 만에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최초로 장막을 치게 되었고, 그곳에서 웅덩이의 물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물은 사람이 마실 수 없는 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마라'라고 했는데, 그 뜻은 '쓰다. 괴롭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누구나 만나는 마라는 쓴물과 같아서 마시면 건강이 상하고 결국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질병이 있고, 실패가 있고, 좌절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죄악의 쓴물, 미움과 분노의 쓴물, 불안과 공포의 쓴물, 좌절과 절망의 쓴물, 미혹과 이단의 쓴물이 우리 삶의 노정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가 되지 않고 비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에게는 전능하신 치료자가 계십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주변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가 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라를 만났을 때 탄식을 하고 모세를 향하여 원망의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습니다. 모세를 향한 원망은 곧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마라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백성들은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모세는 긍정적인 신앙인의 모습으로 반응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불뱀의 독에서 건지시고, 불레셋을 물리치게 하시고, 실컷 메추라기 고기를 먹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한 나무를 물에 던지라고 하시자 나무를 들어 쓴 물에 집어던지니 쓴 물이 변하여 단 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나쁜 것이 좋게 되고 잘못된 것이 바로 됩니다.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부족한 것이 풍족하게 되고 연약한 것이 강해집니다.

쓴 물이 변하여 단 물이 되고 난 이후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26)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라파'입니다. 치료 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료 하십니다.시편 147:3"여호와께서 상심한 자를 고치시고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 도다."했습니다. 외롭게 싸우던 엘리야가 탈진해 있을 때 천사를 보내시어 어루만지며 상한 심령을 치료하시고, 떡과 물을 마시게 하여 새 힘을 내게 하시어 끝까지 사명을 마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오늘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병든 육체를 치료하십니다.9:35"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황폐한 영혼, 시든 영혼을 치료하십니다.4:2"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고 했습니다. 이처럼 치료자가 되시는 주님은 오늘 우리의 상한 심령, 병든 육체, 황폐한 영혼을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은 우리의 치료자 되심을 믿고 고침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치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모세가 부르짖으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그 나무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준비해 놓으신 십자가를 예표 하는 나무였습니다. 쓴물을 단물로 바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21:23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죄악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아 내가 받을 저주를 담당 하시게 하셨습니다. 구주 예수님은 가시관에 찔리셨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려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저주를 담당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정에 에돔 백성들이 길을 내주지 않게 되자 먼 길로 돌아가는 것을 원망 할 때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백성들이 모세에게 도움을 구하여 모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신 처방은 장대에 놋 뱀을 만들어 달라고 하시며 그것을 본 자는 살리라(21:8-9)고 했습니다. 여기 장대에 달린 놋 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예표 합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요3:14-15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하셨습니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자들은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고, 저주가 변하여 복이 되고, 심판과 멸망이 변하여 상급과 영생이 주어집니다.

신약 본문 고후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을 근본적으로 치료 하시는 분이 십니다. 포스코의 용광로는 각종 쓸모없는 고철들을 녹여서 새로운 철을 만듭니다. 용광로에 들어가기 전의 각종 고철들은 더 이상 쓸모없는 것들로 폐기된 것들입니다. 이것을 뜨거운 열로 녹여서 원래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모습으로 각종 제품의 원료로 쓰이게 됩니다. 새롭게 된다는 것은 원래의 모습과 전혀 다르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재판을 통해 형을 언도 받으면 교도소에 들어갑니다. 교도소라는 말의 뜻은 말 그대로 범죄자를 교도 즉, 교정·교화하여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시설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한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기보다 각종 범죄의 능숙한 수법에 익숙한 자들에 의해 범죄 전문 꾼으로 양성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들이 출소하게 되면 또 다시 범죄의 길에 들어서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중에는 한 때 사회를 경악하게 한 살인자들, 고재봉, 김대두, 김현양 같은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다가 거룩하고, 소망이 넘치는 모습으로, 평안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살기를 소망합니다.

