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믿음 약2:14-26
우리 사회는 믿는 자들을 가리켜 "신자"라고 부릅니다. 그 가운데 신자들을 구분하여 로마 카토릭 교회의 교리를 믿는 사람들을 "천주교 신자"라고 하고, 불교의 교리를 믿는 사람들을 "불교 신자"라고 부르고, 기독교의 교리를 믿는 자들을 가리켜 우리는 "기독교 신자"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믿음에 참된 믿음이 있고 거짓 믿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진짜 참기름," "진짜 가죽" 등 "진짜, 참"이라는 단어가 붙이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가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도 참된 믿음이 있고, 거짓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믿음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점을 오늘 살펴보면서 우리 믿음의 현주소를 다시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연구할 본문의 주제는 참된 믿음은 행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두 번째로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참된 믿음이라고 할 때 구원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 2:14을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믿음의 역할이 아니라,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 참된 믿음이며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인가 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결론은 구원하는 참된 믿음은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주 고전적인 신학적 진술입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이 구원하는 믿음일까요? 야고보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이 본문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참된 믿음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14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면"이라는 뜻이 아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이 절은 자기 스스로 믿는다고 말하는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믿음을 말로 고백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믿음을 "입으로 시인해야"(롬10:10)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야고보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의 논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아주 실제적인 예를 하나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15-16을 보십시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여기에서 형제나 자매는 1차적으로 교회 공동체 내의 믿음의 가족들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제한시켜 사용하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 형제자매라고 하는 의미는 믿음의 가족들에게 제한되어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그 적용면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믿음의 가족들에게 먼저 적용함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의 행동을 나타내 보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형제나 자매가 입을 것이 없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몸을 따뜻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옷을 입으라, 음식을 먹으라고 말만 하고 그 몸에 실제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아무런 유용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말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좋은 말은 그 자체에 있어서 좋은 것이고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어울립니다. 하지만 좋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사도 요한도 말하기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1서3:17)고 하였습니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대하여 가장 좋은 주석을 썼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 토마스 맨틀(Thomas Matron)은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말은 값싸게 할 수 있는 것이며, 값싼 말은 다 합해보아야 아무 것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무 값도 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말은 단지 마음에도 없는 동정이 될 수 있습니다. 굶주린 배는 말로 채워지지 않고 먹을 것으로 채워집니다. 또한 헐벗은 몸은 선의의 인사치례로 입혀지지 않습니다. 말은 조롱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헐벗고 일용한 양식 없는 사람들에게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라고 말하면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을 놀리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맨틀의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지적해 주었습니다. 스스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증거가 없다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하는 가짜 믿음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요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설명한 후에 그 결론을 말하기를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고 하였습니다. 교회당에 다니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행함이 없고 말뿐인 고백은 죽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자체가"(???' ??????, by itself)라는 말은 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행함이 동반하지 아니하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기 때문에 그 믿음 자체가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고보가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에 따라 정리해 보면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약2:22)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성도라면 그 믿음이 정의하고 있는 대로 행함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2) 참된 믿음은 교리적인 지식을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교리적인 지식을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야고보는 19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뿐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우리가 믿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적인 부분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라고 하는 유일신 사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참된 신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교도들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신이시다"라고 하는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것을 안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예증하기 위하여 귀신들도 교리적인 지식을 알고 떤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귀신들린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 때에 그 사람 안에 있던 귀신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라고 하였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또한 가버나움에 있을 때에도 한 귀신들린 자가 나와서 소리 지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4:34) 여기서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점은 귀신들도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알고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생활에 관한 중요한 교리적인 지식을 안다고 하여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성경은 어떤 책인지, 교회는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교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줄줄 외우고 교리문답서와 중요한 성경구절을 잘 외우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리적인 지식을 안다고 해서 그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이 점을 지적한다고 하여서 교리를 배우고, 성경을 암송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참 중요합니다. 이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교리적인 지식을 안다고 해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아는 교리적인 지식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이러한 지식이 없이 믿는 것은 광신적인 것입니다. 