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참고 기다리라. 23:8-14, 5:7-11

'너무나 먼 다리', '가장 길었던 날'의 저자 코넬리우스 라이언(Cornelius Ryan) 5년 동안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은 후에 투병기를 부인이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은 '가장 긴 밤'입니다.

부인은 남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침마다 일어나면 똑같은 기도를 소리 내어 반복하였다. '하나님 또 하루 좋은 날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무엇이 그토록 좋은 날이냐고 물었다. 남편은 암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남은 날이 멀지 않음을 자각하고 있었을 터인데 어떻게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 남편은 평소에 생각해 두었던 것처럼 새날을 맞이하는 기쁨을 다섯 가지로 거침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하루가 좋은 이유는 '첫째 아내를 또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둘째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셋째 병들어 눕기 전에 마지막 작품 '가장 길었던 날'을 탈고할 수 있기 때문이고, 넷째 병과 싸울 의지와 힘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며, 다섯째 주님이 언제나 바로 앞 가까이에 계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상황에서도 절망치 않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길이 참고 기다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인내는 모든 성도들의 귀한 덕목입니다.

시험이나 환난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다가옵니다. 사단은 잘 믿는 자라고 시험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시험으로 다가와 할 수만 있으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넘어지게 하려고 시험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칭찬 하시는 욥이 당한 시험입니다. 또 화재나 수해나 지진이나 교통사고 같은 일들이 그리스도인 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시험이나 환난을 만날 때 잘 대처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십니다. 그 중 하나가 인내입니다. 신약 본문 약5:7-8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했습니다. 무쇠가 강철이 되기 위해서 용광로에 수없이 드나드는 경험이 있어야 하듯이, 환란 중에 있는 사람 역시 그 환란을 통해서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하게 되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어 인격과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욥은 환난을 통해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겸손히 회개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었고, 정금같이 되었으며,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더욱 성숙한 신앙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입니다.(5) 고전13장에 사랑의 15가지 덕목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4),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딘다(7), 인내와 관련된 사항을 3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시험과 환난을 만날 때 그 환난 배후에 숨겨진 주님의 은총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도가 된다면 환난 중에도 인내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는데, 여기 여러 가지 시험의 원어의 뜻은 여러 가지 색깔의 시험이라는 의미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색깔이 다양할수록 깊이 있고, 세미하고, 다채롭게 표현하여 좋은 그림이 되듯이, 성도가 환란을 만나게 되면 다양한 색깔을 갖추게 되어 더욱 아름답고,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삶이 되게 합니다.

또한 시험을 대처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을 믿을 때 오히려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고전10: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기대하던 소망의 창이 닫히면 또 다른 창을 열어 주십니다. 때로는 기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도우시기도 하십니다. 경상북도 영주 중고등학교 교장과 이사장을 지냈던 강경훈 장로의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일제 말엽에 끌려가 한 달여 간 채석장에서 폭파작업을 했습니다. 오전에는 바위에 구멍을 뚫고 폭약을 넣어 폭파 작업한 후 점심을 먹고 오후에 돌들을 옮기는 중노동을 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오전에 폭파까지 마친 후 폭파된 돌덩이 위에 앉아 가져온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하는데, 그는 신앙의 사람이었기에 도시락을 앞에 두고 식사기도를 하는 중 어디서 왔는지 개 한 마리가 나타나 그의 도시락을 물고 저만치 달아나 버렸습니다. '강형! 기도 시간에 개가 점심 물고 가요!' 옆 사람이 소리를 칩니다. 눈을 떠보니까 여기저기서 이 광경을 본 인부들이 킥킥 소리 내서 웃으며 한 마디씩 비아냥거렸습니다. '하나님이 도시락을 못 지켜 주시나' '개 팔자가 상팔자야' '배고픈데 기도는 무슨 기도야! 밥부터 먹어야지'

강경훈은 급히 일어나 도시락을 물고 가는 개를 쫓아가는데, 개는 뒤를 힐끗 힐끗 돌아다보며 마치 그를 놀리는 것처럼 그가 빨리 따라가면 더 빨리 가고, 좀 천천히 쫓아가면 천천히 가면서 은근히 약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개를 따라 한 참을 달려갔을 때 등 뒤에서 폭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돌아보니 자기가 일했던 채석장에서 나온 소리였습니다. 채석장 돌덩이 위에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던 동료들이 큰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순간 강경훈은 개가 물고 가던 도시락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도시락을 물고 달아나는 개를 보고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그 개 때문에 생명을 건질 수 있었음을 기억하고 그 때를 생각하며 죽을 사람을 살려 주신 주님 은혜를 늘 감사하는 신앙의 사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신앙의 귀한 덕목인 인내를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어떤 경우이든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을 때 인내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믿음생활 하면서 뜻하지 않은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회의가 생기고 믿음이 흔들리게 될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의심치 않고 끝까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실 뿐 아니라, 언제나 선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증거 합니다.  100:5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하였고,  119:68에 보니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신실하심을 믿는 자는 아무리 큰 시험과 환난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가집니다. 욥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불 시험을 당하면서도 본문 욥23:10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불 시험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욥은 부르짖으나 응답을 받지 못함과 계속되는 시련에 대해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찌라도 신원함이 없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19:7-)했고, 그는 이어서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19:25-26)고 말합니다. 욥은 자기가 죽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죽은 후에 하나님을 뵐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욥은 부활 신앙과 영생을 믿는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이 귀합니다.  29:11-13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했습니다.

