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1) 요1:1-14, 살전5:4-11
어떤 부인이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서 10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꿈쩍도 안했습니다. 믿기는커녕 매일 술에 취하고 술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매일 술만 마셔도 문제인데 한밤중이 되면 그 술 취한 친구들을 다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술상을 차리라고 했습니다.
주부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그 때마다 불평한마디 안하고 그 시중을 다 들었습니다. 게다가 술상을 아주 잘 차려 내놓는 것입니다. 남편의 술친구들은 그런 부인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자기들 부인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텐데 이 부인은 불평 한마디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불평한마디 없이 그 시중을 다 하십니까?” 했더니 그때 그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위해서 10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전혀 듣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포기했습니다. 이제 나는 천국 갈 텐데 저 사람은 분명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평안하게 해 주려고 시중을 다 들어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맞았습니다.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주님을 믿고 영접한 자들은 이제 다시 심판 하시려고 오시는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며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이 부인처럼 가치관이 다르고, 소망하는 것이 다르고, 삶의 목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대강절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1.참 빛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사는 자들입니다.
복음서 본문 요1:9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참 빛’이라 했습니다. 그냥 빛이라 해도 될 텐데 ‘참 빛’이라 했습니다. 그 의미는 불완전한 것에 대하여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불완전한 것과 완전한 것을 대조시켜 볼 때,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거짓이 아니고 참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참되고 완전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두움을 밝히는 여러 가지 빛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밤이 되면 호롱불로 어두운 방을 밝혔습니다. 좀 넉넉한 집은 촛불을 켰습니다. 이러한 빛도 빛은 빛이지만 완전한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점점 발달하여 전기 불을 켰습니다. 얼마나 밝고 좋습니까. 온통 밤을 낮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빛들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호롱불이나 촛불에 비하면 전기불이 굉장히 밝지만 날이 밝아 동쪽으로부터 태양이 떠오르면 전기불은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처럼 태양에 비한다면 사람이 만든 빛은 지극히 불완전한 빛입니다. 극히 제한적인 공간만 밝힐 뿐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촛불이나 전기불로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온 천하를 삽시간에 완전하게 밝히고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태양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이 태양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은 영혼을 소생케 하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우리들의 삶을 승리의 길로 인도하는 참 빛이십니다. 우리들의 삶을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참 빛이십니다.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까지 인도하는 참 빛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지도 영접하지도 안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 각 사람에게 빛을 비추셨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췬 것이 아니라 믿고 영접한 각 사람에게 비추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 믿는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참 빛이 되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빛의 자녀가 됩니다. 이 참 빛이 가정에 들어오면 빛의 가정이 되고, 나라에 들어오면 빛의 나라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중세나 일제 강점기를 가리켜 암흑기라고 합니다. 문자대로의 의미는 빛이 없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타락한 시기, 절망의 시기, 희망이 없는 캄캄한 시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제 강점기만 암흑기였습니까? 참 빛이 비취지 않았던 우리나라의 옛 시대는 다 암흑기라 볼 수 있습니다.
백여 년 전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와서 40년간 복음을 전한 아치볼드 캄벨이라는 분이 당시 서울 장안의 암흑기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사람들이 여자를 천대하여 자기의 딸을 팔아먹고, 아내를 천대하여 거리에서 머리채를 끌고 다니고, 아내는 매를 맞고, 의사는 먹고 살기 위한 상술로 환자를 대하고 있으며, 문둥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소경과 거지들이 거리에 우글대는 서울 장안이다.”라고 했습니다.
