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사는사람 (느헤미야1:3-5)

 

알렉산더 대왕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후, 자신을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참모들에게 소원하는 바를 한가지씩 들어주겠다 했습니다. 전쟁에 지친 참모들은 편히 쉴 수 있는 휴가와 고향을 방문할 경비 등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또 집 한 채 마련해 줄 것을 희망하기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 데닉이라는 참모는 대왕이시여, 대왕이 정복하신 나라들 중에 하나를 내게 허락하여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뜻밖의 당돌한 제안에 다른 참모들은 놀랐습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조금 움찔했으나 곧이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라 하나를 그대에게 주겠소. 그대는 나 알렉산더가 나라 하나라도 뚝 떼어줄 수 있을 만한 큰 사람으로 믿었기에 호의를 베푸는 바이오.”

믿음은 삶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믿음은 거세게 밀려오는 운명에 맞설 힘을 주는 창조적인 에너지입니다. 자기 운명과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당대에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느헤미야가 여러 사람의 방해를 실패로 만들고 불가능 했던 예루살렘 성을 52일만에 쌓을 수 있었던 힘, 그리고 건축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도덕적 역사적 흐름을 바꿀 수 있었던 힘도 믿음에서 나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느헤미야 믿음의 특징은 하나님을 믿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믿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첫째 느헤미야가 믿었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었습니다.

5절 처음 부분,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이여라는 기도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뜻은 물질적이고 인간적인 신과 구별되는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을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며 인간사를 섭리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비단 느헤미야의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고백이었습니다.

신명기 721절에 보면, 가나안을 정복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민족이 보기에 가나안 족속들은 크고 강대해 도무지 그 땅을 정복할만한 힘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일깨워 주십니다.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운 여호와가 너의 중에 계시는도다. 이스라엘 민족은 곧 힘과 용기를 얻어 하나님을 믿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파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허황된 꿈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들이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과 800마일이나 떨어져 있었고 도와줄 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엿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아야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외면당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생각을 넘어선 하나님, 자신의 물질을 넘어선 하나님, 자신의 지혜를 넘어서는 하나님, 천지를 주관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냅니다. 그래서 느혜미야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앞에 닥친 문제가 아무리 크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능히 해결하실 수 있음을 믿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무너진 채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다시 설 힘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느헤미야처럼 절망할 순간에 그 일을 능히 감당할 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가 아무리 크고 해결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이 문제보다 크시고, 능히 다스리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만 변함 없다면 문제는 더 이상 크지 않습니다.

태풍 가운데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베드로는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를 명하여 물위를 걷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 속에는 자연을 통치하시는 전지전능의 신, 베드로를 명하여 인생의 물위를 걷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물 위를 걸으라 하셨을 때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좀 전까지만 해도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던 베드로는 태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태풍이 크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물 위를 걸어갈 수 없었습니다. 파도가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시선에서 떠나버리기 시작했을 때 물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문제가 커서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이 문제입니다. 만약 인간의 한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이라면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하나님은 사귐과 이해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을 뛰어 넘는 하나님, 절박한 문제 앞에서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계시는 지혜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시 찾는다면, 오늘 느헤미야에게 있었던 기적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믿음으로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둘째로, 느헤미야는 약속을 지키시는언약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에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삶의 환경만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고 삶을 영위할 만한 힘도 없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 하나님 주신 약속을 붙들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약속은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라는 사실, 한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 느헤미야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가 강렬하게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바벨론에게 빼앗겨버리고 어려움은 당함는 것은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겪는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다시 회복한다면 원래 모습을 회복시켜 주시리라 믿고 간구합니다.