욥이 그러한 신앙으로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한 동안 묵묵부답으로 잠잠히 계셨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시고 폭풍 가운데로서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욥기 38장부터 42장까지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욥이 당한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인간의 머리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 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누가 비와 이슬과 서리를 내리게 했느냐,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나님의 질문에 욥은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을 알고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40:4)했고,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 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6) 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무슨 일을 당하든지 욥처럼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는 성도가 됩시다.

3.인내 하는 자가 마침내 믿음의 승리자가 되고 복을 받습니다.

신약 본문 약5:10-11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했습니다. 7절에서는 농부의 인내에 대해 언급하면서 길이 참으라.’고 했는데 그것은 믿음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앙을 마지막 순간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욥의 인내와 그 결말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서 인내함으로 사단의 참소가 거짓되었음을 증거 했고, 그가 고난 중에서 철저히 회개하므로 하나님께서 욥의 고난당함을 허락하신 목적이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욥에게 이전으로 회복시킬 뿐 아니라 더욱 큰 복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42:7-17). 하나님께서는 세 친구의 잘못을 책망 하시고, 욥에게 그들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고 중보하게 하심으로 욥의 권위를 세워주셨습니다. 욥은 불 시험을 인내로 이기므로 믿음의 사표가 되었고, 마침내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려면 강하고 담대함을 가지고 인내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표가 되는 인물들을 보면 인내의 믿음을 가진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오랜 기간 인내하면서 방주를 예비하여 그와 가족이 홍수 심판 중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름 받았고 아들을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25년 동안 인내하여 기다리게 하셨다가 그가 100세가 되었을 때에서야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야곱도 20년 동안 외삼촌의 집에서 일하며 고생을 하며 인내와 연단의 세월을 보냈고,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12지파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13년 동안 종으로 지냈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인내하는 중에, 30세에 바로의 총리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애급에서 학문과 군사 훈련을 받은 유능한 자요, 바로왕의 권세를 배경으로 가진 권세 자였지만 자기 동족을 돕는 일에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세를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간, 인내하며 연단을 받게 해서 애급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히브리 백성들을 이끌고 노예에서 해방시키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광야는 덥고,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맹수, 뱀과 전갈 등 위험한 일들이 많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연단을 받았기에 거인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명장이 되고, 온 백성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 선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도 인내의 믿음으로 죽음 앞에서 면류관을 받게 될 소망으로 충만했습니다.

인내 하는 자가 약속하신 것을 받게 됨에 대해 히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했고, 또 딤후2:11-12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했습니다. 우리 모두 인내함으로 믿음의 승리자가 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

두 본문을 중심으로 길이 참고 기다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인내는 모든 성도들의 귀한 덕목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을 때 인내할 수 있습니다.

.인내 하는 자가 마침내 믿음의 승리자가 되고 복을 받습니다. 아멘.

<2023. 08. 23. 호현낙선>

보배로운 믿음 욥23:6-14, 5:1-10

 

어느 목사님이 필리핀 마닐라 교회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한 후 할아버지 한 분을 소개 받았습니다. 그는 기적의 사람으로 온 필리핀을 놀라게 한 화제의 사람이었습니다. 일본이 필리핀을 지배할 때에 일본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동굴에 넣고 시멘트로 막아 버렸습니다, 산 사람을 생매장한 것입니다.

 

일본이 패하여 도망친 후 시체를 찾아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멘트벽을 헐었습니다. 70일이 경과한 후라서 다 죽고 할아버지 한 분이 살아 있었습니다. 7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살아 있었던 그 할아버지는 필리핀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그와 식사를 하면서 살아남게 된 비결을 물었을 때, 할아버지는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살았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쌓임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을 믿으며 살았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따르게 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보배로운 믿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보배로운 믿음은,

 

1.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구약 본문의 주인공인 욥은 사단의 시험으로 말로 할 수 없는 엄청난 고난을 당한 인물입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물과 종들을 잃었습니다. 집이 무너져 열 명의 자녀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악창'(惡瘡)이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나 쓰레기더미에 앉아 기와 조각으로 가려운 몸을 긁어야 했고, 환처에는 고름이 나오고 구대기가 붙어 밤에 잠을 자려 해도 고통 때문에 뒤척이며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진 고통이 임할 때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하지요, 위로한다고 온 친구들 역시 인과응보의 논리로 욥을 죄인으로 정죄했습니다. 욥은 한꺼번에 재물, 자녀, 건강, 가정, 친구, 이웃, 지위를 잃은 것입니다. 그는 그 고통들이 너무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한 적이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답을 듣고자 했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의 호소를 들어줄 것이고 자기의 옳음을 판단해 주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본문 욥23:8~9"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라고 탄식 했습니다. 욥은 너무 안타깝고 답답한 중에서도 하나님을 신뢰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10)고 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여전히 자기와 동행하시고 자기의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욥은 자기가 만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고난과 고통을 주신 이유와 목적이 자기를 단련하여 순전하게 하여 정금 같이 나오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불순물이 석인 금광석이 제련소에서 수천도의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가 녹아지고 수십 번의 과정을 거쳐 불순물을 걸러 낸 후에 귀한 금이 탄생합니다. 도자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김범진씨의 "1250°C 최고의 나를 만나라"는 책에 보면 도자기가 아닌 일반적인 질그릇을 구울 때는 가마의 온도가 800°C인데 고려청자와 같은 최고의 도자기를 구울 때는 가마의 온도가 1,250°C 이상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뜨거워지면 흙의 밀도가 놀랄 만큼 단단해지고 흙 속에 있던 유리질들이 녹아 밖으로 흘러나오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최고의 작품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은 고난을 통해 죄가 그쳐지고 인격이 만들어지고 신앙이 성장하고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고 영광된 존재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서신서 본문을 기록한 바울은 롬5:3-4에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벧전1:6-7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5:11"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삽시다.

