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나무 같은 키 (아7:6-9)
= 장성한 성도 =
요 약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성도의 특징은 예수님을 닮은 장성한 분량이 있으며, 말씀을 풍성히 깨달음과 전함이 있고, 복음에 견고히 서서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의 권세를 믿음으로 누리며, 행함의 믿음과 수고의 사랑이 있어 주님을 가까이 하고, 성령 충만 영위가 가능하도록 강한 기도의 생활이 있으며, 회개하여 변화되는 삶이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임재 의식과 내세의 소망을 경험하며 기뻐하며 사는 것이다.
설 명
1. 배 경
⇒ 남편을 만족시키는 술람미가 나타나 있다.
2. 적 용
(진단) 첫 사랑의 때보다 행복감이 못하시나요?
(해결) 묵은 포도주가 더 좋듯 인격적인 사랑으로 발전하십시오.
3. 아내의 테크닉
6절 “사랑아 네가 어찌 …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 아내의 테크닉은 남편 일방일 때보다 배가의 만족을 준다(창2:25).
4. 장성한 그리스도인이란?
1)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7절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 전체를 볼 수 있는 상위체위의 시각성을 암시한다.
2) 말씀을 깨닫는 삶
7절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 상위체위와 그 때 유방에 대한 시각적 촉감적 만족이다.
3) 복음에 견고히 섬
8절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 하위에서 팔과 다리로 포옹함이다.
4) 믿음과 사랑
8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 상위에서 남편에게 좋은 촉감을 선사하는 유방의 애무이다.
5) 강력한 기도 생활
8절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 오르가즘을 위해 애쓰는 아내의 거친 숨결을 뜻한다.
6) 회개로 변화 생활
9절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 진한 입맞춤을 추구하는 아내를 묘사함이다.
7) 임재의식 충만과 내세의 소망
9절 “이 포도주는 -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 입맞춤에서 오는 아내의 흥분상태와 남편의 원활함을 묘사함이다.
아가 7:6-9
6 (솔로몬)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7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8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9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술람미)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원 문
6 תיפי־המ 마 야피드(얼마나 아름답고)
תמענ־המו 우마 나아므트(얼마나 만족스러운지) הבהא 아하바(사랑하는 자여)
םיגונעתב 밭타아누김(유쾌한 여인이여)
7 ךתמוק יאז 조트 코마테크(이러한 너의 키는)
התמד 다므타(흡사하도다) רמתל 레타마르(종려나무와)
ךידשׁו 웨솨다이크(그리고 너의 가슴은)
תולכשׁאל 레아쉬콜로트(송이와 (같도다)) 8 יתרמא 아말티(내가 말했도다)
רמתב הלעא 에엘레 베타마르(내가 종려나무로 올라가서)
הזחא 오하자(잡으리라) וינסנסב 베사느신나우(그것의 가지를)
אנ־ויהיו 웨이흐유 나(그리고) ךידשׁ 솨다이크(네 가슴(유방)은)
ןפגה תולכשׁאכ 케에쉬켈로트 학게펜(포도송이와 같도다)
ךפא הירו 웨레아흐 앞페크(네 숨결은)
םיחופתכ 캍타푸힘(사과(냄새)와 같도다)
9 ךכחו 웨히케크(네 키스는) בושה ןייכ 케옌 핱토브(좋은 포도주와 같이)
דודל ךלוה 홀레크 레도디(내 사랑하는 자에게로 흘러가는도다)
םירשׁימל 레메솨림(부드럽게) בבוד 도베브(천천히 흘러가는도다)
םינשׁי יתפשׂ 시프테 예쉐님(잠든 자의 입술로)
스 토 리
그러니까 왕후들의 칭찬은
남편에게 사랑을 독차지하기에 마땅한
술람미가 갖춘 여러 구비 조건들이었다.
왕후들의 칭찬에 이어
솔로몬 왕의 칭찬이 시작되었다.
그의 칭찬은 남편의 의중을 알아 이끌어 가는
그녀의 재치 있는 상위체위의 변화성 있는 테크닉은
환상적인 쾌락을 주는 것이라 했다.
즉 상위체위에서 보여주는 종려나무 같이 늘씬한 몸매이며
종려나무의 열매와 같이 탐스럽고
포도송이 같은 촉감의 그 유방이며
콧김을 품어대며 오르가즘을 위한 열망
그리고 그 달콤함에 뗄 줄 모르는 그 깊은 입맞춤 …
솔로몬의 말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술람미는 이 말을 얼른 빼앗아
이 깊은 입맞춤은 나의 신체에 신비로운 현상을 일으켜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움직임을 원활하게 한다고 하였다.