신명기 7장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 죄 가운데 두지 않고 하나님 자녀 삼으셔서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도행전 239절에서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여기에 있는 약속의 대상에는 저와 여러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은 누구든지 주를 붙들고 의지하며 주께 나아가는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베드로는 약속대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약속대로 하나님께 다시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죄, 어떤 절망, 어떤 필요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구원의 약속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희망입니다. 성도들은 절망에 바지지 않고 낙심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낙심되고 절망가운데 처할때ㅑ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일어서는 사람들입니다

존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을 보면 그리스도인과 희망이라는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절망이라는 거인에게 잡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인이 두 사람을 잡아다가 의혹의 성 깊은 지하실에 가두어 버립니다. 빠져나갈 길 없는 막막한 현실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인이 가슴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냅니다. 바로 약속이라는 열쇠였습니다. 시험 삼아 육중한 문을 열어보니 문이 열립니다. 그가 의혹의 성을 통과할 때마다 이 열쇠는 나아갈 길을 만들어 주었고 결국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거인은 그만 분노로 발작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견고하게 닫혀 열 수 없는 절망의 성 앞에서 의심하며 낙심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약속을 믿고 주장하며 약속대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희망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 약속이 이행될 것을 믿고 담대하게 기도하는 느헤미야처럼 어려운 현실,답답한 현실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다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느헤미야는 긍휼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에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나라를 빼앗겨버렸고 수도예루살렘은 황폐케되어 들짐승들이 사납게 울부짖는 폐허가된 성입니다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백성들은 기아와 빈곤으로 강제동원된 억압과 착취속에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원망을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탄식하고 낙심에 바져버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문제를 구경만 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아파하시고 동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백을 하고 잇습니다. NLT 영어성경에 긍휼의 하나님을 ‘Unfailing Love’(언 파일링 러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Unfailing’없어지지 않는, 끝없는, 변하지 않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확실한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 사랑,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기대해도 어긋남이 없는 확실한 사랑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나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었던 표현으로12번 나오는데, ‘긍휼로 마음을 움직여서라는 뜻인 스프랑크 니조마이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스프랑크라는 말은 내장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의 내장 속에 감정의 깊은 것과 속내가 모두 담겨 있다고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긍휼이 여기신다는 말은 주님의 가장 깊은 내면, 가장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곳까지 다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이 느끼는 아픔과 고통으로 우리 아픔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카밈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향해 마음을 움직이실 때에 하나님의 자궁인 깊은 곳까지 움직이시고 요동하시는 분임을 뜻합니다.

주님의 긍휼이 얼마나 깊고 강력한 감정인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인다는 식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의 여러 모습 중에서도 긍휼하신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헨리 나우웬과 두 친구가 정치에서는 긍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기 위해서 어느 날 미국 부통령을 지낸 허버트 험프리 의원을 찾아갔습니다. 의원이 끝에 조그마한 지우개가 달려있는 연필을 집어 들면서 말했습니다. “긍휼이라는 것은 이 지우개와 같은 것입니다. 글을 쓰다 잘못 쓰면 그때 사용하는 것이지요.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긍휼이란 실패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긍휼은 인생의 경쟁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은 헨리 나우웬은 인간의 속성 중에는 긍휼이란 없다고 했습니다. 긍휼은 인간의 속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처럼 너희도 자비하라. 아버지의 긍휼하심과 같이 긍휼하라. 긍휼이 없는 자는 긍휼이 없는 심판으로 내가 너희를 대하리라맞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긍휼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긍휼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않으시고 우리 죄를 공감하시며 자신의 아픔처럼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나서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먼저 구원의 방법을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백성의 비참하고 고통스런 마음만큼 동참하실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불가능한 일을 요청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의 성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는 강렬했으며 지속적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애가를 통해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되오나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음을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도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끝이 없으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라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이미 무너져 절망의 잡초만 무성하지는 않습니까? 민족의 상황도 다를바 없이 낙담만 가득한 것은 아닙니까? 어떤 변화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생각만 했지, 불가능 할 것이라 포기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느혜미야가 믿고 우리들이 믿고있는 전지전능한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나를 도와줄 능력과 마음을 갖고 계신 그 하나님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요, 우리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짓고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구원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요, 우리의 죄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분이시기에 십자가에서 죄를 대속하신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다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에 느헤미야가 세웠던 기적이 우리를 통해서 다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출처/서재중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9)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예배 느헤미야 8:1-6; 디모데후서 2:1-2

 

 

주제문장/ 하나님께서는 목사의 설교를 통해 지금도 주의 회중에게 친히 말씀하신다.