 

2.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신약 본문 갈5: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서 역사 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 할례를 받아야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선생들의 꾐에 빠져 할례를 받은 일에 대하여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절에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고 말하므로 할례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효력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 일이나 의롭다 함을 얻는 일에 할례를 받고, 안 받고는 아무런 효력을 줄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율법에서 자유 함을 받은 자가 율법의 종으로 전락하는 일이며, 다시 율법의 멍에를 메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화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화답하는 최고의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믿음의 통로를 통해 온갖 은혜와 은총을 받게 되는데 그 은혜와 은총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구원을 비롯한 온갖 은혜와 은총이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욥을 참소한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 많아서 그런 것이지 그것들을 거두어 가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욥의 믿음을 칭찬하신 하나님은 욥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호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허락 하에 욥이 받은 물질의 복, 자녀의 복, 명예의 복, 건강의 복 등 다 잃게 되었지만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욥의 믿음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사단의 참소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졌다면 모든 것을 잃는 시련 중에서 그의 믿음은 깨어지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도가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나 주님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 역시 사랑에 근거해야 그 일들이 가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이후 크게 낙심하여 다시 어부의 일로 돌아 간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면서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당부 하셨습니다. 나를 사랑 하셔서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주님의 사랑에 화답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게 되면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할 수도 있고, 주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도 내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사랑의 소중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사도 요한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4:12)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형식적이 믿음이 되기 쉽고, 사랑이 없는 믿음은 이기적인 믿음이 되고, 사랑이 없는 믿음에는 열정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으로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주님께 소망을 두고 계속해서 성화를 이루어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서부터입니다. 이때부터 영적 어린아이가 되어 자라가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돌봄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처럼 육체적으로 장성한 사람이라도 영적으로 갓 태어난 아이는 성숙한 신앙인의 돌봄을 받으면서 영적으로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이 자라게 되면 다른 사람을 믿음 안에서 자라도록 도와주고 주님을 본받아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안에서 복을 받고 형통하게 되기를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잘 못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변에 어려운 이웃을 많이 도울 수도 있습니다. 또 그렇게 살아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주님을 닮아가는 성숙한 신앙의 사람들은 본받을 만한 존귀한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성화를 이루어가려고 할 때 좋은 환경에서 보다 고난과 시련이 따르는 열악한 환경이 훨씬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 좋은 환경은 신앙을 게으르게 하고, 하나님 보다 세상을 기웃거리게 만들고, 부패하게 만들지만 시련과 역경은 내 안에 있는 불순물들을 제거하게 만들고, 깨어 경성하게 만들고, 죄를 버리고 더욱 성결한 모습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욥의 경우에서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신앙이 아니면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불 시험을 통과 하면서 그의 신앙은 시련 당하기 전보다 훨씬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음을 그의 신앙 고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42:5-6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시련을 통과 하면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뵙게 되는 확고한 믿음의 사람,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칭찬 받을 정도였기에 스스로 자기 의에 빠질 만도 한 자였으나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게 질문한 것을 깨닫고 그 말들을 다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한다고 겸손한 모습으로 자복했습니다.

 

바울은 고후12:7-10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1942118일 미국 역사상 최대의 화재가 보스턴 나이트클럽에서 발생하여 무려 493명이 타죽고 200여명이 불 속에서 구출되었습니다. 당시 병원에서 근무하였던 린드만 박사는 정신건강 연구소에서 불 속에서 구출된 100명을 면담하여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죽을 번한 위기에서 살아난 이들의 85%가 오히려 그것이 건설적인 체험이 되어 새 출발을 하거나 신앙으로 돌아오거나 부부관계가 좋아지거나 나쁜 습관을 고치는 등 좋은 열매를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어떠한 상황을 만나든지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오직 소망을 주님께 두고 계속해서 성화를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보배로운 믿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주님께 소망을 두고 계속해서 성화를 이루어가는 믿음입니다. 아멘.

한결같은 믿음의 사람     욥1:6-12,

 

체스트론이라는 사람이 욥기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일이야드는 모든 삶이 전쟁으로서 유명하고, 오딧세이는 모든 삶이 유행이어서 유명하고, 욥기서의 삶은 모든 삶이 수수께끼라서 유명하다." 욥기를 읽어보면 수수께끼가 많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질문을 받고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로는 도저히 답변할 수 없는 수수께끼들을 만나게 됩니다.

