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요한계시록 3장 14~22절)
신약성경에서 “20절”을 떠올리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이 먼저 생각이 납니다. 그에 못지않게 한국교회 성도들이 많이 암송하는 구절이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2장 20절에서 3장 20절로 갈게~(갈, 계), 이렇게 연결시켜 기억하시면 좀 더 기억하시기 쉬우실 겁니다.
3장 20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드립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아멘.
이 본문은 무엇에 대해 말씀 하는 구절일까요? 성경 구절 중에서 원래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엉뚱한 내용으로 오해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본래의 뜻과는 완전히 다른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구절들 나올 때마다 자세히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본문으로 설교 할 때, “복음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열립니다.” 이렇듯 복음 전도를 주제로 설교 하십니다. 교회 전도 축제 할 때도 현수막에 많이 붙어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연다, 문으로 들어간다, 함께 먹는다, 이 과정을 보면 불신자가 복음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어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사용하기에 아주 적절한 구절인 것처럼 보입니다. 딱 이 한 구절만 가지고 넓은 의미로 보았을 때 아주 틀린 해석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주체가 우리(성도, 전도자)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앞의 19절만 읽어 보아도 20절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아멘.
“~네가 열심을 내서 회개하라. 볼지어다 네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이렇게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열심을 내서 회개하라!”, 바로 회개와 연결되는 구절이 20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0절은 복음 듣고 신자가 되는 복음 전파 과정이 아니라, 이미 복음을 듣고, 믿고 있는 신자들 중에서 여러 가지 죄에 빠져 지내는 사람이 있다면, 빨리 돌이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맥락이 20절 말씀의 올바른 해석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문 밖에 서 있다(헬, 에스테카) 와 두드린다(헬, 크루오)라는 동사는 문법적으로 이 두 가지 동작을 계속 하고 있는(진행형) 상황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서 헤매 이고 있는 연약한 자들의 마음 문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두드리고 계시는 동작을 멈추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언제까지 두드리시나요? 사랑하는 자녀들이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올 때까지 멈추지 않고 그렇게 하십니다.
이 문 두드리는 소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 들려야 정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듣지 못했다, 소리가 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문을 열수 있느냐”라고 아무도 핑계대지 못합니다. 우리가 계속 못 들었다고 우긴다면 아마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마음 문 밖에 서서 일생동안 두드리고 계셨던 장면을 녹화 영상으로 보여 주시면서,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드실 지도 모릅니다.
이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다(헬, 아쿠세)와 문을 열다(헬, 아놐쎄)라는 동사는 문법적으로 가정법 과거인데, 풀어서 설명 드리면, “과거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면, 과거에 문을 열었다면”이라는 뜻이 됩니다. 듣고 열어 버린 상황으로 종료 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만 해본 겁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문 밖에 서 계시고, 열심히 문을 두드리시기를 계속 하는 상황이신데, 문을 여는 동작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믿음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부모나 친구, 혹은 다른 사람의 소리는 잘 듣고 따라갑니다. 그런 행동들이 자신에게 충분한 이익이 되고, 자기 자신은 다른 사람과 잘 소통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유독 주님의 음성은, 특히 회개하라고 마음 문을 두드리면서 말씀 하시는 소리는 안 듣고, 듣기 싫어하고, 말해도 무슨 소린지 모르고,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문을 열기는커녕 꼭꼭 닫아 버립니다. 문 밖에 주님이 계속 서 계시는데도 미안해하지도 않고, 문 만 열면 다 해결되는데 자기가 자기 마음 문을 꼭꼭 걸어 잠가 놓았다는 사실 조차 모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미련하기 짝이 없는 바보 같은 모습일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우리가 문을 열 때까지 포기하지 아니 하시고 똑 같은 온유함과 인자한 모습을 지니시고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문 밖에 서서 우리의 양심의 문, 회개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포가하지 아니하는 그 열심과 신실하심이, 바로 몸을 버리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의 모습이십니다.
이 20절을 읽고, 외우고, 묵상 하실 때 우리들은 회개하기에 앞서, 문 밖에서 서서 계속 두드리고 계신 주님께 죄송하고, 미안하고, 부끄럽고,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멈추지 않는 두드리심의 은혜와 사랑의 마음을 잘 받아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반복되는 죄의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는 못할망정, 근심시켜 드리고, 슬프게 해드려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문만 여십시오. 용기 내셔서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구하십시오. 내 연약한 믿음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 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우리 주님은 과거에 내가 얼마나 못 된 짓을 했는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못들은 척 하며 하며 주님을 얼마나 무시했는지, 따지거나,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다 용서 하시고, 다 이해 하시고,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회개하는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놀라운 평안의 은혜를 충만하게 주실 것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8월 한 달 동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셔서,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아니하고, 다 들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문을 활짝 여시고, 우리 주님과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이루어가시며 온전한 믿음의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본문에서 회개를 강조하는 대상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입니다. 일상생활의 회개도 중요하지만, 본문에서는 특히 신앙생활의 회개를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15, 16절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아멘.