 

3.주님의 근본적 치유가 임하면 삶이 새로워집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엄청난 축복이요, 큰 선물입니다. 주님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 신분을 갖게 하시고, 성품과 인격을 변화 시키고, 삶의 자세를 변화 시키십니다.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몇 가지 새로운 삶의 모습은,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삶이되어집니다.변화가 이루어지기 전 주님을 떠나 살았던 삶을 버리고, 주님과 교제를 힘쓰는 삶이되어집니다. 예배를 통해, 말씀을 읽고 묵상 하는 생활을 통해, 기도하는 생활, 선한 일에 힘쓰는 삶 등을 통해 주님과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그 교제가 깊어질수록 주님과 친밀해지고, 영성이 깊어지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주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모세는 주님과의 탁월한 교제를 나누었던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주께서 사람과 대면하시듯 모세와 대면하시고,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두 차례나 특별 대면하시어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을 받은 인물입니다. 모세를 통해 선민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시고, 가나안까지 인도하는 사명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를 깊이 나누면 나눌수록 영성이 깊어지고, 풍성하게 됩니다. 더욱 겸손해지고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주를 위해 사는 자가 됩니다.신약 본문 고후5: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새로운 삶을 위해 생명까지 주셨으니 이제는 생명주신 주님의 그 사랑에 보답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전에는 삶의 목표를 세상에 두고 살았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와 출세와 세상 연락이 삶의 목표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것들이 제일 좋은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에게는 눈이 열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영원한 은혜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그 세계를 바라보며 영원을 위해 준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자로 삽니다. 먹든 마시든 무엇을 하든지 주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됩니다.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감당하며 사는 자가 됩니다.본문 고후5:18-19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화목이라는 헬라어 카탈라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죄의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입은 성도 역시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으로 섬기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명자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18-20)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답게 주님과 교제를 힘쓰고, 주님을 위해 살고, 화목케 하는 자로 살기를 기원합니다.

정리^^.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의 치료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치료자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치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근본적 치유가 임하면 삶이 새로워집니다. 아멘.

명령(말씀)대로 행하였더라 (출애굽기 71-7)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여주시고,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에게 풍성한 복(평안, 건강, 재물....)을 내려주시고, 복 받은 자들이 믿음으로, 구원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말씀 하시고, 또 말씀 하시기를 계속 하십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고, 듣고 살아가는 무수한 말씀들이 구약에서는 명령이라는 단어로 자주 들려집니다. 조금 딱딱하게 보여도 말씀을 명령으로 듣고, 따를 수 있어야 신앙생활 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올바르게, 진실 되게, 그리고 곧게 나아가게 하는 잣대와도 같습니다.

 

신앙인이든, 비 신앙인이든 하나님의 말씀(명령)에 전부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명령들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무반응을 보이거나, 듣고도 따르지 않는 불순종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살펴보니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이 세 가지 이유 안에 다 포함 되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이유에 속하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1. 첫째, 명령을 내리시는 분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무신론자(Atheist)라고 합니다. 시편에서는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14:1;53:1)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스스로 똑똑 한 것 같아도 참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라는 책으로 유명한 옥스퍼드대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무신론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기 때문에, 명령이라는 것은 그저 비웃음거리밖에 안 됩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보여 줘라 그러면 믿겠다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만물 안에 계시고, 그렇게 말하는 무신론자의 주변에 항상 계시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니 참으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존재가 인정 되지 않으면 선이 끊어진 전화기를 붙들고 애타게 119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무신론자라고 외치는 사람만 무신론자가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전부 무신론자로 볼 수 있습니다.

 

2. 둘째, 명령을 내리시는 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관계, 그리고 대화가 한 번도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이른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 주변을 맴돌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 본적도 없고, 들으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가에 뿌려진 말씀처럼, 말씀이 선포 되어도 금방 마귀에게 빼앗겨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사야 112절에,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구약의 희생제물-,,염소 등)을 요구하였느냐?나의 뜰(마당)만 밟을 뿐이다!”(1:12, 표준새번역)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임무를 완수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 임어 담대히 보좌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뵙고, 만나고, 듣고, 들린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 사이클(cycle)이 반복 순환되지 않으면, 우리 곁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게 느껴지고, 명령도 들릴 턱이 없습니다. 인식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였거나, 성령을 소멸한 상태로 세상에 속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입니다.