 

욥은 이 수수께끼 앞에서 자신의 무지 함과 부족함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욥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 중 하나가 바로 까닭 없이 다가오는 고난입니다.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만한 믿음의 의인이요,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혹독하게 다가오는 시련 앞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매를 맞는 까닭을 몰랐습니다. 매를 맞아도 왜 맞는지 알고 맞으면 그 매를 좀 더 쉽게 견딜 수 있는데, 욥의 경우는 이유 없이 까닭 없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욥은 까닭 없이 재산을 잃었고, 까닭 없이 자녀들이 죽었으며, 까닭 없이 병이 들었습니다. 고난당하는 그를 위로한다고 찾아온 세 친구의 말은 위로는커녕 그의 염장을 지르는 그들의 말로 인해 더 상처만 받았습니다.

 

우리는 까닭 없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는 이 욥의 수수께끼를 바라보면서 이것은 욥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 가운데도 이런 수수께끼를 우리가 풀지 않으면 안 될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됩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는 몇 가지 수수께끼를 두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할까?"하고 의심하는 마음들이 우리 속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 두 본문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왜 이런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생기고, 또 그런 일을 만날 때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를 생각 하면서 한결 같은 믿음의 사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사단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성도의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구약 본문 욥1:7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은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에게 허락된 그의 활동 장소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그의 공격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으며, 그의 공격을 피할 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두루 돌아다녔다는 말은, 그의 적극적인 활동성을 말하는데, 땅 여기, 저기를 자세히 탐색하고 뒤졌다는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단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벧전 5:8). 그러니 사단의 공격을 어는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본문 욥1:8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하시며 사단에게 욥을 칭찬하셨습니다. 욥을 내 종”, “내 사랑하는 자라고 하면서 아주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성품에 대하여 깊이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성도들을 깊이 관찰하시는 일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칭찬하기를 그와 같은 자가이 세상에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욥은 경건함과 신실함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선한 사람들의 길과 행위에 매우 깊은 관심을 기울이시고 그것들을 지켜보십니다. 내 종 욥이라고 하신 것도 욥에 대한 하나님의 친밀하심과 특별한 관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단은 욥에 대한 칭찬을 들은 후 이렇게 말합니다. 1:9-10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오리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사단은 욥을 시기하여 참소했습니다. 사단은 욥의 경건함의 근거와 실체성에 대하여 도전을 제기했습니다. ‘어찌 까닭 없이연고 없이’, ‘그 자신의 이익에 관계없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칭찬하는 욥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베풀었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의 경건함은 단순히 어떤 보상을 바라는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이처럼 욥을 참소한 사단은 욥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온갖 시련을 겪게 하여 욥을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사단은 욥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신앙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사탄, 혹은 사단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마를 말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가 관사 없이 쓰일 때는 일반적으로 적대자’, ‘대적’, ‘원수등을 의미하였습니다. (삼상 29:4; 삼하 19:22; 왕상 11:14; 38:20). 후에 대개는 관사가 붙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 마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 사단은 여러 별명들을 갖고 있습니다. ‘귀신의 왕’(9:34), ‘시험하는 자’(4:3), ‘바알세불’(12:24, 27), ‘원수’(13:39), ‘악한 자’(13:19), ‘벨리알’(고후 6:15), ‘대적자’(벧전 5:8), ‘속이는 자’(12:9), ‘큰 용’(12:3), ‘거짓의 아비’(8:44), ‘살인자’(8:44), ‘죄를 짓는 자’(요일 3:8), ‘무저갱의 사자, 아볼루온’(9:11), ‘옛 뱀’(12:9),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27:1),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 권세 잡은 자’(2:2),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2:14), ‘이 세상 임금’(12:31),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6:12) 등입니다. 이런 별명들은 사탄의 성품과 활동상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단의 공격을 받은 욥이 재물과 자식들을 잃은 후 욥1:20-22에서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사단의 시험으로 고난이 올 때 욥처럼 좌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성도는 시험이 올 때 믿음을 지켜 한결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욥은 사단의 시험으로 오는 불 시험 중에도 그의 믿음이 무너지지 아니하고 한결 같은 믿음을 유지했습니다. 나아가 더 성숙하고, 더 성결하고, 더 확고하고, 더 겸손해 지고, 더욱 더 연단된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신약 본문 히13:8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했습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젊음도 변하고, 인심도 변하고, 생활 패턴도 변하고, 유행도 변하고, 권세도 변하고, 강산도 변합니다. 이런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 하나님 이십니다.

 

변화무쌍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의 신앙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변함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무슨 일을 만나도 변질되지 않는 한결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비천할 때나 존귀할 때나 믿음이 변치 않아야 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1-13)라고 사도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비천할 때는 신앙생활 잘하다 존귀하게 되어 지면 사울 왕처럼 하나님을 등한히 하고, 세상으로 빠지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반대로 하기도 합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은 비천할 때나 존귀에 처할 때 변함없이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가장 사랑합니다.

 

*환난 때나 복될 때나 변치 않아야 합니다. 욥의 신앙도 그랬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도 열일곱 어린 나이에 이복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 온갖 고초를 다 겪었습니다. 그는 노예로 일함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은 그를 높여 애굽의 총리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 하고, 하나님만 높이는 변함없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기근에서 구하는 자가되었습니다.