 

 

설교개요/ 예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예배의 세 번째 파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이다. 예배 인도자나 회중이 성경낭독’()을 하고, 설교할 목사가 조명을 구하는 기도’()를 한 후 설교’()를 한다. 설교가 끝날 때 설교자가 기도로 마무리하기도 하고, 설교를 다 들은 회중은 응답찬송’()을 한다. 이렇게 고대로부터 하나님께서는 회중에게 말씀하셨고,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설교를 통해 나 개인을 넘어 주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다. 개인적인 성경읽기와 묵상을 넘어 하나님께서 공적으로 선포해주시는 말씀을 회중에 속해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8 : 1 - 6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딤후 2 : 1 2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 여러분, 예배 중에 제일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설교가 아닙니까? 설교가 예배시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이것이 우리 개신교회에 예배의 특징입니다. 현대교회의 경우에는 설교가 많이 짧아지기는 했지만 설교가 예배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 것입니다. 예배는 설교를 중심으로 해서 그 이전 순서와 그 이후 순서로 나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설교가 예배를 이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배의 모든 순서가 설교를 중심으로 짜 맞추기도 합니다. 설교 이전의 순서는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고 설교를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설교 이후의 순서는 설교의 효과를 지속시키기 위한 역할을 합니다. 이런 식의 생각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예배에서 설교가 과도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개신교회의 예배는 말이 많은 예배입니다. 말로 가득 찬 예배입니다. 설교 위주의 예배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 순서가 이미 주보에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서에 대해 재차 언급하며, 이런 저런 설명들로 채우기도 합니다. 이런 말의 홍수 속에서 침묵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말이 많은 우리 개신교회의 예배는 여백과 침묵을 조금씩 확대해갈 필요가 있습니다. 말로만 가득 찬 예배가 하나님의 회중을 변화시키고 충분히 성숙시킬 수 있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 역사하지 않으시지만 말씀 사이의 여백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말의 홍수 속에서 정작 그 말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약시대부터 말씀을 해설하는 것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예배 때 설교가 차지하는 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제사가 주도하던 시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중심이 되어 이스라엘의 종교적이고 일상적인 삶 전체가 규율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에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전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번제를 포함한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6:6-8). 어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성전 문을 닫아걸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1:10). 제사장과 선지자는 서로 갈등관계에 있었을까요? 우리는 제사장과 선지자 사이의 갈등을 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제사장은 단순히 제사 드리는 일만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 율법을 가르쳤다는 사실입니다(10:8-10).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은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가 아니라 다 같이 율법과 관련을 맺고 있는 직분이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집니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제는 회당이 유대인들의 모든 삶의 중심이 됩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나고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지고, 성전이 재건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조차 각 지역별로 회당이 중심 역할을 합니다. 회당예배는 단순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순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신명기 64절의 그 유명한 쉐마 본문을 다 같이 낭독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인 여호와시니라는 유명한 구절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가정에서 아침저녁으로 이 문구를 낭독합니다. 그리고는 한 사람이 열여덟 가지 청원으로 이루어진 긴 기도를 인도하면 온 회중이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 후에 우리가 낮 예배 강복선언문으로 사용하는 민수기 6장의 아론의 대제사장적 복을 선언합니다. 그 후에 성경낭독과 해설이 있습니다. 성경낭독은 율법서 중에서 한 부분, 선지서 중에서 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이런 순서들 중간 중간에 시편 송을 여러 번 불렀습니다.

누가복음 416절부터의 말씀에 보면 회당예배에서 있었던 성경낭독과 해설이 어떠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라나신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에 평소에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의 손에 선지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이 그 중에 성령이 임하시는 부분을 찾아 읽으시고는 그 말씀의 뜻을 해설하십니다. 이 말씀이 너희들 눈앞에서 지금 성취되었다고 하십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이 깜짝 놀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자기들 가운데 성취되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방 땅에 전도하러 갔을 때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가서 예배했습니다. 회당장이 바울을 향해 성경을 해설해 달라고 하면 펼쳐준 성경을 읽고는 해설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초대교회의 예배골격은 회당예배로부터 빚졌습니다. 초대교회는 회당의 말씀중심 예배를 그대로 이어 받았습니다. 성경낭독과 해설이 예배의 핵심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말씀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이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1부 예배는 말씀예전이었고, 2부 예배는 성찬예전이었습니다. 중세가 되면서 말씀예전이 점차로 줄어들고 성찬중심의 예배로 바뀌어갑니다. 4세기가 결정적인 전환기인데 이제 설교는 거의 사라지고 성찬만이 중심이 된 예배, 즉 미사가 확립됩니다. 종교개혁은 이 미사중심의 예배를 말씀중심의 예배로 바꿉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는 예배는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요, 천국의 열쇠이다