예수님이 보시기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신앙 행위를 보여 주었습니다. 고대에 이 지역이 온천이 있는 지역이라 물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 이었기에, “차갑다, 뜨겁다”라는 물과 연관 지어 말씀을 하셨습니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상황을 떠올리지 마시고 그냥 이 글자인, “차갑다, 뜨겁다”에 집중해 보십시오. 차가워야 할 것에는 차갑고, 뜨거워야 할 것에는 뜨거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차갑고 뜨거운 두 단어를 함께 아우르는 말이 16절에 나오는데, “미지근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헬, 클리아로스, lukewarm)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 한 곳에서만 나오는데, 열의가 없고, 내키지 않고, 미적미적 거리는 상황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교회생활, 신앙생활 해 나가는 것이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마지 못해서, 거의 의무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주석에서 보니,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랑에 대한 무감각함과 열정 사이에서 비참하게 동요하는 영혼의 상태이다”(인터내셔널디럭스바이블 원어사전) 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미지근한 이유는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사랑도 바닥이 났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하나도 없이 그냥 교회라는 건물 안에 몸만 왔다 갔다 하면서, 그마저도 귀찮고 짜증나는 마음으로 정해진 최소한의 시간에만 왔다 갔다 하는 상태라고 추측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입에서 토해 버리겠다고 하시면서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토해버린다는 말씀 속에서, 이렇게 미지근하게 신앙생활하면서, 마치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기만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역겹게 여기시는지 그 진노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무엇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사랑의 열정이 식어버린 것일까요? 17절에, “네(라오디게아 교회와 성도)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돈이 많아서 반대로 열정과 사랑이 식어 간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지역은 온천지대라고 했죠. 이 온천이 이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땅만 파면 물이 나오는 천연 관광자원으로 인해 물질적으로 부요함을 누렸습니다. 이들은 많은 돈을 교회에 헌금함으로 인해 충분히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착각했고, 또 돈의 풍요를 누리느라 신앙생활의 거룩과 경건은 점점 관심 밖의 일이 되어 갔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돈에 잠식당해서 점점 피폐해져갔고, 결국 사랑이 하나도 없이 아무 의미 없는 기계적인 종교 활동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함이 원인이었지만, 모든 성도들에게는 신앙생활을 저해하는 여러 가지 원인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만의 약점일 것이고, 사탄은 누구보다도 그 약점을 노리고 유혹하고 넘어트려 신앙 상태를 미지근하게 만들어 갑니다. 돈, 건강, 성공 음란, 분노, 판단, 정죄, 자기애착, 과도한 자녀 사랑, 과소비, 팔랑귀(줏대 없이 남의 말 듣고 잘 흐트러짐), 무기력증, 일중독..... 셀 수도 없는 원인들이 신앙생활을 미지근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자기만의 특화된 원인들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 하고, 찾아내야 합니다. 그 원인을 끊어내고, 뽑아내려고 죽기까지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점점 무의미, 무감각, 무관심으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런데 진짜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무엇에 빠져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신앙 수준이 토함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지 못할 정도로 돌 같이 굳어진 상태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부요함을 자랑하는 것이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인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 부요함이 신앙생활을 잘 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착각 하면서, 계속 돈 자랑하고, 더 부자가 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17절 중간 부분부터 18절까지 읽어 드립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아멘.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부요함을 바탕으로 신앙생활도 잘 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시선으로 봤을 때 그들의 모습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삶은 풍요롭게 보였지만, 사랑이 없는 그들의 영혼은 메마르고 피폐하여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영혼의 상태를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높게 평가하는 것, 사람들이 나를 높게 평가해 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고 착각 하는 것, 아무것도 더 추가하지 않아도 지금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교만이자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점점 비참해져 가고, 자신의 신앙이 물기 없는 가지처럼 바싹 메말라 가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18절에 그렇게 착각에 빠진 무지한 자들에게 예수님이 권면 하십니다. 돈 자랑, 더 가지려는 욕심 그만 부리고, 자랑하고, 남을 판단 정죄 하는 것 좀 그만하고
1.불로 연단한 금, 곧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부요함을 자랑하는데 힘쓰라.
2. 흰 옷을 사서,곧거룩과 경건으로 벌거벗은 것 같은 죄악의 수치를 가리는데 힘쓰라.
3. 안약을 사서, 곧 성령 충만으로 회복하여 분별의 눈을 뜨는데 힘쓰라.
세 가지를 힘주어 권면 하십니다. 이세 가지를 합하면, 예수님을 더 채우고, 예수님과 더 가까이 하고,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예수님에게까지 자라가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열심을 멈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나의 연약한 믿음에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뜨겁게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네, 그러시다면 저는 이 시간에,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우리 주님께서 오늘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모두를 회개의 매서운 질책과 사랑의 매를 들어주시기를 간구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질책과 매를 맞기를 피하지 마십시오. 맞고 정신 차릴 수 있다면 맞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드시는 사랑의 매를 달게 받겠다는 마음으로 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아멘.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는 주님의 책망을 달게 받으시기를 결심 하셨다면,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을 계속 세워 두시 마십시오. 그리고 매일 같이 회개의 문을 여십시오.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 주시고, 기회 주시고, 성령 주시고, 살아갈 새 힘, 새 능력 주시는, 정말로 좋으신 우리 주님을 다시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 번 한 주 회개하는데 열심을 내시고, 마음의 문을 여신다면, 20절과 같이 우리 주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아름다운 화목의 깊은 교제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싸늘한 무관심보다 노골적인 반항이 났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위해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시며 중보 하시는 주님을 외롭게 홀로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내 일, 내 바쁜 시간에 쫓겨 우리 주님을 바라볼 시간을 점점 줄여 가지 마십시오. 삶을 고백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내 남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임을 다시 한 번 명심 하시고, 문 밖에서 서 계신 주님이 아니라, 항상 열린 문으로 들어오시는 우리 주님을 기대하고, 만나고,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시는 00교회의 모든 성도 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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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하고 무관심한 저희들의 나태한 신앙생활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사랑으로 질책하고 권면을 주신 데로,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도록, 온전한 회개와 올바른 신앙생활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와 늘 먹고 마시기를 원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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