(강 해)
오늘 본문은 앞의 왕후들과 비빈들의 칭찬에 이어 남편인 솔로몬 왕의 술람미에 대한 칭찬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그러니까 왕후들의 칭찬은 남편에게 사랑을 독차지하기에 마땅한 술람미 왕후가 갖춘 여러 구비 조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번 솔로몬 왕의 칭찬은 전과는 달리 부부생활을 리드해 가는 술람미의 재치 있는 테크닉에 관한 것입니다. 즉 아내의 테크닉을 상위체위를 중심으로 여러 방향에서 소개합니다.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의 이러한 시도는 대단한 만족과 기쁨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본문 6절에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했습니다.
이 말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하는 말인데 이 칭찬은 아주 의미 깊은 칭찬입니다. 왜냐하면 6절의 화창하다 혹은 9절에 좋은 포도주 같다는 등의 표현은 1:2-4과 1:16에서 전에 술람미가 솔로몬에 대해서 느꼈던 사랑의 감정이었는데 이제는 남편이 술람미에게 느끼는 감정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술람미의 사랑은 날로 성장합니다. 물론 육신의 부부는 누가 먼저라는 원칙이 없습니다. 엡 5장을 보면 22절에 아내들에게 먼저 교훈하는 것 같지만 33절을 보면 남편들에게 먼저 교훈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먼저여야 합니다. 그러나 아가서에는 남편의 사랑이 언제나 앞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보여주는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의도하는 바대로 사랑을 기초한 서로의 테크닉만이 만족을 배가시킵니다. 그래서 남편은 술람미가 이끌어 가는 부부생활의 만족을 노래합니다. 사실 술람미 왕후의 이 점이 다른 나라 공주 출신 왕후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들은 공주라는 특권으로 노동을 몰랐고 왕의 정한 산해진미를 먹고 자랐으며 여성에게 자유로움을 주지 않는 왕궁의 법도 아래 자라온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어 체력 저하와 비만과 수치심과 무지로 인해 부부생활을 상위체위에서 여러 테크닉을 발휘하며 리드해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노동으로 인한 체력 구비와 날씬한 몸매와 자유로움의 서민적인 성장 배경이 있었기에 도리어 남편이 원하는 아내상을 구비하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심히 만족한 솔로몬은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노래합니다. 이제 배우자의 의중 알고 만족하게 대해주는 수준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어찌 그리 화창한지”의 ‘화창한지’(םענ 나암)를 여러 번역 성경에서 ‘황홀케 하는’(NEB) ‘즐겁게 하는’(NIV) ‘매력적인’(JB) 등의 용어로 번역했고, G. L. Carr라는 학자는 이를 육체적인 아름다움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쾌락하게 하는구나”의 ‘쾌락하게 하는’(םיגונעת 타아누김)에 대해서 ‘애무’(Hengsyenberg)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고, ‘부부생활의 기쁨’ ‘사랑의 기쁨’(전2:8, 미1:16, G. L. Carr)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송이”를 애무로 보고(G. L. Carr) “콧김” 역시 부부생활의 강한 숨결을 묘사한 것으로 보았습니다(호크마 주석).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모두가 함께 만족하는 원만한 부부생활을 노래한 것입니다. 비로소 아내가 부부생활에 눈을 떴다고 할까요? 여자란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전에는 아내에게 있어서 부부생활이란 단순한 의무이거나 고통일 뿐입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서로의 만족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섬김이 어쩔 수 없는 의무감이거나 고통일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사신 사랑의 주님을 깨닫는다면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직 사랑 안에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장성하면 참으로 주님을 위해 사는 일이 나의 최고의 기쁨이요 만족이 되는 때가 오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지만 마지못해서 지는 것과 즐거움으로 지는 것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혹은 복음을 믿을 때 그냥 믿는 것과 기쁨으로 노래하며 믿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2:5) 했으면서도 다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2:6-7) 고 교훈함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처음 믿을 때의 그 예수요 우리가 믿은 그 복음은 처음 믿을 때 복음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사랑하며 순복하며 기뻐하며 이해하며 확신하느냐는 영적 성숙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골1:22-23에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우리의 마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럼, 주님을 만족시킬 성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1. 인격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합니다.
7절에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했습니다.
여기 ‘종려나무’(רמת 타마르)는 ‘대추야자’로 그 키가 20-30m 가량 되며 40년 후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해서 150년간 결실할 수 있는 장수목입니다(겔40:16, 왕상6:29, 레23:40). 종려나무의 특징은 곁가지가 없이 날씬하고 목질은 단단하며 꼭대기에 한 개의 직립의 가지가 있고 잎은 암녹색의 큰 깃 모양으로 크게 뻗쳐 있고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키가 종려나무 같다는 것은 키가 늘씬하다는 일반적인 의미와 함께 이 표현이 시사하는 바는 노출된 듯한 종려나무의 모양처럼 아내의 노출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부부생활에서 노출은 당연한데 왜 이런 표현이 나올까요? 그것은 상위체위에서 보여주는 아내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키라 함은 아내의 상위체위에서 몸매가 드러나는 시각적 만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종려나무에 비했다는 것은 술람미의 날씬한 몸매를 시사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술람미가 부부생활을 이끌어갑니다.