 

요즘같이 다양한 매체의 영향을 받고 있는 시대에 설교가 효력이 있을지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설교는 의사소통에 있어서 너무나 전근대적이고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설교는 항상 효과가 있습니다. 설교는 복음의 선포인데 항상 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것을 설교가 가진 체질효과라고 불렀습니다. ‘라는 것을 아십니까? 시골에 있을 때 체질하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요. 체질을 하면 알곡은 안으로 모이고, 쭉정이나 겨는 날려 나갑니다. 이것처럼 설교는 체질을 해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숨은 생각까지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숨은 것이 다 드러내고, 감추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8:18).

우리는 말씀이 칼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은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는 말씀 말입니다(4:12). 개혁가들은 말씀을 실제로 양날 가진 칼에 비유했습니다. 한쪽 칼날은 치유하는 칼날이 되고, 다른 쪽 칼날은 죽이는 칼날이 된다고 말입니다. 설교는 사망도 불러일으키고, 생명도 불러일으킵니다. 고린도후서 214절에서 말씀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시고는 복 있다고 하시면서 그에게 천국열쇠를 맡기십니다. 그 천국열쇠로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하십니다. 그 천국열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목사의 설교가 바로 천국열쇠입니다. 설교를 통해 천국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받지 않을 때 천국이 즉시로 닫힙니다. 설교가 천국을 열고 닫는 열쇠입니다. 설교는 복음 선포요, 하나님 나라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천국을 열고 닫는데, 권징은 순서가 정반대입니다. 권징은 천국을 닫고 엽니다. 이렇게 설교와 권징이 천국의 열쇠를 실제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83문에서 이것을 다룹니다. ‘천국의 열쇠는 무엇입니까?’라고 묻고는 거룩한 복음의 설교와 교회의 권징인데, 이 두 가지를 통하여 믿는 자에게는 천국이 열리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닫힙니다.’라고 답합니다.

설교는 강의나 강연과 같이 사람을 설득하는 웅변술이 아닙니다. 설교는 사람의 감정을 교묘하게 조작하는 상담술이나 도덕적인 강화가 아닙니다. 더더욱 정치슬로건이 아닙니다. 선거의 계절이 돌아오면 강단에서 정치와 선거 이야기가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설교가 정치슬로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설교는 성경주해나, 성경공부의 차원도 넘어섭니다. 설교자는 하나님 나라의 사신이 되어 하나님의 모든 뜻을 남김없이 선포합니다(20:27). 설교는 인간이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절에 보니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한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너무 순진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인간의 설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제발 설교 좀 하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설교가 인간의 잔소리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 보아준다고 하더라도 실수나 오류가 많은 목사의 설교를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설교가 성경말씀의 바른 해명이 아니라 목사 자신의 경험담이나 사사로운 의견개진 정도로 격하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주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설교시간이 너무나 고역이라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데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머리를 쥐어짤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에 장로의 직분을 허락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장로는 목사의 설교를 감독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설교라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설교하기 위해 같이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에 대한 책임을 목사와 장로가 함께 짊어져야 합니다. 설교는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문제이기에 당회는 목사의 설교를 잘 감독해야 합니다.

 

설교는 성경낭독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설교 직전에 성경낭독을 합니다. 우리는 설교할 본문만 낭독하는데 교회사를 살펴보면 성경낭독은 성경 전체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회당에서 예배할 때는 율법과 선지서 두 부분을 낭독했습니다. 이후에 신약교회에서는 구약의 말씀 뿐만 아니라 신약 복음서의 말씀, 그리고 서신서의 말씀 등을 낭독했습니다. 교회절기에 맞추어서 정해진 성경본문을 읽어가기도 했습니다. 특정한 성경본문을 정해서 연속적으로 읽어가기도 했습니다. 이런 연속적인 성경낭독(Lectio Continua)은 요즘의 연속강해설교와 같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설교를 위한 성경낭독만이 아니라 예배 전에도 성경을 낭독했습니다. 성경을 낭독하면서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성경낭독이 있었습니다.