 

3. 셋째, 명령을 내리시는 분의 음성을 외면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시간 뿐만 아니라, 말씀을 읽고 묵상 하고나 기도 할 때, 찬양 할 때 등과 같은 경건의 시간은 물론이고, 우리가 미처 느끼지 못하는 삶의 모든 일상(, 대화, 사건, 세상 풍경 등)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참 양심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 하고 계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들었다, 안 들었다, 몰랐다라는 핑계를 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장 지금 예배 시간에도 명령이 선포되고 있고, 각자의 심령에 면을 깊숙하게 꽃아 주고 계십니다. 똑 같이 다 들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듣고 행하고, 어떤 사람은 꿈쩍도 안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주여 주여만 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7:23)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1:22) 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 하나님의 명령이 이미 들렸고, 지금도 꾸준히 들리고 있고, 죽는 날까지 계속 들릴 것입니다. 알지만, 들리지만, 하기 싫어서, 기분 나빠서, 다른 일에 바빠서, 나중에 하려고....이런 불순종의 장벽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음성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회개하기를 중단 한 채, 나는 아주 잘하고 있다 라고 자기 자신에게 속임 당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는 3가지 이유 세 가지, 존재를 알지 못한다(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 인식하지 못한다(성령 없거나 성령 소멸) 음성을 듣고 따르지 않는다(회개하지 않는 외식적인 신앙인) 를 말씀 드렸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나는 어떤 상황 인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세 번째가 가장 위험합니다. 말씀이 들리는데도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배반하는 무서운 불순종입니다. 회개하고 순종으로 돌이키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00교회의 모든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데 최선을 다하셔서, 이 땅에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짓고, 평안과 번영을 누리며 사시다가, 하나님의 나라의 문에는 거뜬히 들어 갈 수 있는 복된 영광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들을 합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정말 쉽게 변하기 어려운 고집불통, 자기 의와 자아로 꽉 차 있습니다. 습관, 인성, 언행이 한 번 고착화 되면 새롭게 되기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괜찮은데 네가 문제야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대단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모두가 고침 받고 새롭게 받아야하는 아픈 환자 일 뿐입니다. 사람 스스로는 변화되어 가기 어렵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다듬어 가십니다. 말씀과 복음은 우리를 변화 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6, 7절을 읽어 드립니다. “6.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7.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아멘.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최고의 지도자들인데 명령하신 대로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당연할 것 같은 이 당연함이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전~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만나는 장면은 3장부터입니다.

 

3장에서 여호와의 산이라고 불리는 호렙(, 호레브, 다른 이름으로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첫 번째로 모세에게 명령하시기를,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3:10)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자 모세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3:10, 표준새번역) 모세는 지금 감히 만나보지 못할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있으면서도, “감히 바로에게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보다 오히려 바로를 더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도저히 명령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4장에서는, 모세가 명령대로 즉각 행동하지 못하자, 하나님은 모세가 가져온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고, 손에 문둥병이 나타났다 사라지게 하는 기적을 보여 주시면서, 가서 그들에게 이 기적을 보여주면 그들이 믿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모세가 이렇게 답변합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아멘. (4:10) 기적을 보고도 핑계를 대면서 명령대로 행하기를 주저 합니다. 믿음이 생성되지 않아서 아직까지 전혀 움직일 마음이 없습니다.

 

5장에서는, 어찌어찌 해서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가서 만나긴 했는데, 바로는 그들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볏짚도 안 주고 노역을 더 강하게 시킵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5: 22) 모세는 명령대로 아주 조금 움직이기는 했지만, 한 번의 걸림돌을 만나자 곧바로 하나님을 대놓고 원망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6장에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런 저런 말씀으로 확신을 심어 주시면서,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6:11)라고 다시 명령 하십니다. 그러자 모세의 답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6: 12) “보십시오, 저는 입이 둔하여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바로가 어찌 저의 말을 듣겠습니까?”(6:30) 참 이 정도면 일반 사람 같으면, “알았다, 관두러 관둬라고 포기해 버렸을 겁니다.

 