본래 종려나무는 사람을 닮은 인상적인 외양과 열매의 풍성함 때문에 번성과 번영(시92:12), 아름다움(아7:7-8)과 승리(요12:13, 계7:9)를 상징했습니다. 더구나 “종려나무”(רמת 타마르)는 여성 고유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의 상징입니다. 이 종려나무와 같다는 표현은 5:15의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다”는 남편의 노출된 상위 체위를 노래한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처럼 부부생활은 그 몸매를 서로가 보고 느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의복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부부의 침실 안에서 의복이 방해물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신령한 교훈은 종려나무와 같은 키처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함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심히 만족스럽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인격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야 합니다. 그래서 엡4:13에“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2. 성경을 묵상하고 깨달은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7절에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했습니다.
여기 그 열매송이란 종려나무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종려는 많은 열매송이로 가득합니다. 꼭 어릴 때 타던 회전그네처럼 축축 늘어진 수백의 줄기에 송이채 달린 둥그런 종려열매들이 장관을 이룹니다. 종려나무는 해마다 풍요로운 열매를 넉넉히 맺어 사람들을 기쁘게 합니다. 그 수확이란 수십 소쿠리가 되도록 많은 수확을 안겨다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열매를 수확하는 사람들의 손은 너무나도 보람되고 넉넉한 느낌으로 가득 찹니다. 그런데 아내의 유방이 이런 종려나무 열매송이와 같이 주렁주렁하려면 반드시 아내가 상위체위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 유방이 시각적으로 노출되고 남편의 손에 쉽게 만져질 수 있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종려나무 열매송이란 성경을 묵상하고 깨달아 전하는 삶입니다. 종려나무는 많은 꿀을 생산하는 특수한 나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마치 종려나무와 같이 온갖 진리의 송이로 가득합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삶이란 종려나무 열매처럼 보람되고 꿀 송이와 같이 답니다. 그래서 시19:7-10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했습니다. 이 진리를 전하는 보람이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습니다.
3. 높이 되신 예수 안의 복락을 성령으로 누려야 합니다.
8절에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라고 말합니다.
여기 종려나무 가지가 무엇일까요? ‘그 가지’(הנסנס 산사나)는 ‘꼭대기의 줄기’라는 뜻이 가르쳐 주듯 종려나무의 곁가지처럼 보이는 것은 잎일 뿐 종려나무는 전봇대처럼 몸통만 있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목처럼 윗 부분으로 뻗어 있는 한 개의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종려나무의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가지란 곧 목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는다란 하위체위에 있는 남편이 상위체위의 아내를 팔과 다리로서 목과 몸을 껴안는다는 뜻입니다. 이 테크닉은 부부가 함께 사용해도 좋은 방법입니다. 주석가 Matthew Henrysms 이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하나되는 깊은 교제로 보았습니다.
그럼 신령한 의미에서 종려나무의 가지란 무엇일까요? 본래 종려 가지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더구나 이 가지는 아슬아슬하게 높은 종려나무의 높은 맨 꼭대기의 가지입니다. 이는 높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리들이 잡힌바 되어 존재함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기도 전에 주님께서는 자기 안에 우리를 포함시켜 승리의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그 은혜로 앉혀진바 되었습니다. 이것이 종려나무의 가지인 우리들을(시92:12) 붙잡으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0) 했습니다. 이처럼 복음 안에서 보면 이미 잡혔습니다. 그러나 그 실재를 누리려면 그 사실을 믿을 뿐 아니라 성령의 적용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충만히 받는 은혜의 삶입니다. 그래서 높이 되신 예수 안의 천국의 복락을 누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4.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8절에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했습니다.
아까는 종려나무 열매와 같다고 하더니 이제는 포도송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아내를 결실한 포도나무에 비유한 곳이 있습니다(시128:3). 그리고 흔히 유방은 제 2의 성이라고 합니다. 이는 부부생활시 가슴에 느껴오는 유방의 촉감을 비유한 말입니다(Delitzsch). 그런데 앞에서는 손을 통한 유방의 촉감이었다면 이 번에는 유방을 통해 남편의 가슴에 느껴오는 촉감입니다. 이는 아내가 상위체위에서 있을 때 가능한 유방의 감촉입니다. 이처럼 술람미의 테크닉은 날로 적극적이고 발전합니다. 그 만큼 남편의 만족도 역시 높이만 갑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이는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풍성함을 가리킵니다. 성장하면 그제야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8:8에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한 것처럼 영적으로 어린 성도들은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헌신이 무엇인지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유방이 성장해야 이것을 통하여 청혼을 받게 되듯(아8:8) 믿음과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놀라운 복을 받게 됩니다(빌3:8-9). 성도는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께 가까이 하며 주님을 끌어들입니다. 그런데 상위체위가 상징하듯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에 머물지 않고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오직 주님을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엡3:17-19에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했습니다.