설교 직전의 성경낭독은 설교할 본문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의 낭독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성경낭독은 설교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성경낭독은 설교와 상호보완적입니다. 성경낭독과 설교가 하나의 세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개혁한 교회의 예배는 설교 하나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예배의 객관적인 성격보다는 주관적인 성격이 더 강화될 수 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기에 너무나 객관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만큼 주관적인 것도 많지 않습니다. 목사가 성경본문을 연속적으로 계속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한 본문을 읽고는 그것을 가지고 해설하고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목사 개인의 취향과 자질에 의해 좌우되기 쉬운 것이 설교입니다. 설교에서 목사는 엄청난 자유를 누립니다. 하지만 성경낭독이 있습니다. 성경본문을 읽고 나면 설교는 그 성경본문에 의해 할 말이 정해집니다. 목사의 자유가 제한됩니다. 성경낭독 때문에 설교에서 목사의 자유가 제한됩니다. 설교에서 목사의 자유가 무제한적일 수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인들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적용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회중은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들 상황에 적합한 적용을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회중은 설교가 적용으로 마쳐지기를 요구합니다. 적용이 없는 설교는 뭔가 모자라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본문선택과 성경낭독이 가장 큰 적용입니다. 성경본문선택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적용은 설교 끝부분에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본문이 선택될 때 이미 큰 틀의 적용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경낭독과 설교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적용입니다. 유럽의 개혁교회는 주일오후에 매 주일마다 정해진 교리문답설교를 하므로 주일오전에 한 목사의 자유로운 성경본문선택을 보완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회중 전체의 것이다

 

성경낭독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낭독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 없이 성경낭독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신학교에서는 성경낭독과목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을 어떻게 낭독해야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릴 수 있겠는가를 가르치는 과목입니다. 그 과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연극배우가 하듯이 낭독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발성만을 가르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문맥을 잘 알고 그 본문을 읽는다면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성경낭독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이 충분히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도전인지 모르겠습니다.

성경낭독이 이렇게 중요하다면 누가 성경을 낭독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설교할 목사만큼 그 성경본문을 잘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설교할 목사가 그 성경본문을 낭독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웨스트민스터회의에서 작성한 예배지침에는 성경낭독이 목사의 중요한 역할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말씀을 읽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여 있는 것을 승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공중 예배의 일부분이며,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세우기 위하여 거룩하게 하시는 방편이요 목사와 교사들이 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사 후보생도(강도사, 전도사) 노회가 허락하는 한 경우에 따라서는 회중에서 말씀을 읽는 것과 설교하는 은사를 같이 행사해도 된다. 신구약 성경 전부를 자국어로 회중 앞에서 읽되 본문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읽어 모든 사람이 듣고 이해하게 해야 한다.”

