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이사야

섬김과 순종(사 53장1~6)

nam씨 2018. 12. 8. 16:44


대림절 - 섬김과 순종(531~6)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갈등의 연속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가족사회의 규범을 배우고, 이웃과 이웃을 알게 되고, 사회를 알게 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크고, 다양한 갈등들을 만나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사람들의 삶을 드려다 보면 인생을 살며 경험하는 온갖 갈등의 근거에는 어떤 권력의 욕심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경험하는 부부의 갈등, 부모와 자식의 갈등, 고부 갈등도 따지고 보면 누가 더 우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권력 갈등의 현상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사회에서 첨예한 대립으로 경험하는 노사 갈등, 여야 갈등, 계층의 갈등, 남북 이데올로기의 갈등, 모두 권력의 갈등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려는 세상의 지식인들과 사회 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가르침과 교훈을 제시하고, 공동체 훈련을 하라, 협동심을 가르처라, 위계와 질서를 바르게 하라,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성인이 될 때 까지 끝없이 가르치지만 역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지금도 갈등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실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그것이 이런 갈등의 세상에 섬김과 순종의 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오욕(汚辱))의 자리에서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만드시기 위해 섬김과 순종으로 그 사명을 다하신 분이셨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도덕적 지식의 가르침이나, 학문습득의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도 없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갈등을 해소하고 평강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이루신 방법이 가장 능력 있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아주 유일하고도 특별한 방법은 섬김과 순종이라는 방법이셨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는 우리들이 성육신하여 오신 하나님을 만나 주님께서 허락하신 탁월한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해 가는 우리 ◯◯◯교회 식구들 되시기를 축원해 드립니다.

 

1. 섬김의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삶을 삽니다.

2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갈등의 시작은 사람들이 자기 자아를 드러내고 싶어 하고, 자기의 자랑거리를 드러내고 싶어 하고, 자기의 어떤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하면서부터 갈등은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섬김과 순종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오신 모습을 이렇게 표현 한 것은 진정한 섬김의 사람의 모습이 바로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대림절을 지내며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 ◯◯교회 식구들 모두는 먼저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깊이 배우며 성탄을 맞이하시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기를 얼마 앞둔 시점(수난주간 직전)에서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자인가?”(22:24)라는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제자 중 라이벌이었던 야고보요한 형제가 서로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하는 갈등이 빚어졌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갈등을 넘어서서 섬김의 삶을 살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의 공동체가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마20:26-28절 말씀에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갈등해결의 비법을 하나 배우는 마음으로 함께 읽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섬김의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 섬김의 절정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십자가에서 내어 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범을 보이심으로 섬김의 교훈을 실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제자들의 주인과 스승으로서 친히 제자들에게 발을 씻김 받으셔야 마땅한 그분이 오히려 제자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시고 무릎을 꿇고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주님은 요한복음13:14-1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우리는 흔히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지체된 우리는 마땅히 우리 공동체의 머리되신 주님의 명령과 본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류는 수많은 유형의 리더십을 실험한 후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가장 건강한 리더십을 가르쳐 섬김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77로버트 그린리프(Robert Greenleaf)라는 그리스도인이 저술한 종의 리더십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다가 1996섬기는 지도자 되기”(On becoming a servant leader)라는 책이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오늘 날 전 세계 100대 기업의 약 절반은 사원들의 훈련과정에 종의 리더십을 가르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2천년전에 이런 섬김의 리더십을 가르치셨고 행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 최초의 완벽한 섬기는 리더”(Servant Leader)이셨습니다. 우리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주께서 친히 명하시고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리더의 모습은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왕의 모습은 자신의 능력이나, 힘을 드러내어 과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리더는 자신은 모르는 남들이 인정해 주는 인격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섬김의 삶이 도리어 '주요 선생'이 될 수 있었음을 가르치신 섬김의 왕 예수그리스도를 저와 우리 식구들 모두의 가슴에 새기고 주를 맞이하는 성도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2절을 한번더 읽고 가겠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2. 섬김의 사람은 고난 후에 영광이 있음을 압니다.

3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본문에서도 그리스도의 섬김의 삶의 모습을 잘 그려 놓고 있습니다. 섬김의 삶에는 멸시 받음과 버림받음과 간고와 같은 자기 깨어짐의 고난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의 고난을 견딜 수 있다면 성경은 섬기는 자들에게 영광을 분명히 약속하고 있음 입니다.

 

왜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섬기기를 싫어합니까?

섬김은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고난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알량한 자존심에 손상이 입혀지는 것 같고, 별것 아닌 인격이 추락하는 것 같은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섬김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보편적인 실망이 있다면 섬김의 보상이 빨리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노력의 대가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좌절하고 원망하고 포기합니다.

여기서 마20:23절 말씀을 함께 읽으셔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약속된 영광을 분명하게 암시해 주고 계십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에게 허락된 보상은 예수님이 임의로 주시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섬김의 결과에 따라 아버지가 알아서 주실 것입니다.

바로 그런 뜻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지금은 묵묵히 고난을 견디고 섬기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도 먼저 섬기셨습니다.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섬기셨습니다.

그 후에 그는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마다 먼저 섬겨야 합니다.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섬김은 땀 흘림이요 희생이요 헌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자기 버림의 고난을,

자존심 포기의 아픔을,

이기주의 포기의 잔을 든 후에야 영광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먼저 섬기는 것을 쉽지 않게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사고방식의 뿌리가 우리 한국 사회의 유교적 정신에 뿌리 내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교는 이런 계급 지향적인 혹은 권력 지향적 문화를 만들어온 요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모인 곳에서 누가 높은가를 결정해야 그 다음 교제가 성립합니다.

 

보십시오. 우린 만나면 제일 먼저 뭘 하나요?

