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야고보서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 2:1-13)

nam씨 2021. 7. 17. 16:35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 2:1-13)

하나님의 보는 것과 사람의 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관점의 차이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의 차이일까요? 하늘과 땅이 차이입니다. 사55:8-9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늘 하는 실수 중의 하나는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마나 가졌느냐? 어디를 나왔느냐? 얼마나 잘 생겼느냐? 그런 외모만 봅니다. 그래서 삼상16:7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셨습니다. 본문은 형제 차별에 대한 책망과 사랑의 권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실천 강령을 주고 있는데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 될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절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외모로 취한다는 원문의 뜻은 ‘한 사람에게 얼굴을 들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외적인 조건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 대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당시 사회는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부한 자를 지나치게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도 이런 풍조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습니다.

그래서 2-3절에 나오듯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는 종류의 일들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될 것은 우리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주님 덕분에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주님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런 자신과 주님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어찌 사람을 차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를 사랑하신 주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고 주님이 우리를 높이신 것처럼 우리들도 남을 높여야합니다.

2. 외모로 차별하는 것은 악하기 때문입니다.

4절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여기 구별하다는 말은 ‘구별하다’는 뜻 외에 ‘의심하다’ ‘주저하다’ ‘조사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인가에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나은 것이 있으면 존중하고 별 볼 일 없으면 무시하려는 태도입니다. 사람을 생각하는 기본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악하다고 했습니다.

유물론자 칼 마르크스가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못생겼지만 아름다운 부인을 살 수 있다. 나는 못 생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돈으로 미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은 앉은뱅이에게 스물네 개의 다리를 만들어 준다. 나는 사악하고 한심하며 양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돈은 나를 존경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이런 물질만능주의자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라는 가장 악한 것을 만들었습니다.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조심해야 할 것들입니다. 죄를 지어도 얼굴만 아름다우면 다 면죄가 된다면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지금 바로 그러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있습니다. 돈 있으면 죄도 없고 돈 없으면 죄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돈 많거나 권세 있으면 죄를 지어도 오래 옥살이하지 않습니다. 이 불합리한 현실을 개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것은 참으로 악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영적으로 봐도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5-6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나 권력자가 믿음이 더 좋다면 존중할 가치가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오히려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더 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자를 멸시해서도 안 됩니다. 전에 막가파가 외제차 타고 다니는 부자만을 골라서 살인했지만 그것도 잘못입니다. 부자라고 다 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영적으로 부요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한 자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오셨을 때 왕궁이나 부잣집에 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동네 베들레헴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날 곳도 없어 마구간의 구유에 나셨습니다. 풍채도 없으시고 외모로는 흠모할만한 아무 것도 없으셨습니다.

여수의 어느 교회에서 목회자를 초청하려고 노력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온 교인들이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곳을 가면 너희 목자가 있을 것이니 가 보아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교인들이 가서 보니까 어느 청년이 나오는데 신은 고무신에다 옷도 허름한 군복떼기 같은 것 걸치고 얼굴도 볼품이 없어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하는 말이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가르쳐 주셨어요.” 하는데 안 모시고 갈 수도 없고 그래서 모시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교회에서 은혜를 끼치고 그 지역을 복음화하고 그리고 학교도 만들었는데 학생들이 다른 학교 안 가려고 하고 꼭 그 학교만 오려고 한답니다. 얼마나 지역사회에 존경을 받는지 성자라는 대접을 받는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본 에도시대(1598~1867)에 이타쿠라 시게무네라는 유명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유혹이나 외부의 압력을 물리치고 항상 공정한 판결을 내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물었다. "공정한 판결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얼굴로 인격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눈에 밉다고 해서 악인이 아니고 좋게 보여도 다 선량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성형외과가 가장 성업 중이라고 합니다. 너무 흉하면 가서 성형하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보다 중심을 보시며, 외모지상주의는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 중에서 풍채 좋은 아들들은 제쳐놓고 가장 볼품없는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중심이 가장 나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부자들은 어떠했습니까? 6-7절을 보면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피 흘려 지키는 사람들도 보면 서민들입니다. 부자들은 돈 주고 빠지거나 이민가고 도망칩니다. 교회도 최후까지 남아서 교회를 지킬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저도 예배당 여럿 지었지만 부자가 교회 일 다 할 것 같아도 그렇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5장을 보면 부자가 받을 심판이 큽니다.


4. 외모로 취하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8-9절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여기 최고한 법이란 ‘왕법(王法)’이란 뜻입니다. 황제의 사회로 진행된 의회에서 제정된 법입니다. 당시 왕법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변경될 수 없었으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세상 황제도 그렇거늘 하늘과 땅의 황제이신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이니 두말 것이 있겠습니까? 이웃 사랑의 법이 그만큼 귀한 것이므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성도들만큼은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누가 교회에 오더라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친절하게 해야 합니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만 노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5. 다른 법을 잘 지켜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10-11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예배 잘 드려도 사람에게 잘못하면 안 되고, 아무리 사람에게 잘해도 하나님께 잘못하면 안 됩니다.

6. 그리고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12-13절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가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해야 할 이유입니다.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은 부자는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그가 왜 음부에 떨어졌는지 성경은 교리적인 답변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16:25) 한 말씀입니다. 즉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면서 어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수 있으며, 사람에게 잘못하면서 어찌 예수 믿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는 영광의 주님을 믿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였던 록펠러의 이야기입니다. 룩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의 재산을 화폐가치로 치면 현재 세계 최대 갑부인 빌 게이츠보다 3배 이상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55세에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실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 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룩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룩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그만큼 큰 규모의 좋은 일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수많은 불쌍한 사람을 돌보았고, 교육 발전을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했으며, 의학연구소와 재단을 포함하여 시카고대학 등 12개 종합대학과 12개의 단과대학, 4,928개의 교회를 지었고, UN본부 건립 시 자신의 토지를 국가에 헌납했으며, 그가 설립한 대학에서 70여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어요. 십일조 관리직원만해도 40명이 넘었고, 겸손하여 자기 이름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마지막까지 자기를 위해서는 얼마 남기지 않았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가지도 그의 자손들이 활발한 자선사업으로 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적게 가진 자에게는 적게 많이 가진 자에게는 많이 내놓으라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 심판을 감당할 자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외모로 취하셨다면 이미 버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아무리 외모를 취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영광의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니 그렇게 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차별 없이 사랑하신 것 같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수고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이웃을 차별 없이 사랑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