요즘에는 많은 교회들에서 설교자와 회중이 성경을 합독하든지 교독합니다. 요즘에는 교인들이 성경낭독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왜 설교자가 아닌 교인들이 성경낭독을 할까요? 교인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성경을 낭독한다고 할 때 더 깊은 의미를 담아야 합니다. 설교할 목사보다 그 성경본문을 잘 아는 교인들이 없겠지만 그 성경본문은 목사에게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 성경말씀은 모든 회중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가 아닌 직분 자들이나 교인들이 등단해서 성경을 낭독할 수 있습니다. , 잘 준비하여 낭독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온 회중은 잘 낭독하는지 보자라고 구경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온 회중을 위해 우리가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에 크게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같이 읽었던 느헤미야 8장 말씀에 보면 학사 에스라가 온 회중을 불러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특별하게 만든 나무 강단에 서서 율법 두루마리를 펼칩니다. 이 때 온 회중이 일제히 일어섭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니 모든 회중이 손을 높이 들고는 아멘, 아멘하면서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댑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극진한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이 유대인의 회당에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낭독하기 전에 율법 두루마리를 회중 사이로 들고 다닙니다. 이때 온 회중이 일어서서 그 율법을 바라봅니다. 동방교회에서도 이런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기 전에 성스러운 향으로 교회를 정화합니다. 향이 예배실을 가득 채울 때 사제는 성경책을 높이 들고는 회중 사이를 행진합니다. 우리도 성경을 낭독할 때 온 회중이 일제히 기립하면 어떨까요? 설교시간 내내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힘들지 않겠습니까? 성경 낭독할 때만큼이라도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고려해볼 만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공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성경낭독이 너무나 중요하지만 설교는 성경낭독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성경낭독을 되도록이면 많이 하고 설교시간은 줄여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설교는 목사의 해설이지만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낭독과 설교를 나누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따지는 것은 맥락을 잘못 짚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적인 뜻을 전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해설인 설교가 없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없이는 교회가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말씀의 바른 해설이 없이는 교회가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자신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지식이 풍부하거나 전달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낭독 후 설교하기 전에 조명을 구하는 기도를 하곤 합니다. 성경을 기록하게 감동을 주신 성령께서 그 성경을 잘 선포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실 것을 구합니다. 결국에는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문자가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될 수 있습니다. 조명을 구하는 기도가 습관적인 것이 되지 않아야 하겠고, 그래서 그 순서가 없더라도 설교자뿐만 아니라 온 회중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깨우쳐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신자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지만 예배 때는 하나님께서 목사를 통해 성경말씀을 공적으로 해설하게 하십니다. 그 설교야말로 하나님의 회중을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개인적인 성경묵상으로 공적인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22절에 보니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해 당부합니다.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들려준 것이 있습니다. 디모데가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한 것이 있습니다. 그 충성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겠습니까? 성경공부나 제자훈련, 더 나아가 전도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일차적으로 설교를 가리킵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설교도 설교지만 제자훈련이 더 중요하고, 전도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전도가 죄인을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이 순전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오염됨이 없이 순전하게 유지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설교는 목사의 일방적인 독백이 아닙니다. 혼자 소리를 냅다 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대화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는 설교한 성경본문을 미리 알리는 것이 좋겠고, 설교문을 준비했더라도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는 설교준비를 금요일에까지 끝내놓고 토요일에는 두문불출하면서 하루 종일 설교문 전체를 달달 외운다고 합니다. 강단에 올라갈 때는 한 장짜리 요약문만 가지고 올라가서 설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설교를 하고 나면 몸무게가 2-3kg이나 빠진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까지 그런 수준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어설픈 목사입니다. 아직까지 설교문에 전적으로 매여 있으니까요. 설교문에 매이는 딱 한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가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횡설수설하지 않고, 설교가 무한정 길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시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설교는 몇 분 정도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무리 길어도 30분에서 40분 사이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전에 유럽에서는 설교가 너무 길었습니다. 1시간도 좋고 2시간까지도 갔다고 합니다. 교인들은 설교 시간에 대놓고 졸았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길어지지 않도록 강단 바로 옆에 시계를 갔다 두었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시간이 길어지면 슬쩍 시계를 돌려놓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청에서 개입했습니다. 예배시간을 아예 고정시켜 놓고 길어지면 벌금을 내도록 했습니다. 목사는 설교시간이 길어지면 나머지 예배순서를 생략하고 예배를 허지부지 끝내 버립니다. 요즘은 정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분설교라는 말마저 등장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한 후에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그 설교를 읽어보면 딱 5분이 걸립니다. 그래서 5분 설교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성경기록이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재현한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만큼 문자에 집착하는 것도 드물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우리 개신교회의 예배는 듣는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천주교회의 예배는 보는 예배라고 말할 수 있고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우리는 듣습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보는 것에 좌우되면 안됩니다. 잘 들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중요하지만 설교를 듣는 회중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교학에서는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지만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더 많이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설교자 자신도 듣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도 설교하면서 동시에 그 말씀을 듣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만큼 놀라운 일이 없습니다. 설교에 대한 반응도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 회중이 어떻게 반응하면 좋겠습니까? 회중이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목사가 기도로 마무리하곤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기도가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미 길게 설교를 했는데 또 다시 설교를 요약하는 기도가 뭐 때문에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설교 후에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좋은 전통이 아닙니까? 그런데 설교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무엇보다 찬송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설교 중에도 얼마든지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지만, 설교가 마쳤을 때 크게 아멘으로 화답하며 찬송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설교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이기에 많은 물소리와 같은 아멘의 화답은 온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는 복음의 공적인 선포이기에 설교시간에 천국이 열리고, 그 말씀을 받지 않을 때 천국이 닫힙니다.’설교가 천국을 열고 닫습니다. 설교가 하나님 나라를 열고 닫으니 하나님의 회중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힘있게 들어갑니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인간의 잔소리로 생각하면 천국은 곧장 닫혀 버립니다. 설교가 아니라면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우리는 요동치는 온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잠잠할지어다.”여러분의 심령을 향해서도 외치십시오. ‘내 영혼아, 왜 불안 해 하는가? 너는 오직 말씀하신 하나님을 바라라.’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그 말씀대로 친히 행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낭독과 설교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계속해서 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에게 말씀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말씀의 영으로 자기 백성 가운데 역사하시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말씀 자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독생자를 통해 저희들에게 최종적으로 말씀하셨으니 그리스도 외에 구원이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설교가 지속적으로 복음의 선포가 되어서 천국을 열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에 말씀이 순전하게 보존되어 지금 저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담대히 들어가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역사가 저희 자녀들과 마지막 세대까지 이어지도록 도와 주옵소서. 목사의 설교를 복 주시옵소서. 신학교와 신학교수들에게 복 주시옵소서. 신실한 말씀의 사역자들이 배출되어 교회가 힘있게 서게 하시고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게 하옵소서. 저희가 세상 모든 소리들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구원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평안가운데 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묵상하고 나누기

