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왕 예수 (사 9:1-4)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복된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 가정에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에 “위대한 왕 예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왕의 리더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앞두고 일본이 러시아와 비슷한 지형과 기후를 가진 일본 하꼬다산을 정복하는 모의훈련을 실시하면서 여러 가지 위기상황을 조장하면서 리더쉽을 실험해 보았습니다. 거기에 참여한 부대는 민주적 리더가 이끄는 부대, 독재형 리더가 이끄는 부대, 우유부단한 리더가 이끄는 부대, 방임형 리더가 이끄는 부대 등 4가지 부대였습니다.
그 결과 가장 실적이 나쁜 부대는 갈팡질팡하는 우유부단한 리더가 이끄는 부대였고, 다음은 알아서 하자는 방임형, 그 다음은 민주형이었고 가장 훌륭한 결과를 도출한 부대는 독재형이었습니다. 군대는 그만큼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정밀한 실험에서는 리더의 독재가 70%, 민주가 30%쯤 혼합된 부대가 위기상황에서 가장 훌륭한 실적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지휘자가 아닌 30%에도 좋은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리더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교훈입니다. 만약 인간의 최고의 두뇌를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 효과는 더 높아질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리더쉽 관점에서 볼 때 성탄이란 전지전능한 최고의 리더가 오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왕이 오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오신다면 우리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럼 주님이 리더이실 때 어떤 행복이 옵니까?
1. 마음의 고통과 흑암이 사라집니다.
1절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처럼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 종교적 여러 면에서 흑암 가운데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치하에 있었습니다. ‘팍스로마나’라 해서 기원전 1세기 말에 아우구스투스가 내란을 수습하고 제정을 수립한 때부터 약 200년간 지속된 로마의 평화를 말합니다.
이때에 로마는 이민족의 침입도 없고 국내의 치안도 확립되어 평화로운 로마의 황금시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의 평화는 상대적으로 유대에 있어서는 절망이었습니다. 원수의 나라가 창성을 계속해 나가니 절망이 아니겠습니까? 대항해 봐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모든 귀한 것은 로마에 빼앗기고 그 지배를 받는 삶은 고달프기만 했습니다.
더구나 로마는 황제숭배를 강요하고 종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정신 차려 하나님을 섬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뿐 아니라 외식하여 타락했습니다. 겉모양은 있었지만 신앙이 없었습니다. 정치는 어려워도 신앙인이 깨어 있다면 희망이 있지만 그마저도 없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리 봐도 절망, 저리 보도 절망, 소망이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배경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문제 뿐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오셔서 다스려주시면 그 어둠은 사라지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엡5:14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먼저 창조하신 것은 빛이었습니다. 빛의 온기가 비쳐질 때 진자와 만물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창1:2-4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다스리시면 고통과 흑암이 사라집니다.
2. 주님이 다스리시면 멸시와 천대가 사라집니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여기 스블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 북부지방을 말합니다. 그리고 해변 길과 갈릴리는 갈릴리 바다 해안지역과 갈릴리를 가리키는데 주로 이방인들이 사는 집단거주지였습니다.
왕하15:29에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했듯이 그 지역은 앗수르에 당하고 바벨론에 당하여 사람들은 이방으로 옮겨지고 대신 이방인들이 와서 살게 되어 혼혈지역이 되고 맙니다.
그 뿐 아니라 종교도 혼합되어 사마리아 종교라는 사이비종교가 됩니다. 여기에 대해 왕하17:33-34에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그들이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령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는도다.” 했습니다.
거기다 기원 전 63년 사마리아는 로마에 의해 시리아와 병합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갈릴리나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멸시 받는 지역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한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지역도 미워하지 않으시고 메시아 사역의 주 무대가 되게 하셨고, 예수님의 제2의 고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마4:12-16에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우리나라로 보면 호남이 갈릴리입니다. 역사에서 보면 이곳은 대대로 조정에서 정적들에게 내려진 귀향살이의 땅이었고, 일본의 침입도 가장 많이 받았고, 625사변 시에도 가장 많은 민간인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근대에 와서 경제개발에서도 밀려나 호남인들은 전국에 흩어져 타향살이를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호남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호남이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습니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다른 지역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지만 분석해 보면 그 안에 호남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한국이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있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갈릴리 사람들이 세계를 복음화시킨 것처럼 호남이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연단이요 시련이었다고 생각하고, 피해의식보다 넉넉한 아량과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애국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 잘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더욱 호남을 아름답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그래서 시113:1-9에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 도다.” 찬양합니다. 멸시와 천대가 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3. 주님이 다스리시면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십니다.
3-4절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여기 주님의 나라의 즐거움을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왜 미디안의 날에 비유할까요? 기드온 군대가 미디안 13만 5천의 군대를 무찌를 때 그 전리품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미디안 군대는 자기 가족과 짐승까지 다 끌고 와서 전쟁하기 때문에 당할 때는 곡식 한 되 풀 한 포기까지도 빼앗기지만 반대로 그들을 이길 때 전리품이란 상상을 초월합니다. 한 나라 전체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즐거움을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4:7-8에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베드로도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끝나는 줄 아는데 구원의 서정에서 보면 한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았으나 더욱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으로 가득차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 안에서 자라시기 바랍니다.
잭 하일스는 말하기를 “텔레비전은 하루 세 시간씩 보지만 성경은 단 5분도 읽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늘 동행하던 그리스도인만큼 천국이 즐거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햄버거 가게에서 한 시간씩 수다를 떨지만 잠자기 전에 드리는 기도는 10분이 넘지 않는 그리스도인, 낚시 갈 때는 해도 뜨기 전에 벌떡 일어나면서 새벽 기도라고는 한 번도 드려본 적 없는 그리스도인, 운동경기는 빗속에서도 끝까지 구경하면서 주일날 비가 오면 집 밖에 나가지도 않는 그리스도인, 인색하여 하나님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감추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던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똑같이 가지고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주신 것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주님의 성탄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고, 또 중요한 것은 그 사실에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며, 또 중요한 것은 이 성탄의 역사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마음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진정한 리더로 임하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경외하고 사랑함으로 그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고통과 흑암, 멸시와 천대,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구약 > 이사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룩한 길 사35장1-10 (0) | 2018.09.29 |
---|---|
예수 나를 위하여 (사 53:4-6) (0) | 2018.03.24 |
역사가 일어나는 기도사38:1-8 (0) | 2017.10.12 |
이사야66장: 하나님의 심판 (0) | 2017.07.15 |
이사야65장: 하나님의 심판, 새 하늘과 새 땅 (0) | 2017.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