 

다윗도 죽음의 시련을 만나는 환란의 때나, 모든 백성의 존경을 받는 왕이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한결같은 신앙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가난할 때와 부할 때의 믿음이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형편에 따라 신앙이 흔들리고 변질되어 쓸모없는 신앙인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런 인간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아굴은 잠30:8-9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이 기도는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일이 없길 사모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의 사람이라면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물질 때문에 교만해 지거나 세상으로 흘러가 형식적 신앙으로, 부패한 신앙으로 변질되지 않아야 합니다.

 

*병들었을 때와 건강할 때의 신앙이 동일해야 합니다. 17장에 나병환자 열 명이 지나가시는 예수님 앞에 긍휼히 여겨달라고 외쳤습니다. 불쌍히 보신 예수님께서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후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사례한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아홉은 어디 있느냐하시며 서운해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건강해지니 달라지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신앙이어서는 안 됩니다. 혹은 반대로 건강할 때에는 하나님을 섬기고 병들면 하나님을 외면하고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실한 신앙의 사람은 건강할 때보다 병들었을 때 더욱 주님께 매달려 그 신앙이 더 깊어지기도 하고,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도 하고, 더욱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깊은 신앙을 가지게 되어 더욱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어제나 오늘이나 변치 않고 동일하신 예수님처럼 어떤 형편에서든지 믿음을 지켜 변함없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결 같은 믿음으로 끝까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욥은 불같은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이 변함이 없었습니다. 23:10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의 믿음의 고백대로 때가 되니 모든 것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42:10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본문 히13:7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 살면서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공평에 대해 우리는 많은 의문이 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반적인 은혜, 자연환경과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시고 편애가 없으시지만 구원의 은총과 믿음에 대한 보상 및 불신앙에 대한 보응은 반드시 구별하십시다. 믿음의 보상은 반드시 보상의 자질을 갖춘 자에게 주신다는 것이 공평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불공평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력을 부리는 사람들은 더욱 기세가 등등하며, 고통당하는 사람은 그 고통을 호소할 데조차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불공평함이 사라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고통을 주는 자에게 고통으로 되갚으시고 고통당하는 사람에게는 그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주님께서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 신실하신 주님의 공평을 확실히 보게 될 그 때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3~9)”

 

성도는 이 세상에서 고난과 박해와 시험을 만나도 공평하신 주님의 심판을 믿으며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인내 하면서 한결같은 믿음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내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미국의 '미키 톰슨'이라는 회사는 한때 빠른 경기용 차를 만드는 회사로 유명했습니다. 소문 그대로 미키 톰슨에서 만든 차는 월등히 빨랐습니다. 경기 초반에는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무서운 속도로 선두를 달렸지만 미키 톰슨에서 만든 차를 타고 우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경기 도중에 모두 고장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는 '용두사미'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신앙생활도 용두사미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열심 있는 신앙인이었다가 이런 저런 핑계와 변명을 남기고 신앙인의 대열에서 탈락하여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 이단으로 빠지는 사람, 상한 음식처럼 병든 신앙으로 변질이 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사업에 실패 할 수도, 가정이 깨어질 수도,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지만 신앙생활은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달려야 할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경주입니다. 신앙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면 모든 소망이 없어지게 됩니다. 영원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한결같은 믿음으로 끝까지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한결 같은 믿음의 사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사단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성도의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성도는 시험이 올 때 믿음을 지켜 한결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결 같은 믿음으로 끝까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1-6)

 

욥기에는 세 가지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첫째는, 욥의 친구인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말하기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라고 말한 구절입니다. 둘째는, 욥의 또 다른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욥이 말한 답변으로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고 말한 구절입니다. 셋째는, 욥이 하나님에게 고백하는 오늘본문 말씀 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구절입니다. 5절은 잘 암송하시기 바랍니다.

 

욥기는 고난과 고통,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생사회복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한계에 부딪칠 때 백날 지지고 볶아 봐야 아무 쓸모없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욥기에서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라는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와 욥이 겪고 있는 엄청난 고난이 왜 일어났는지 계속해서 논쟁을 벌입니다. 나중에는 엘리후라는 젊은 사람이 나타나 논쟁에 가세합니다. 치열한 논쟁에도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지지고 볶기만 했을 뿐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등장하시면서 논쟁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결론은,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 고난, 시험, 그리고 회복의 모든 과정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단편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자유로운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짧은 소견, 즉 지지고 볶는 무지한 생각으로는 시험과 고난을 결코 이해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완전하게 인정하고 사랑 안에서 회복 되게 하심을 바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일시적이나 회복과 평안은 오래 가고, 죄의 징계는 아프고 참기 어려우나, 용서와 사랑은 영원토록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힘들면 아이고 죽겠네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나 아무것도 안할 거야, 하나님도, 교회도 다 싫어라고 조석변개의 마음으로는 믿음을 지켜가기 어렵습니다. 조금만 잘 풀리고 여유로워지면 지난날의 간절함은 사라지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시간을 다 써버립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욥기가 보여주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평안할 때 보다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는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그렇지만 현실의 우리들은 이와는 반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평안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내 위주로 살아가기 바쁘고, 힘들고 고통이 올 때는 분노하고 좌절하며 하나님을 멀리하고 포기하려고 합니다.

