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 천사의 나팔 3 (계 11:16)
16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 시간에 “일곱째 천사의 나팔”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일곱째 천사의 나팔이란 문자적으로는 재림의 나팔을 의미하고, 영적으로는 마치 베드로가 오순절 날 말씀을 전할 때 듣던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회개할 뿐 아니라 완성된 믿음으로 성장시켜 주는 완전한 나팔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나팔은 장차 들려와야 하고 지금도 우리에게 들려져야 할 나팔입니다. 그리고 이 나팔을 위해 기도하고 성경 보며, 나아가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영국 스퍼전 목사의 강해를 보면 분량이 많고 딱딱하기 그지 없지만 설교의 왕자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그가 목회하는 교회 성도들이 지하실에 가득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나팔소리가 얼마나 놀라운지 15절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사탄이 다스리던 세상 나라를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버립니다.
그토록 악의 세력에게 동조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대적하던 사람들이 오순절 날 베드로가 부는 이 나팔소리 듣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경배하며 죽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해야지 베드로의 메시지를 그대로 따라 읽는다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을 바라볼 때 얼마나 기도 많이 해야 할 때입니까? 종교적으로 이단 적그리스도 거짓선지자 이방종교의 위협은 날로 심해가고, 국가적으로는 안보 위기에 있는데 나라 무너지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정치적으로는 소돔과 고모라의 관원들이 많습니다. 관원이 잘못되면 사회를 그렇게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서울시에서는 시장이 앞장서서 동성애축제를 벌이고 이게 소돔의 관원입니다.
이 악한 세상의 희망은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임하셔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도록 다스려 주시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복음의 나팔을 불 수 있는 하나님의 종 몇 명만 있어도 이 지경까지는 가진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의 나팔소리 앞에 어떤 일이 있을까요?
1. 하나님 앞에 순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6절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24장로들이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여기 엎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왕으로 모시고 절대 순복과 겸손과 경외를 의미합니다. 옛날에 왕 앞에는 그렇게 엎드렸습니다. 절대 다스림을 받겠다는 표시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참으로 높고 귀한 위치입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말씀이 바로 24장로입니다. 여기 24장로가 누굴까요? 24장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들로서 그러니까 그들이 앉은 자리는 곧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입니다. 엡2:6에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했습니다.
성도는 그렇게 존귀하고 놀라운 복을 받은 자들이지만 그 놀라운 권세를 누리는 사람도 있지만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엎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나님이 다스려주시고 또 권세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엎드리지 않는 것은 아직 은혜의 말씀의 맛을 아직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강력한 성령의 은혜로 말씀이 다가오면 어떤 완악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울 같은 완악한 사람도 라마나욧에 가깝게 가자 성령에 감동되어 걸어가면서 예언하고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하고 예언자처럼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워있었습니다(삼상 19장).
그런데 여기 사울의 예언은 여기 쓰인 예언이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라기보다 성령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웠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나팔’ “엎드러지다.”는 뜻인데 황홀경에 빠져 쓰러져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2. 은혜의 나팔에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4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댔습니다. 얼굴은 인격을 대표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땅은 흙으로 낮고 천함의 상징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모습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모습의 극치가 땅에 얼굴을 대는 것입니다. 성경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회개할 때도 있었습니다.
왕이 지나갈 때 백성들이 엎드리지 않으면 왕을 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발견 되면 그는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얼굴이 땅에 닿게 엎드려야 합니다. 모르드개가 엎드리지 않았다고 하만이 모르드개와 그의 속한 유다 민족까지 다 죽이려고 했지 않습니까? 이처럼 왕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팔소리가 들리니 24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들리면 나는 사라지고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살면 죽어요.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하나님만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나는 쇠하여야겠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
그런 은혜가 있었기에 사도 바울도 빌1:20-21에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백했습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모르니까 방자히 행하지 말씀을 안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3. 은혜의 나팔에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곱째 천사의 나팔에 장로들이“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찬송하게 됩니다. 모든 믿음의 기초는 말씀입니다. 찬송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나옵니다. 믿음도 말씀을 보고 들어야 생깁니다. 기도도 말씀을 봐야 나옵니다. 감사도 그렇습니다.
말씀이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천지 창조도 말씀이 먼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들어야 합니다. 말씀 충만하면 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기본이니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야들에게 목자의 음성을 들려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요10:3-5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여기 목자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말은 사람이 하지만 성령의 은혜가 역사하면 예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떠나지 않더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의 음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가 이 목자의 음성을 들려주지 못하기 때문이지 예수님의 음성을 좋아하지 않는 양은 없습니다. 나팔소리 앞에 24장로 모두 엎드려 경배했지 그 중 한 두 명은 반대한 것 아닙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도 어떤 혼란스런 교회도 예수님의 음성만 된다면 다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의 부흥이 이 시대에 또 다시 올 수 있는가? 또 다시 올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부흥’이라는 책에서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이 파묻어 버린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파는 데서부터 성공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흉년 든 사막에서 이삭은 다른 곳으로 우물 파러 찾아다니지 않고 아버지가 팠던 그 우물의 흔적만 찾아 팠던 것입니다. 그러자 거기서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부흥도 옛날 사도들이 했던 그대로 다시 하면 됩니다. 그동안 세상 블레셋이 침투하여 방치되고 파묻어버린 말씀운동 기도운동 회개운동을 다시 일으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운동을 다시 일으키는 것입니다. 기독교역사상 부흥의 비결은 동일했습니다. 말씀이 되살아났을 때, 기도했을 때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의 공식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그래서 호6:3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임하시고 또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재림의 예수님도 일곱째 나팔을 통해 임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도 예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더 깊이 다가오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온전한 주의 음성, 나팔소리를 듣고 24장로처럼 온전히 하나님 앞에 순복하고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위하는 참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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