6장 까지만 보면, 모세는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건반사적으로 튕겨내는 듯한 무례한 말들을 마구 쏟아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장면이 오늘 본문 시작되기 전, 6장의 마지막 절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모세의 아주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명령을 따르는 것을 주저하고, 핑계대고, 불신하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한탄을 서슴없이 합니다. 그것도 대놓고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모세 뿐 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완악함이고, 숨겨진 죄 성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7장에 와서모세와 아론이 명령대로 행하였더라라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계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반전을 이룬 계기가 되는 말씀이 본문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아멘.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잘 따르는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 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첫 마디가 볼지어다라는 동사입니다. 이 단어(, 라아)는 구약에서 1208번이나 사용 되었는데, 가장 먼서 사용된 것은 세상을 창조 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1:4) 라고 하실 때, “보시기에라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담겨 있는 단어라는 것이 특별합니다. 이 외에도 많은 뜻이 있지만, “주의를 기울이다, 주목하다, 분별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단어를 사용하신 이유는, 지금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똑바로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으면서, 몇 번씩이나 말씀 하시는데도 집중해서 듣지 않고, 제대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선생님들이 정신봉으로 교탁을 탁탁 치시면서 주목, 주목하면서 선생님을 바라보게 만들죠. 부모님들이 아이들 훈계 할 때도 고개 똑바로 들고 엄마 눈 제대로 봐!”라고 말하죠. 하나님도 모세를 이와 같이 다루신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지 못하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불순종의 말을 계속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시선이 딴 곳으로 가 있습니다. 관심사가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 볼 겨를이 없으니 내 갈길 바쁘게 사는 겁니다.

 

여름에 선풍기를 틀었는데 회전 기능이 고장 나면 강제로 선풍기를 내 쪽으로 얼른 틀어 버립니다. 바람이 엉뚱한 곳으로 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선풍기는 잘 돌아가는데, 바람이 나에게 오지 않는다면, 더위 때문에 짜증만 더할 뿐입니다. 하나님과도 시선을 마주보고 들으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세상은 온통 짜증거리, 화날 거리만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시려면, 여러분이 지금 현재 제~일 관심을 가지고 하시는 일, 그 일을 뒤로 미뤄 놓고 그 관심을 두고 있는 일 앞에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시선을 맞추십시오. 이것이 명령을 따르는 처음 단계입니다.

 

너무 오래 다른 곳만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볼지어다!”라고 크게 말씀 하시면서 강제로 우리 얼굴을 돌리 실 수 있습니다. 강제로 돌리실 때는 많이 아픕니다. 스스로 빨리 돌리십시오.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한 번 따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겠습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겠습니다!” 아멘.

 

그 다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 하시기를 내가 너를 모세에게 신 같이 되게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로 엘로힘, 곧 하나님 같이 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를 진짜 신으로 만들겠다는 뜻이 아니라, 가짜 신 바로를 이기고도 남을 전능하시고, 유일 하신 참 신이신 하나님이 직접 모세와 동행하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데도, 동행하시는 하나님,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814만 분의 1이라는 로또 복권은 매 주 열심히 구입하면서, 100% 당첨 확률이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느 쪽이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97%가 손실을 본다는 불안함을 가지고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주식 공부에 열을 올리면서, 0.1%의 손실도 없이 평안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말씀공부에는 그렇게도 무관심 하다면, 어느 쪽이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는데도 돈, 돈 하면서 대박 부동산을 꿈꾸며 좋은 정보가 있다는 곳은 발이 부르트도록 쫓아다니면서도, 하나님이 천국 잔치를 여실 정도로 가장 기뻐하신다는 복음 전도와 구원 사역에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누가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우리는 전능 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실상은 전능 하신 하나님을 뒤로 재껴 놓고 살아갑니다. 말 그대로 전지, 다 아시는 분, 전능, 다 하실 수 있는 분에 투자하세요. 하나님이 이루시고, 채우시고,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상급까지 주신 다는데, 왜 엉뚱한 것에 힘을 낭비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옆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 하신 신이신 우리 아버지가 항상 나와 동행하심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에 발휘 되어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동행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질 때,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을 담대하게 이룰 수 있습니다. 또 따라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어 갈 때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붙여 주시고, 돈이 필요하면 재정을 넉넉하게 주시고, 환경이 필요하면 상황을 바꾸어 주십니다. 많은 간증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들어 보였을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습니다. 뭐가 필요한지 우리보다 더 세밀하게 점검하고 계십니다. “나는 입이 둔합니다. 뻣뻣합니다.” 모세가 입 만 열면 하나님 앞에 말합니다. 핑계성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모세가 말이 둔하기는 했나 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가장 약점을 형의 입을 통해 보완해 주셨습니다. 더 이상 핑계를 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 약점이 있고 부족함이 있습니다. 배움도 부족할 수 있고, 재정도 궁핍 할 수도 있고, 만나는 사람의 인력 풀(人力pool)도 미미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고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보다는,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상황 보다 크신 하나님, 사람보다, 돈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우리에게 꼭 맞는 아론과 같은 대언자를 보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따라하겠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다 채워 주십니다!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아멘.