 

왜 우리 신앙인들은 조금의 고난도 이겨내지 못하는 나약하고 갈대와 같은 믿음으로 살아갈까요? 오늘 본문이 그 해답의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욥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욥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직접 평가해 주시기를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1:8, 2:3)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에서 하나님이 이 만큼 칭찬한 인물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 몇몇 이외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평가만으로 봤을 때 욥은 성경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믿음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평가를 받은 조차도 극한의 고난이 찾아 왔을 때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고 있음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무죄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억울해 했습니다. 물론 보통의 사람으로는 감내하기 힘든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대놓고 원망하지 않고 참아내는 모습은 대단히 칭찬받을 만합니다. 만약 제가 욥이라면 저는 도저히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했을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욥 수준의 고난이 왔을 때 다 무너지고 말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일까요? 2절과 3절 말씀을 표준 새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2절입니다.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절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아멘.

 

욥은, 하나님은 못하는 일이 없으시고, 계획 하신 것은 다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에 의문이 듭니다. 욥의 믿음에 대해서는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나님이 그토록 칭찬하셨는데, 그러한 믿음을 가진 욥이 하나님이 못하시는 일이 없고, 계획 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럼 그 전에는 몰랐다는 말인가요? 그런 것도 깨닫지 못했던 욥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토록 칭찬을 하셨다는 말인가요?

 

깨달았다(알았다, -야다으티)”는 말은,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뛰어넘어서, 능력을 베푸시는 존재가, 나의 주인이시오, 나의 주권자 되심을 명확하게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이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 욥이 이러한 고백을 하기 전에 가진 신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서도, 왜 세상의 불의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가?라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욥은 특별히 자신이 현재 당하고 있는 엄청난 고난에 대해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죄도 저지르지 않았고, 양심도 올바르고, 모든 언행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정말 억울하다는 주장이죠.

 

우리가 욥이라면, 내가 욥이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제가 저를 평가해 보겠습니다. 1차적으로 저의 신앙상태는 욥하고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턱도 없는 함량 미달의 상태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다가 욥과 같은 고난이 저에게 닥쳐온다면, 아마 저는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미친 상태가 될 겁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물론, 세상을 저주하고, 내 자신을 저주하고, 극도의 분노와 자아붕괴 속에서, 하루하루를 죽음의 문턱에서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저는 솔직하게 욥의 고난을 이겨낼 자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준비도 안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제 가족에게 어려운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진짜 제대로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평안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 전능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때 뿐 만이 아니라, 나의 모든 주관적인 생각(의식)180도 바꾸어 버리고, 나의 모든 삶의 방향들을 180도 틀어버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게 하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도무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가난하고 병들어 허약하게 살지라도,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이 나를 결코 떠나지 않고 내 곁을 지키며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늘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르는 믿음을 계속 요구하고 계십니다. 욥은 이러한 믿음의 마지막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적정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강력한 믿음의 시험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욥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믿음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조그마한 시험만을 겨우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여러 가지 사소한 시험들을 이겨내고, 연약한 나의 믿음을 굳센 믿음으로 성장시켜 나가며, 급기야는 최고 수준의 시험을 이겨낼 준비를 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늘 이러한 준비를 잘 하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까지도 이겨내시고 부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만을 거의 막연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나약한 믿음의 조건에 따라서만 하나님을 상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욥과 같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 그 무한한 주권을 제대로 인정하는 사람은, 내게 무엇을 주시든지 주시지 않든지에 관계없이, “언제나 감사, 언제나 찬양, 언제나 예배, 언제나 기도, 언제나 영광, 언제나 할렐루야를 외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러한 온전하고 굳센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완벽하게 준비되도록 은혜로 함께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면 우리도 언젠가는 욥과 같은 칭찬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진짜 하나님의 존재를 제대로 깨달은 자는 어떤 고백을 드리는지 3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립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아멘.

 

속이 드러나는 얕은 믿음, 가벼운 믿음, 무지한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큰 믿음의 소유자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직분을 자랑하고, 교회를 자랑하고, 신앙 연수를 자랑하고, 무슨 교육을 받은 것을 자랑합니다.

진짜 하나님을 알고, 깨달은 사람은 입을 닫고 삽니다. 그들이 입을 열 때는 오직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복음 전할 때뿐입니다. 말이 많은 사람, 말 만 많이 하는 사람, 말로 다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할 때만 입을 열기를 즐겨하는 사람입니다.

 

욥이 이러한 믿음의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듣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 같이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아멘.

 

듣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라는 속담으로 충분히 설명이 됩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죠. 말씀을 듣고, 읽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귀로 말씀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욥처럼 눈으로 주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현현 하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빛으로 임하시더라, 옷자락을 보았다, 손을 보여 주셨다, 또렷하게 말씀 해 주셨다, 등등 각자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욥이 보았다는 것은, 실제적인 하나님의 모습, 혹은 음성을 들은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듣고, 자신의 무지, 무모, 자만함을 완전하게 굴복당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만 많이 하고, 고집 부리고, 불평하고, 분노하고, 오해했던 것들이, 다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눈으로 보았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욥은 귀로 듣기만 한 자신의 무지한 신앙이 다 드러나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눈으로 보도록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크나큰 영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6절과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아멘.