5. 강력한 기도 생활을 해야 합니다.
8절에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라 했습니다.
사과는 2:3에서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극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솔로몬이 술람미의 사랑을 사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만큼 술람미의 사랑이 남편을 만족케 할만큼 성숙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가서에서 사과(הופת 타푸아흐)의 용도는 시원케 함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사과의 열매가 그렇고 사과나무 그늘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콧김을 사과 냄새에 비유함은 아내의 강한 숨결을 은유한 것입니다(호크마주석). 전과는 달리 강한 숨결이란 아내의 부부생활의 적극성을 암시합니다. 즉 상위체위에서 오르가즘을 위해 애쓰는 아내의 거친 숨결입니다. 전에는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했듯 남편의 숨결만 거칠었지(4:16) 아내는 몸만 내어 맡긴 피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편이 얼굴에서 시원하게 느낄 수 있는 아내의 강하고 거친 숨결입니다. 이 숨결을 사과 냄새에 비유한 것을 보아 반가운 숨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령한 의미에서 강한 능력의 기도를 가리킵니다(Matthew Henry). 누구의 기도나 예수 이름의 기도이기에 권세는 동일하지만 그러나 기도자의 믿음에 따라 능력의 기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약5:16에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전과는 다른 강력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기도의 적극성은 막힌 부분도 터지고 막혔던 영적 교통도 가능하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되 적극적인 기도여야 합니다. 그래야 깊은 영적인 체험에 도달합니다.
6. 회개함으로 변화 생활을 해야 합니다.
9절에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 역시 1:2의 솔로몬과의 입맞춤을 포도주에 비유한 것처럼 본문은 술람미와의 입맞춤을 좋은 포도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술람미의 사랑이 이제 남편을 만족시키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여기 포도주는 보통 포도주가 아니라 좋은 포도주라고 했습니다. 요 2장에도 좋은 포도주와 낮은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좋은 포도주란 그 맛이 깊고 달콤할 뿐 아니라 마신 후에도 자꾸만 입맛을 다시게 만들고 추구하게 만듭니다. 이 말을 남편이 아내에게 했다는 점에서 진한 입맞춤을 추구하는 아내를 묘사함입니다. 남자보다 여자는 입맞춤에 강한 매력을 느낍니다.
이 입맞춤은 화해와 회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 예로 시2:12에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이처럼 날마다 자기를 씻어 희게 해야 합니다. 이 씻음은 술람미의 입맞춤처럼 점점 더 깊이 은혜에 세계로 빠져들게 합니다. 벧전3:21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내가 변화될 때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7.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충성해야 합니다.
9절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이 포도주에 대한 묘사가 신비롭습니다.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즉 입술의 좋은 포도주가 이제는 미끄럽게 아래로 흘러내리는 포도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입맞춤에서 오는 아내의 흥분 상태와 그 결과 남편의 움직임이 원활해짐을 묘사함입니다. 그러니까 9절 상 반절은 솔로몬의 말이고 하 반절은 앞의 솔로몬의 말을 술람미가 빼앗듯 받아서 한 말입니다(Wycliffe, Delitzsch, Lange, G. L. Carr, 아벤 에즈라, 상크티우스, 최클러, 여러 현대 주석가들). 그래서 우리 개역 성경에도 9절을 단락으로 끊어 놓았습니다. 즉 이것은 입맞춤으로 말미암는 아내의 심리적인 현상을 나타낸 말인데 이것을 솔로몬이 말하지 않고 당사자인 아내 스스로에게 말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내만이 아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창함은 서로가 만족스러움에 도달한 부부생활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참고로 아내는 입맞춤을 통해 성적인 흥분을 갖습니다. 그래서 입맞춤은 곧 바로 흥분으로 연결됩니다. 남자가 생각과 시각을 통하여 흥분한다면 여자는 피부 접촉과 입맞춤을 통하여 흥분되기 시작합니다.
그럼 신령한 의미에서 여기 포도주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기쁨 혹은 내세의 기쁨을 뜻합니다. 앞에서 입맞춤을 회개로 보았듯이 날마다 자기를 씻는 사람은 내세의 소망과 천국이 은혜가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계22:14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계22:15) 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이런 흉악한 죄악이 있다면 씻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세의 깊은 영광을 맛보며 살게 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삽시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 말씀을 깨닫고 전하며 복음에 서고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 되며 강력한 기도 생활과 회개의 성화 생활을 하십시다. 더 이상 소극적인 생활을 버리고 적극적인 믿음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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