 

모세와 아론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렸더니, 전능자 하나님을 동행하여 주셨더니, 문제와 상황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필요를 긍급하여 주셨더니, “명령대로 행하였더라라는 믿음의 사람으로, 위대한 성경 역사의 지도자로 새롭게 변화 되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새롭게 되었다면 우리도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명령대로 행하는 순종의 사람으로 바꾸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는, 앞으로 남은 인생이 불순종과 거부, 거절의 시간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과 감사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명령대로 행하였더라”, 내 자신이 명령대로 행하였더라”, 우리 가족이 명령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이루어 드리며, 천국 가는 그 길이 기쁘고 행복한 순종의 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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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말씀 하시는 분이시고, 저희들은 듣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오니, 주님 말씀하시면 나아가고, 말씀 하시면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죽기 까지 순종으로 모범을 보여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감사하는 자는 출34:23-24, 6:4-13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언제나 예쁘게 무릎을 꿇고 또 두 손을 깍지 끼고 경건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늘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밤에 우리 가족 모두를 지켜 주셔서 잠 잘 자게 해 주세요. 우리 아빠 하시는 사업도 잘 되게 해 주시고, 우리 가족들의 건강도 지켜 주세요.”

 

그런 다음에는 꼭 그 날 유치원에서 배운 율동과 노래를 멋있게 한 번 하고는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이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겨 그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기도가 다 끝났으면 잠자리에 들어야지, 왜 자기 전에 꼭 그렇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느냐?”

 

아이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내 부탁만 드려서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그래서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와 율동으로 하나님을 잠시라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우리는 가끔 하나님께 이것도 해 주시고 저것도 해 주시고라며 무척이나 졸라대면서 많은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막상 생각해보면 우리가 받은 것들이 너무 많은데 감사할 줄도 모르고 감사에 인색한 모습으로 살 때가 많습니다. 이 어린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처럼 감사하는 자로 살아야겠습니다.

 

맥추감사절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감사하는 자는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감사하는 자는,

 

1.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그 절기는 안식일,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나팔절, 속제일, 장막절 등 7대절기입니다. 그 중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한 번씩 반드시 지켜야 할 3대 절기가 있는데 그것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입니다. 이 절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 성도라면 그 의미를 바로 깨닫고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 공로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속죄의 피 공로를 믿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각인 시켜 주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절기를 통해 죄에서 해방이 되고, 사망을 넘어 참 생명 얻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절기이기에 성도라면 유월절의 의미를 마음에 새겨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때문에 내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다음은 오순절인데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맥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오순절은 구약에서 보리의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이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시므로 신약시대에 와서 성령강림절로 불리어졌습니다. 성도가 성령 충만 하면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열매를 맺는 자가 되고, 주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는 자, 감사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다음은 장막절인데 이 절기는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잘 지내고 농사를 지어 결실을 맺어 가을에 추수한 것을 저장하고 지키는 절기라 하여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구약 성도들은 7일 동안 초막에 거하며 조상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에서 장막 생활한 것을 기념하면서 이 절기를 지켰습니다. 광야에서 농사 짖지 않았어도 양식을 공급하신 하나님 은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약속하고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신 은혜, 가나안에서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이게 하신 은혜 등을 기억하며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성도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도우시는 은혜, 장차 들어갈 영원한 나라의 소망을 주신 은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절기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핵심적인 은혜를 바로 깨닫고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모세를 통해 절기를 지키라 명하신 것입니다. 살전 5: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요,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형을 3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형은 은혜를 알고도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둘째형은 은혜를 알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셋째형은 은혜를 받고 감사할 줄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영국의 성서학자인 메튜 헨리는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감사하는 것을 날마다 더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마이너스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깁니다.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우리 모두 감사를 넘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자입니다.

 

우리의 삶을 광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조금 전에 초막절을 지킬 때 7일 간 초막에 거하면서 과거 선조들의 광야생활을 몸소 체험하는 기간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하면서 수많은 은혜 체험을 했습니다. 신약 본문에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빈들 곧 광야에서 행하신 일입니다.