 

욥이 회개를 한 것은 어떤 하나하나의 잘못을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왜 이 세상의 악인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의인들은 고난을 받아야 하나? 왜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벌주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죄 없고 믿음이 좋은 나를 이렇게 고통 받고 비참하게 만드시는가? 이러한 반응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신이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도전입니다. 믿음이 여기에서 막히면,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영광과 사랑과 공의를 마음껏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욥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한계의 장벽을 무너트려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보았다라는 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증거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눈으로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는 믿음을 지닌 사람은 강력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예수님의 탄생에서 부활까지)의 증인이다”(24:48), “너희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2:32) 말씀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고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자 이 일의 증인이라”(2:32),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고,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5:30-32)고 강력하게 선포 했습니다. 이 말씀들 속에서 증인(, 마르튀스)”이라는 단어가 목격자, 즉 실체를 본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사건 사고에서도 목격자의 증언은 사실을 입증하는 스모킹 건(확실한 증거) 이 됩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고, 하나님의 주권을 완전하게 인정하게 된 욥은, 이전보다도 훨씬 굳센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이웃과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사실을 강력하게 전파하는 증거자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라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듣는 믿음에서, 보는 믿음으로, 보는 믿음에서 강력한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으로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보실 수 있는 은혜의 경험을 꼭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믿음을 가진 증거자로 우뚝 서십시오. 그로 인하여 내 이웃과, 내 가정에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복음의 전파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듣는 귀와 보는 눈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 아래 살아가면서, 믿음을 증거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믿음이 자라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 욥4210-17, 8:54-60

 

어느덧 2014년 마지막 송년 주일을 맞았습니다. 이렇게 연말을 맞는 것처럼 우리는 종말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위에 오시리란 초림에 대한 구약의 예언 회수는 456회인데, 주님의 재림 예언 회수는 신구약에 도합 1518(신약에만 318)입니다. 인간처럼 식언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듭되는 이 약속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하셨습니다. 주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 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24:38)하는 현세적이고,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따라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비웃고 조롱합니다(벧후3:3). 사단은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적이라고, 반문명적이라고, 반지성적이라고 비아냥거리도록 여론을 만듭니다. 피안주의니 현실도피주의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반성서적, 반 내세적, 반 종말적인 정신 풍토 조성을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훼방합니다. 깨어 준비하는 신앙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한 영특한 성주(城主)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도 많고 해서 별다른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다만 그 성 안에서 소문난 바보 하나를 곁에 두고 바보스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하루는 지팡이 하나를 그 바보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너보다 더한 바보를 만나면 주어라.” 그 유명한 바보는 자기보다 더 못난 바보를 찾아 두어 달 동안 성내를 돌아다녔으나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성주가 병이 들어 거의 죽어가게 되었을 때 바보를 불러 작별을 고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와 헤어져야 되겠다.” “어디로 가십니까요?” “황천이란 곳으로 가야 한단다.” “영감께서 황천으로 가시면 언제쯤 돌아오시게 됩니까요?” “황천이란 곳은 매우 먼 나라이니 한 번 거기 간 사람은 옛적부터 다시 돌아오지 못한단다.” “그러면 준비를 단단히 해야 되겠습니다요.” “이 바보야, 준비는 무슨 준비. 눈을 감고 다리를 쭉 펴고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면 된단다.” 이 말을 들은 바보는 지팡이를 성주에게 도로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십 리나 백 리를 가더라도 준비를 해야 하는 법인데 하물며 다시 오지 못할 먼 길을 가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그냥 떠난다니, 주인님보다 더한 바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요?” 연말에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말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끝이 좋은 사람이 참으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참 승리자는 처음 보다 끝이 좋은 사람입니다. 처음에 아무리 잘 했어도 끝이 좋지 못한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에스겔33:12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했습니다. 처음에 의인으로 살았어도 끝까지 의인으로 살지 못하고 도중에 타락하여 죄 가운데 살게 되면 구원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이고, 처음에 죄인으로 살다 회개 하고 돌이켜 의인으로 살면 처음 죄가 용서 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처음에 아무리 믿음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잘 경외 하고, 봉사도 잘하고, 충성스럽게 믿음 생활 잘했어도 후에 미혹을 받아 바른 믿음에서 떠나거나 타락하여 죄 가운데 살면 처음 행한 믿음 안에서 의로운 삶이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처음에 죄 가운데 살다 탕자처럼 회개하고 돌이켜 믿음으로 바르게 살게 되면 과거의 죄를 사하시고, 기억도 아니 하시고,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게 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 조카 롯이 삼촌을 따라 갔습니다. 그들의 생업이 번창해지고, 기르는 짐승들이 늘어나자 종들 간에 목초지로 인한 다툼이 생기게 되어 서로 갈라서게 됩니다. 그 때 롯은 먼저 좋은 곳을 택하여 갑니다. 13: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갈라 설 때 처음에는 롯이 선택한 곳이 훨씬 살기 좋고 윤택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점점 더 좋아지고, 풍성해지고, 존귀해 집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고,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되어 점점 더 창대해 지고, 존귀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중심으로 선택하고 살았던 롯은 처음에는 좋아 보였으나 세월이 갈수록 나빠집니다. 재물을 약탈당하고, 가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주변의 악한 이웃과 환경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소돔 고모라가 불 심판을 받을 때 재물도 불타고, 천사의 경고를 어긴 아내마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운 모압, 암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던 다윗과 세상 중심으로 살았던 사울 왕의 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31절에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세상 중심, 물질 중심으로 욕심을 따라 교만하게 살았던 사울은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그와 그 가문이 점점 기울게 되었지만, 믿음으로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며 살았던 다윗은 점점 더 흥왕하고, 존귀해 지고, 그의 가문에서 메시야가 출생하는 영광스런 가문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처음보다 끝이 점점 더 좋아지는 복을 받기를 소망합니다.