 

1. 구약시대 선지자와 제사장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을까요?

 

 

2. 회당예배가 교회의 예배에 끼친 영향이 어떠합니까?

 

 

3. 개혁은 중세교회의 미사중심의 예배를 어떻게 개혁했습니까?

 

 

4. 설교는 복음 그리고 천국열쇠와 어떤 관련성 속에 있습니까?

 

 

5. 성경읽기의 다양한 차원, 그리고 설교와의 관련성을 말해 봅시다.

 

 

6. 설교가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면 어떻게 발전시켜가야 하겠습니까?

 

 

7. 말씀에 대한 반응과 화답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 보세요.

 

 

말씀이 회개와 회복을 일으킨다(느헤미야8:1-12)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는 합당한 예배는 회개와 회복을 일으킵니다.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완성했습니다(445-444). 140여 년 전에 무너져 있던 성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지고 이웃들에게 악을 행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서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성전을 먼저 복구했습니다. 이어서 이제 성벽도 복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인으로서 페르샤의 총독 느헤미야가 이 과업을 지도했습니다.

 

이렇게 하드웨어 시설은 끝냈습니다. 다음으로 말씀의 사역자 에스라의 지도로 백성이 모여서 말씀을 배웁니다. 합당한 예배를 드릴 때 백성은 회개했습니다. 기뻐했습니다. 다시 말씀을 배우며 회개했습니다. 공동체 하나님과 언약을 새롭게 했습니다. 느헤미야 8-10장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흐트러진 예배와 삶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요? 말씀을 바로 전하고 듣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1. 합당한 예배는 말씀을 존중하고 선포한다 (1-8)

 

1) 말씀을 사모하며 모임(1-2)

 

1) 71일이었습니다. 길게 나팔을 붑니다. 나팔절입니다.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됨을 알립니다. 1월에 한 해가 시작되지만, 7월이면 추수가 끝납니다. 그 풍요를 누리는 7월은 영적으로는 새 해가 시작되는 날로 봅니다. 안식년도 71일부터 시작합니다. 기뻐하는 명절입니다.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여자도 모였기 때문에 성전에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남자, 여자, 청소년 중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다 모였습니다. 학사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이지만 9장에서는 학사라고 합니다. “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렇게 온 백성이 남녀가 말씀을 사모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싶지만 코로나 상황 때문에 모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와 모든 교회가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영광돌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이런 상황에 우리를 내버려 두셨을까요? 전에 우리가 예배를 가볍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것을 가볍게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매를 드시고 있지는 않은 지 두렵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 못하는 이 때에 말씀을 사모함이 오히려 더 식기 쉽습니다. 영적으로 둔갑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말씀을 배우고 주님을 경배하려는 열정을 불태워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그 날을 어서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예배를 위해 코로나 질병을 거두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예배를 사모하는 성도는 느헤미야 때의 백성처럼 우리 자신의 성벽을 쌓읍시다. 자신의 가정과 일터에서 마치 예루살렘 성벽을 쌓듯이 말씀으로 살아갑시다.