 

광야는 사람이 지내기에 좋은 환경이 절대로 아닙니다. 길은 불편하고, 뜨거운 햇빛이 있고, 밤에는 추위가 있고, 모래 바람이 있고, 뱀과 독충과 맹수가 있는 곳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잠잘 곳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거의 공급되지 않는 곳이 광야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삶의 여유가 생기고 과학이 발전하여 편리한 생활을 한다 해도 생각지 못하는 어려움을 만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납니다. 수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곳이요, 질병이 있고, 유혹이 있고, 실패가 있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많은 갈등이 있는 곳입니다. 광야가 위험한 곳이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위험한 것 천지입니다. 외형으로 볼 땐 21세기 과학의 시대이지만 내면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중독의 위험, 고독의 위험, 갈등의 위험, 우울증과 자살 충동의 위험, 파산의 위험, 질병의 위험 등 위험천만한 광야 그대로인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감사하고 살기보다 근심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기가 더 쉬운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자들입니다. 불평, 원망은 불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신앙인 중에도 내면에 불신앙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는 자가 되고,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노하시고 징벌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자들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그 어려움을 감당 할 수 있게 하시고, 어려움을 이길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됩니다. 어려움을 통해 연단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고 감사하는 자가 됩니다. 찰스 코우만 여사는 애벌레가 나방이 되는 것을 1년 동안 관찰한 뒤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맨 처음 번데기에서 나방이 나오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을 때, 저는 작은 구멍으로 안간힘을 쓰면서 나오려고 하는 나방이 너무나 불쌍해서 가위로 구멍을 넓혀 주었습니다. 그러나 큰 구멍으로 쉽게 빠져 나온 나방은 방구석을 기어 다닐 뿐 가엾게도 날지를 못했습니다.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쉽게 번데기에서 나온 탓이었습니다.”

 

번데기에게 있어서 고난은 나방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는데 그걸 건너뛰게 했더니 오히려 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고난이 이와 같습니다. 고난은 분명 힘든 것이고 벗어나고 싶은 것이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그 고난이 하나님 앞에서 더욱 성숙하게 하고, 온전함을 이루어 주님 앞에 합당한 자로 세우는 역할을 하게 함을 믿기에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뿌리를 내려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풍성한 은혜를 입는 자가 됩니다.

 

신약 본문에 보면 굶주려 있는 무리들을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한 소년이 가져온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많은 무리를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조각이 12 바구니에 차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 사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작은 것이지만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왜 감사하지 못하는가? 현실 속에 없는 것 보면서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감사보다 불평을 하게 됩니다. 빌립은 이곳에서 이 무리들을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며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빌립은 이미 기적을 본 사람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무수히 많은 각종 병자들이 낫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빌립은 예수님을 잘 몰랐습니다. 빌립은 계산력이 빨라 200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아직 신앙이 성숙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주님께 드릴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안드레는 한 소년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내어 놓으며 이 작은 것으로 이 많은 무리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겠느냐는 투로 말합니다. 불신앙의 사람이나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작은 것을 보면서 안 될 것, 실패할 것을 내다보며, 큰 것과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나의 작은 것을 보고 감사하지 못하고 낙심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래 이 작은 것으로는 이 많은 무리를 먹인 다는 게 어립도 없겠지하시며 맞장구치지 않으시고, 이 작은 것을 놓고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나눌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 무리들을 줄을 지어 앉게 한 다음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이 처음 것보다 훨씬 더 많은 12 바구니에 차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나누지 못하는 것은 내게 가진 것이 없거나 적다는 생각 때문이요,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절기를 지키라 명령하시고 지키는 자에게 약속을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약속은,

 

*승리하는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34:24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열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그 땅에 정착하여 살고 큰 힘을 가지고 살고 있던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의 후손과 같은 키가 크고 거대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원주님들과 싸워 승리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며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번성하고 번영하는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출34:24네 지경을 넓히리니감사의 절기를 잘 지키는 자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의 지경을 넓혀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지경은 바로 우리 성도들이 하고 있는 손길을 의미합니다. 학문을 하든,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교육을 하든, 기업을 운영하든, 어떤 일을 하든, 우리가 하는 손길이 번성하고 번영하도록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보호와 안전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34:24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의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년에 세 번씩 각처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들이 집을 비어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안전하도록 지켜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우리 모두 감사하는 자로 살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풍성한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맥추감사절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감사하는 자는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풍성한 은혜를 입는 자가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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