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로마서

예수로 옷 입자 (롬 13장11-14)

nam씨 2017. 12. 30. 21:48


예수로 옷 입자 (1311-14)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비록 로마는 타락하고 방탕에 빠졌지만 로마에 사는 교회 성도들은 빛 된 삶, 그러니까 빛의 갑옷을 입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삶을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높은 벼슬을 하던 사람이 그만두면 '옷을 벗었다'고 표현합니다. 꼭꼭 마음을 숨기는 사람에게 흔히 '가면을 벗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류의 가장 먼저 벗은 자가 누구인가? 아담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벗은 것이 부끄러워 숲 속에 몸을 감추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우고 있을 때 하나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이때부터 죄를 지은 인간은 육신을 가리 울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옷은 죄의 옷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하십니다.

 

빛의 자녀들은 예수로 옷 입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14).

 

여기 '도모한다'는 말은 '미리''생각함'의 합성어로써 이것은 곧 정욕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이것만을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 '육신의 일'12절에서 '어두움의 일'이라고 증거 하면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방탕과 술 취함입니다(13) 술 취함은 방탕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5: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도가 입에 술을 대는 것은 방탕으로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1. 옷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예수로 옷 입는다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습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습니다. 의사나 간호원은 흰 가운을 입습니다. 경찰은 경찰복을 입습니다. 이처럼 옷은 사람의 신분을 짐작케 함과 동시에 민족이나 국적을 짐작해 하기도 합니다. 기모노를 입고 있으면 분명히 일본 사람일 것이고, 아오자이를 입고 있으면 분명히 중국 사람일 것이고, 한복을 입고 있으면 그 사람은 분명히 한국 사람일 것입니다. 이처럼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예수로 믿고 사는 크리스천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산다는 뜻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성도다. 목사다, 장로다. 권사다. 집사다'라고 어떤 상황에서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을 숨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장된 성도요, 무늬만 가진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확실히 드러내 놓고 잘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옷은 품위를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산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위를 지니고 그 품위를 드러내고 산다는 뜻입니다. 사실 입고 있는 옷을 보아서 그 사람의 인격이나 품위, 교양이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옷차림이 단정하면 어딘지 모르게 교양 있게 보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끼가 있어 보이고 허세가 있어 보입니다. 사람은 겉치레보다는 그 사람의 인격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벧전3;3절 이하에서 경고하기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겉모습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 속사람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을 보시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고 아름답고 정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세인들을 향하여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의 겉과 속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23:27'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또 어느 곳이든 간에 다소 능력이 부족하게 보이거나 좀 바보스럽게, 좀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그래도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야! 정직하고 참 진실해!'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또 큰 힘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저 사람은 믿을 수가 없어, 겉과 속이 달라! 진실하지 못해!'이 정도가 된다면 이미 그 사람은 인격파탄에 이른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로 옷 입고, 빛의 갑옷을 입고 사는 자들이기에 겉과 속이 같아야 합니다. 사람 중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들입니다. 바울은 오늘 예수를 믿고 사는 우리를 향하여 '예수로 옷 입고 살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정직하게 바르게 성실하게 살라는 권면인 줄 믿습니다.

 

옷은 보호의 수단입니다.

예수로 옷 입고 산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보호자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옷은 우리의 몸을 보호해 줍니다.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 인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털옷을 입고, 털모자를 쓰고 털신을 신고 다닌답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의 유래는 창3장에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하나님이 절대로 보지도, 먹지도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따먹고 나서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었는가? 아닙니다. 눈이 밝아졌는데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그들의 발가벗은 수치였습니다. 그래서 그 수치를 감추기 위해 나무 잎을 엮어 몸에 걸쳤습니다. 그러나 그 옷은 해가 뜨면 말라 비틀어져 수치가 다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므로 그들의 수치가 가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옷을 입게 되었는데 그 옷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유행에 유행을 거듭해서 현대는 우리가 하이 패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 아무리 디자인이 좋고 색상이 좋고 원단이 좋다 할지라도 세월이 가면 낡아지고 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에 보호수단으로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낡아지고 없어지고 내 곁을 떠날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의지하며 사는 재물도 권력도 명예도 인기도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날이 오고야 맙니다.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는 영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은 무엇인가? 삼하22:2-3'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바울 사도의 고백은 무엇인가? 고후4:8-9'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내 속에 예수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십자가의 군병들입니다. 군인이 군복을 입고 전쟁터에 나가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서 세상에서 선한 싸움에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옷을 입는 데는 몇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외부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이러한 옷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낡아지고 떨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입혀 준 그리스도의 옷만이 우리가 입을 영원한 옷입니다.

2. 그러면 그리스도가 입혀 준 옷은 어떤 옷인가?

 

속죄의 옷입니다.

3: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범죄 한 아담이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가리우기 위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옷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피 묻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바로 이 옷은 주님이 우리의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우기 위하여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그 옷을 벗겨 우리에게 속죄의 옷을 갈보리에서 입혀 주신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추한 죄인이라도 주님이 주신 피 묻은 옷을 입기만 하면 허물과 죄에서 가리움을 받게 됩니다.

 

온유와 겸손의 옷입니다.

11:28'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도 종의 형체를 입고 구유에 누우신 몸으로 오셨습니다. 일생동안 머리 둘 곳이 없는 몸으로 구원사역을 행하셨으며, 최후에는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겸손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사역에서 이러한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응답을 받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22: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영화(영광)의 옷입니다.

15: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탕자는 아비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 방탕하여 굶어서 주려 죽는 돼지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갈라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이웃을 불러 잔치한 것입니다. 우리가 후일에 천국에 가서 이러한 영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입을 옷은 형언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옷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이 보입니까?

 

예수 사랑, 이웃 사랑의 실천자가 됩니다.

바울은 고전13:4-7절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섬김의 사람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섬김의 삶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주의 종들을 섬기고 직분 자들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어린 사람들을 섬기는 생활입니다. 예수님도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20: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빛의 갑옷을 입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사는 거룩한 십자가의 군병들입니다. 이제 육신적인 일을 도모하지 맙시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육신 적인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3:7-9). 그리고 종말의 때를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을 입으라고 했습니다(6:10-20). 칼빈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것 같은 엄숙한 태도로 살아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