캄벨 선교사의 글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와 같은 한국이 지금 변화를 받는데 그리스도의 빛이 비춰져서 그 땅에 밝은 빛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고, 사람들의 생활이 변하고, 열매가 맺히고, 사회가 달라지고 있다.”라고 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빛의 자녀로, 참 생명을 가지고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자들임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서신서 본문 살전 5:5에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참 빛이 되신 예수님 안에서 빛의 자녀가 된 성도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낮의 아들들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조금도 어두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요일1:5) 예수님도 성도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빛 되신 주님을 만나고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엡5:8,9) 바울도 전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그 때 태양보다 더 강렬한 빛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 그에게 사로잡힐 때에 빛의 자녀가 되었고 충실한 빛의 전달자가 되어 살다가 위대한 믿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시작할 때와 끝날 때가 있는 것처럼, 사람도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때가 있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때가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 자신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종말의 징조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도, 종말이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종말에 대한 준비 없이 어두움에 속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히 9:27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죽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그 때 후회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어두움을 버리고 묵은 땅을 갈아엎듯이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해야 합니다. 묵은 땅은 본래는 좋고 부드러운 땅인데 쟁기로 갈거나 김도 매지 않은 채 오래 내버려두어 땅이 굳어지고 잡초가 성한 밭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햇빛과 때때로 적셔주는 좋은 비를 받지만 묵은 땅은 거기에 대한 보답이 없는 쓸데없는 땅이 됩니다. 여기서 나는 잡초의 씨들은 그 옆에 옥토가 있으면 날아와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잡초를 나게 만듭니다. 옥토의 마음을 가졌던 사람도 오랫동안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게 되면 그 마음이 굳어져 좋지 못한 습관이 생기고 그 뿌리가 깊어집니다. 즉, 세상 생각과 사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 이생의 자랑과 교만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묵은 밭과 같은 마음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마음속이나 그 생활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만 없는 것이 아니라 초신 자나 열심 있는 성도의 옥토와 같은 마음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묵은 땅은 예리한 보습으로 굳은 땅을 깨뜨리고 부드럽게 갈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속에 있는 나뿐 뿌리까지 뽑아서 불살라 버리고 새로운 옥토로 만든 후에 좋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깊이 박혀 있는 죄악의 뿌리를 뽑을 때 심한 고통이 따르듯 철저히 회개는 고통이 따르지만 근본적으로 마음이 변해야 소망이 있습니다. 오히려 묵은 땅이 은혜를 받게 되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모두 지체 말고 마음 밭을 개간하여 옥토가 되도록 힘씁시다.
3.빛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자들입니다.
서신서 본문 살전 5:10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했습니다. 성도는 빛 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자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의 교제를 나누며 삽니다. 생명의 교제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사람에게 흘러올 때에 그 생명을 받으므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귐이라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찾아와서 먼저 교제할 수 있는 구속의 일을 하시므로 사람이 그 생명을 받아 살게 되고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님은 성도와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셨는데, 포도나무 그루터기에서 오는 진액이 가지로 가는 것으로 나무에 본질적적인 열매가 나타나게 되는 것처럼 내 안에 주님의 성품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빛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와의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과학을 초월한 하나님의 영의 역사인 그 영원한 생명을 친히 받은 자 외에는 도저히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일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이란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란 자체는 보고 듣는 것으로써 알 수 없고 친히 그 생명을 받아 주님과의 사귐을 가진 자만이 아는 비밀이기도 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아치볼드 캄벨 선교사가 예수님의 참 빛을 받은 한국이 주님 안에서 변화된 그 실례를 이렇게 들고 있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오인호라고 하는 한국 유학생이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청운의 꿈을 품은 유학생으로 갔다가 너무 고향이 그립고 가족이 그리워 저녁에 식사를 마치고 편지를 부치려고 우체국으로 갔다가 그 동네 불량배들에게 붙잡혀서 매를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유학생이 죽은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의 가족들이 얼마나 원통했겠습니까? 원통한 마음 한이 없지만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못다 한 일을 대신 하겠다고 부모들은 각오를 하고 장례식에 참여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장례식에 참여하는데 필라델피아 시장이 너무 미안해했습니다. 유학생이 그것도 맞아 죽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서 여기저기서 성금을 모아 그 가족에게 위로금을 전했습니다. 이 가족들은 그 성금에다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더 보태서 재판소에 가있는 깡패들을 위한 변호사를 사서 그 깡패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원을 했습니다. 그들을 감옥에 보내지 말고 기독교 학교에 입학을 시키고 그들이 대학을 다 마칠 때까지 장학금을 지불하고 그들의 장래를 보장해 달라는 탄원서를 내고, 모든 조의금을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돌려주는 미담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그 어둠의 나라에서 온 한국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요?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빛이 원수까지 사랑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필라델피아 시민들이 이 소식을 신문을 통해 읽고, 감격해서 다시 성금을 보내오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돈으로 오인호 기념관을 필라델피아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필라델피아 한인교회가 최초로 설립되었고, 그 오인호 씨의 형님이 되는 목사님이 그곳에 가서 한인교회 최초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이 비춰지게 되면 이러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사랑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같은 빛의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대강절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참 빛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사는 자들입니다.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자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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