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야고보서

행함이 없는 믿음 (약 2:14-26)

nam씨 2021. 7. 24. 11:39

행함이 없는 믿음 (약 2:14-26)

이 시간에는 “행함 없는 믿음”이라는 제목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우리의 믿음을 한 번 점검해 보십시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면 믿음이 큽니까? 작습니까? 혹은 좋습니까? 나쁩니까? 이것은 알 수 없다가 아니라 알 수 있다는 것이 야고보의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바람을 소리로 힘으로 흔들림으로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함 있는 믿음을 보고 하나님이 인정하고 사람도 인정하는 믿음의 사람 되시기 축원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잘 가르쳐줍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1. 행함 없는 믿음은 이익도 없고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익도 없고 구원도 없어요. 그래서 20절에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했어요. 그런 믿음은 헛것이란 말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구원도 없다니 얼마나 두렵습니까? 잘 아시는 마7:21 말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보내신 자 곧 예수 믿는 것인데 바로 믿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21절 대로 행함 있는 믿음이라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천국문은 아무 열쇠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문은 예수라는 열쇠로만 열려야 열립니다. 이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셨는데 우리도 예수 믿는다면 그 열쇠를 가진 것입니다. 예수를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로 믿는 것이 열쇠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하는 자에게 천국은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면서 속죄의 확신도 없이 보혈도 믿지 못하고, 나의 주 나의 왕으로 믿는다면서 예수를 높이지 않고 자신을 그 분의 것으로 알고 그 뜻대로 순종치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나의 주가 바뀌었으니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야 해요.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천국에는 구원 받은 사람도 많지만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 명심해야 합니다.

2.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는 이 말씀을 하기 전에 이런 예를 들고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오래 전에 아는 어떤 분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면 “예”라고 대답을 잘합니다. “아니요”한 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얼마나 대답을 잘하든지 그 순간으로 본다면 그보다 믿음이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말을 해도 다 예니까요.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말 중에서 한 가지도 행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떻게 합시다.” 하면 “예 예 그래야죠.” 하지만 행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언젠가 “나는 목사님 말씀에 언제 한 번이라고 아니요 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맞습니다. 정말 아니요 한 적이 없어요. 그러나 문제는 “예, 예”하고 끝내 버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믿음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죽은 믿음이란 바로 저런 것이라고요. 이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말씀 들을 때는 기쁨으로 받으나 곧 잊어버리고 배반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듣고 행하여 결실하는 옥토밭 심령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아멘 하지만 거기서 끝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 앞에 아멘도 잘해야 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복도 크지만 말씀을 행하는 복은 더 큽니다. 요일2:17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했습니다. 진정 믿는다면 행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인터넷에서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물건을 사려면 그 쇼핑몰 회사에 개인정보를 입력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도용 당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건을 살 수 없습니다. 믿지 못하면 못 삽니다. 그러나 믿는다면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항상 믿음의 유무에는 행함이 따르게 됩니다. 노아가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산 위에다가 방주를 지었습니다. 25절에 기생 라합도 믿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이 믿음의 행함이 있었기에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믿는 것은 마귀도 합니다. 그래서 19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이 알기는 더 잘 압니다. 귀신은 하나님도 알고 예수님도 알고 성경도 압니다. 우리보다 더 잘 알아요. 믿기까지 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문제는 어느 한 구절도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회개가 무엇인지 알지만 회개하지 않아요. 감사가 무엇인지 알지만 감사하지 않아요. 천국이 있는 지도 알지만 사모하지 않아요. 성경의 약속을 알아도 붙잡지 않아요. 죄를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이렇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영원히 예비 된 불구덩이로 버림받게 됩니다.

3. 행함이 없는 믿음은 보일 수도 없습니다.

18절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따르기 때문에 그 믿음을 보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믿음 내 놓아라 하시면 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게서 여러분에게 네 믿음을 내 놓아라 하시면 무엇을 내놓으시렵니까? 무언가 내 놓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두 사람이 풀려났는데 참 아름다운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탈레반 사령관 압둘라가 파키스탄 <더뉴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인데 “지난 주말 석방 대상으로 뽑힌 여성 두 명에게 집에 갈 준비를 하라고 통보했지만 한 명이 자신의 석방 기회를 다른 여성에게 양보했다.”고 말했습니다. 탈레반은 가장 많이 아픈 여성을 물색한 끝에 짐을 싸라고 지시했더니 “조금만 고민할 기회를 달라. 동료들과 논의해 보겠다. 하더니 나는 상태가 많이 나아졌으니 다른 이를 풀어 달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여성은 매우 용감했다.”며 “한국 이름이 너무 어려워 정확한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입니까? 이렇게 내 믿음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본 일인데 목포에서 기독교회관을 짓는데 발파작업 도중 사고가 나서 지나가던 중학생이 거대한 바위를 맞고 죽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양동00교회 집사님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내 아이가 천국 갔다고 하면서 슬퍼하지 않고 관계자들을 용서했습니다. 그 믿음 좋은 집사님 덕택에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하여 건물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불행 중이지만 믿음 가진 사람은 뭔가 다르지 않습니까?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봐도 그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일성수하는 것만 보아도 그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바쁜 때 일도 많고 피곤하지만 주일성수하면 그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하는 것만 봐도 그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피곤함을 다 이기고 나오시는 것을 보면 나보다 믿음이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십일조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도 십일조하고 자녀들에게도 십일조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그것도 저것도 하지 않습니다.

십일조하지 않는 유형을 보면 남이 헌금 많이 하면 좋아하면서 자기는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자신은 헌금 안하면서 제직회만 하면 교회에서 돈 가지고 다투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재정을 맡아서 관리하면서도 자기는 십일조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남 하네마네 혼자 충성 다하는 것 같이 간섭하면서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어떤 사람은 백만 원 벌어도 10만원, 천만 원 벌어도 10만원, 이천만원을 벌어도 10만원 금액이 변함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정헌금이나 월정헌금이지 십일조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행하는 것을 보면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21절에 아브라함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절)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로만 “하나님, 아들을 드리겠습니다.” 하지 않고 실재로 순종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랬기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의 믿음을 보십니다. 성경에서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하심을 보면 부자와 나사로 경우처럼 믿음이 아니라 꼭 행함 가지고 심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믿음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란 행함이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신분에 맞지 않는 생활이라면 어찌 믿음이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마음으로만 사랑하지 않고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보내시고 생명의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을 예비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행함의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익도 구원도 없고, 죽은 것이요, 보일 수도 없고, 헛것이며, 의롭다 함도, 복도, 하나님의 벗도 될 수 없는 무가치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함이 따르는 참 믿음 가지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