지식 없는 믿음의 위험성은 우리 사회에 영생교, 천부교, 구원파 교회의 출현으로 더욱 그 심각성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못지않게 위험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교리적인 지식을 알고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말씀에 따라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광신적인 것 못지않게 나쁘고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이유는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만 하고, 그 지식의 말씀에 따라 행하지도 않고,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헌신조차도 막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은 단순한 교리적인 지식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 교리적인 지식에 따라 행동을 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요 구원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가장 많이 알려진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의 사고활용과 성숙」이라고 하는 책에서 우리가 지성을 활용하여 성경의 교리내용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교리적인 지식은 예배와 믿음과 거룩한 생활과 서로 사랑하는 봉사생활로 나타나야 진정한 지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성경의 단편적인 지식을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신자의 믿음생활에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배운 성경지식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지식에 합당한 행동을 보이십시오. 이것이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행동이요, 실제로 구원을 체험하는 방법입니다. 참된 믿음은 교리적인 지식을 아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 위하여 야고보가 논증하고 있는 말씀에 따라 살펴보았습니다. 참된 믿음은 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교리적인 지식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행함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믿음과 행함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2.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
야고보는 드디어 20절부터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성경적인 실례를 들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먼저 야고보서 2:20에서 질문형태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 인줄 알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공허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느냐? 내가 그 사실을 가르쳐 주겠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능동적인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점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서로 다른 두 사람, 아브라함과 라합의 경우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남자고 라합은 여자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이었고 라합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시에 족장이었고 라합은 창녀였습니다. 이 대조적인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 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러한 예를 든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떻게 행함으로 표현되었습니까? 21절에 보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때는 언제입니까? 그가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손과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을 때였습니다(창15:6). 이삭을 바치는 사건은 훨씬 뒤에 일어난 사건이고 최종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사건입니다(창22:1). 그러면 야고보는 왜 이 사건을 예로 들었겠습니까? 그 답이 22-23절에 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그는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 믿음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참된 믿음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행함으로 그 믿음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의 강조점입니다.
라합의 믿음은 여호수아 2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사는 창녀였습니다. 이 라합은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하여 들어온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야고보는 왜 라합을 참된 믿음의 소유자로 예를 들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라합의 믿음이 정탐꾼을 숨겨주고 안전한 곳으로 피하게 하는 것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결론은 무엇일까요? 한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행함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거나, 교리적인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거짓 믿음을 가진 신자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도 않고 그 삶에 변화가 없다면 그는 사이비 신자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절대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함이 구원의 조건은 될 수 없지만, 그가 구원받은 참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하는 행함은 받듯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한다고 다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스스로가 신자라고 아무리 주장한다고 해도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잘 외우고 교리적인 잘 안다고 할지라도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믿음과 행함의 문제를 논의할 때 항상 상반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인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현대 교인들은 행위를 구원과 결부하여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위와 구원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행위를 언제나 믿음과 함께 취급함으로서 구원과 관계가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장2항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진 선한 행위들은 살아있는 믿음의 열매요 그 증표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그레이엄 골즈워디(Graeme Goldsworthy)는 신자의 행위 문제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의 백성은 모름지기 부르심에 합당하게 거룩함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원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원리를 고의적으로 경시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결론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행함으로 그 신분적 독특성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본질 자체가 행함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신자라면 우리가 믿는 믿음과 그 믿음의 내용에 일치하는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생활 현장에서도 구원을 실제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참된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는 그가 믿는 믿음을 행함으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이 본문에서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행위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 믿음을 외적인 행함으로 표현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 믿음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교회에 긴급한 일이 있습니까? 공부를 하고 싶은데 형편이 되지 못하는 학생들이 주변에 있습니까?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습니까? 또는 해외에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선교편지를 통하여 듣습니까? 누군가 육신의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습니까? 이러한 모든 경우들을 볼 때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하는 기회로 간주하십시오.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함으로 믿음을 표현하며 살 때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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