나이 따지고, 입사 연한, 학교 선후배 가리고는 이야기를 터 나갑니다. 여기 배후에는 이런 숨겨진 권력 욕구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웃 사람과 아래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옛날 초대 선교사들이 본국에 보내는 편지에 심지어 한국인은 살고 있는 방에도 계급이 있다고 적습니다. 안방, 윗방, 사랑방.....,

방에서도 상석은 아랫목, 하석은 윗목, 사랑방은 하인이나 머슴이 기거하는 방........

 

심지어 우리는 인체도 차별하여 존두 사상을 발전시킵니다.

그래서 머리는 윗사람, 혹은 권위를 상징하고, 반면에 발가락은 천시합니다. 그래서 좀 어리수굿하던지, 자기 맘에 안 들던지, 천박한듯 보이는 사람에게는 사정없이 '발가락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치부합니다.

 

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수 즉 오른손은 좋은 손이고 좌수 즉 왼손은 차별당합니다. 그래서 자식 낳으면 절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오른손잡이를 만들려고 엄청나게 애들을 썼습니다. 그리고 나쁜 사람은 좌익, 낮은 자리로 이동은 좌천하지 않습니까?

 

말의 구조에도 상대방의 높이에 따라 자신을 칭하는 호칭은 무수하게 변신합니다. , 본인, 소인, 불초 소생, 죄인, 임금 앞에서는 신, 임금은 짐이, 높은 스승 앞에서는 졸자, 복잡한 언어의 계급성과 차별성을 우리는 몸에 익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를 안 다니는 분들 보기에도 담임 목사가 화장실 청소 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 극히 타당성 있는 생각이리라 생각은 해 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사회가 변하려면 속히 섬김의 사람들이 많아 져야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민족의 계급 우선주의 적 체질의 개선이 이루어져야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는 더더욱 더 그렇습니다. 직분을 어떤 권위나, 권세로 생각하신다면 빨리 그 생각을 바꾸셔서 종의 자리에서 섬김의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진정한 섬김의 왕은 고난 후에 받을 영광을 확신하고 사는 사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를 깊이하면서 함께 읽으신 3절을 다시 읽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렇습니다. 남들이 나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더라도, 남들이 나를 멸시하더라도, 저들로 인해 질고를 겪는 고통이 있더라도 섬김의 자리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영광의 자리에 함께 하시는 우리교회와 우리 식구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섬김의 왕은 철저한 순종의 왕입니다.

5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진정한 순종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아니라, 지극히 나와 전혀 상관없는 그들을 위해 찔리시고, 상하시고, 징계를 받으심 이야 말로 진정한 순종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우리가 추구할 순종의 모습인줄 믿습니다.

성경에서 순종에 관한 말씀을 들라고 하면 사무엘상 1522절말씀을 종종 이야기 합니다. 함께 읽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여기서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심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히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사울의 범죄를 통해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신앙의 성숙이라는 것,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미련하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는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천국 영생, 전인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순종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사울과 다윗이라 말하지 않고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집은 대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불순종했고 다윗의 집은 대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 전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떠나지 않는 가정이 되고 싶습니까?

다윗의 집과 같이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잘 못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 순종을 못하고 어떤 때는 다가오는 유혹이 너무 강렬해서 순종을 못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생각해서 순종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떠한 불순종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를 엄청난 재앙으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보다 똑똑합니까?

우리의 판단이 하나님보다 더 낫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이전에 이제까지 내 판단대로 살아왔잖아요. 내 잘 도는 머리, 내 좋은 판단, 나의 종합적인 분석, 그래 가지고 아직도 거기에 머물고 있다면 두 손 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 내 이성이나 내 경험의 판단을 가지고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들, 그런 것들을 미련하게 믿고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순종안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18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를 증거 할 때를 보십시오.

세상에서 제일 미련해 보이는 것이 설교하는 것 즉 십자가의 도를 증거 하는 것 아닙니까?

세상의 똑똑한 사람들이 3040분 증거 하는 말씀에 인생이 변화될 것 같습니까? 이것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분명히 미련해 보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내 머리 써 가지고 접근하는 것 가지고는 사람들이 변화가 안 되는데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라는 그대로 증거 하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 삶의 고난 가운데서 굉장히 영리하고 판단을 잘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윗의 매순간의 시점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다윗만큼 미련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미련하게 믿은 사람입니다.

거인 골리앗이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판단을 하지요. ‘전력(전력)적으로 상대가 되느냐저 같으면 뒤에 가서 기습공격을 하든지 해야 된다이렇게 판단할 것 같은데 다윗은 거인 골리앗 앞에서 미련하게 하나님의 능력만을 믿고 나가잖아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그것이 작은 것입니까?

 

칼이 만만한 것입니까? 게다가 골리앗이 들고 있는 칼이 만만한 칼입니까? 무지 큰 칼이었겠지요? 그런 것을 들고 있을 때에 칼과 창과 단창, 얼마나 무장을 많이 했는지 그것이 만만한 것입니까?

그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미련하게 나가잖아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귀하게쓰시고 그것을 통해서 승리를주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대적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여러 번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정말 미련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내가 죽일 수 없다고 하고 놓아주잖아요. 미련하지요. 지내놓고 보면 어차피 죽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정말 미련하게 믿었지요. 미련하게……

 

저는 다윗의 삶의 강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매순간마다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상식과는 관계없이, 사람들의 판단과는 관계없이 말씀이라고 하면 무조건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다윗의 삶을 한마디로 묘사한다고 하면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갈등해결의 최선의 방법을 대림절에 오시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이십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행복합니다.

 

1. 섬김의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삶을 삽니다.

2. 섬김의 사람은 고난 후에 영광이 있음을 압니다.

3. 섬김의 왕은 철저한 순종의 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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