 

2.끝이 좋으려면 끝까지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들의 유형을 보면 처음에 잘 시작하고 점점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처음에 잘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타락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에 대해 성경에는 믿음이 파선 된 자” “성령으로 시작 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자” “미혹 된 길로 가는 자” “세상으로 다시 돌아 간 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모습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유형은 처음에 죄악 된 길을 가다가 돌이켜 회개 하고 바울처럼 새롭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 나오는 욥은 가장 바람직한 유형인 처음에 잘 시작하고 점점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간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1:1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했습니다. 1:8에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면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 이러한 욥을 시기하여 사단은 시험합니다. 보통 큰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자식들의 죽음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두 잃는 시험으로, 질병의 시험으로, 외로움과 멸시와 조롱의 불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사단의 기대와 의도와는 달리 믿음이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욥기서에 나타난 욥이 보여준 더 좋은 믿음의 모습을 보면 먼저 자기 의가 깨어진 겸손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를 자랑하고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욥에게도 고난 받기 전에는 그러한 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하면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은근히 자기 의를 드러냅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이런 은총 주시기 위해 때로는 바울처럼 가시와 같은 질병을 주시더라도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다음에 욥은 회개를 통해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42:6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했습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입니다. 좋은 믿음에는 반드시 회개가 동반됩니다.

 

미국에 젠킨스 박사님에게 어느 날 죠지아 주에 있는 큰 술집 주인이며 도박장 주인이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그는 돈이 엄청나게 많은 부자인 데 생활은 불행하였습니다. 박사님은 불행한 삶을 청산하기 위하 여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여 주었습니다. 성경도 읽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후 몇 달이 지났습니다.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아침 박사님이 지시하신 대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빛이 제 영혼에 가득 비쳐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제 마음을 바치고 그 분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 며칠 후에 그 집 앞을 지나면서 보니까 비싼 고급 가구를 모두 실어 내가는 것이었습니다. “왜 고급 가구를 실어 내가십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술을 팔아서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번 돈이 생각날 때마다 추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술을 팔아서 산 물건을 모두 처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물건을 사용하면 집안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집안 식구들이나 자녀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깨끗하게 번 돈만 사용하겠습니다.” 회개는 형식적인 믿음이 참 믿음이 되게 하고, 죽은 믿음이 산 믿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욥은 끝까지 인내 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 하다 보면 수많은 시험과 유혹과 박해가 있습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믿음이 파선됩니다. 욥은 불시험을 받으면서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 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인내 했습니다. 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하며 소망을 가지고 인내 했습니다. 그랬을 때 욥은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그러한 그에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42:10)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나중이 더 좋아졌습니다. 우리도 욥처럼 좋은 믿음가지고 갈수록 좋아지기를 기원합니다.

 

3.끝이 좋으려면 반드시 하늘 소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약 본문에 나온 스데반 역시 좋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간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스데반은 좋은 믿음으로 인정받아 뽑힌 일곱 집사 중 하나입니다. 6: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했습니다.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로 복음 전도에 힘썼습니다. 오늘 본문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복음의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이 도저히 그를 당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돌을 들어 쳤습니다.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그는 불쌍하고, 불행한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 거룩하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늘이 열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7:55-56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했고, 59-60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하늘로 이어지는 거룩한 순간입니다. 이 소망이 없다면 그가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해도 그는 인생 실패자요, 불행한 자일뿐입니다. 13세기 스페인의 귀족이며 명문 대학의 교수였던 라몬 럴은 자신의 유망한 장래를 포기하고 모슬렘교도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갔었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그 나라에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1년 반을 감옥에 감금당했습니다. 노인이 되어 성벽으로 끌려가 돌에 맞아 죽어 갈 때에 그의 마지막 말은, "오직 예수"였습니다. 죽기 직전에 그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이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목사 안수식 때에 ", 주 하나님 당신께 나 자신, 나의 아내, 나의 자녀, 그리고 나의 모든 소유를 드립니다." 라고 말했으며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만을 향한 독점적인 사랑을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가진 것이 없어도, 박해를 받아도 오직 하늘 소망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4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저는 오늘 두 본문을 중심으로 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끝이 좋은 사람이 참으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끝이 좋으려면 끝까지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끝이 좋으려면 반드시 하늘 소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과연 나는 어떤 존재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모두 욥처럼, 스데반 집사처럼 끝이 더 은혜롭고, 잘되는 좋은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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