 

2) 말씀을 존경하며 받음(3-6)

 

에스라는 특별히 만든 강단에서 섰습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을 읽고 가르쳤습니다. 5-6시간 서서 말씀 집회를 했습니다. 그만큼 성도들은 말씀에 목말랐습니다. 에스라 좌우에 13명이 서 있었습니다. “레위인이라고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백성의 지도자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에스라가 읽은 말씀을 백성들에게 큰 소리로 복창해 준 것 같습니다. 백성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열심으로 말씀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달게 받읍시다. 말씀의 단 맛을 알려면 계속 먹어야 합니다. 내 기분이 어떤 상태든지 일단 말씀을 많이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단 맛을 압니다. 우선 감정의 위로만 찾지 맙시다. 말씀 그 자체를 배우는 일에 열심을 냅시다.

 

에스라에게 말씀을 배우기 시작할 때 장면을 보십시오. 에스라는 백성들 앞에서 책을 폈습니다. 모든 백성은 일어섰습니다. 말씀을 이렇게 존귀히 여깁니다. 에스라는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룰 송축했습니다. 백성들은 기뻐서 아멘, 아멘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서서 말씀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말씀을 받았습니다. 합니다.

 

à지금도 우리는 삼위 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며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목사의 입으로 말씀이 선포될 때 삼위 하나님께서 영으로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설교 전에 성경읽는 시간은 설교에 필요한 참고 구절만 읽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들읍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없이 형식적이지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교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경배함이 없이 지식적으로만 성경을 읽지 않는지 돌아 봅시다. 예배의 순서 순서 마다 우리 영혼으로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합시다.

 

3) 레위인과 백성의 지도자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동역(7)

 

앞에서 백성의 지도자 13명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제 레위인 13명이 백성이 제자리에 있는 동안 율법을 깨닫게 했습니다. 아마 13개 그룹으로 나누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백성의 지도자 한 명과 레위인 한 명이 한 그룹을 맡고 있습니다.

 

목사가 말씀을 선포하지만 모든 성도들이 함께 협력합니다. 특히 장로들은 목사의 말씀의 동역자들이다. 예배 때에 선포된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가도록 돕는 일을 장로는 합니다. 성도를 개인으로 만나고 가정도 심방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돌아 보고 지원해 주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서로에게 말씀으로 교제 나누고 격려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말씀 나눔 모임이나 구역모임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격려합니다. 요즘처럼 다 모이기 힘들 때 소그룹으로, 개인적으로 모여서 격려합시다. 공적인 예배에도 개인적인 만남에도 말씀으로 교제 나눌 때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3) 말씀을 정확히 선포하고 깨닫게 함(8)

 

8절은 어떻게 말씀을 가르쳤는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말씀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입니다.

 

첫째, 말씀을 낭독합니다. 우리 교회 설교단에서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을 말하지 않으니 감사합니다.

 

둘째, 읽은 구절을 통역 혹은 해석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 온 백성 중에는 성경이 쓰여 진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어로 통역했을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가르칠 때는 번역하듯이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 주고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가르치는 일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체험이 시작됩니다. “본문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어떤 감동을 주는가?”는 그 다음에 가르칠 일입니다.

 

셋째, 정구체적인 상황에서 적용합니다. 명령한다고 표현합니다(참고: 5:43, 7:36, 9:9).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교회에 명령했습니다(15:24). 성경 말씀이 성도들의 삶에 적용되도록 가르치고 설교합시다.

 

넷째, 깨닫게 합니다. 귀에 읽어 들린 말씀이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좋은 밭에 뿌려 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아많은 결실을 맺는다고 말합니다(마태복음 8:2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깨달은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 안에서 자랍니다.

 

말씀을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하는 일은 오직 성령님만이 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말씀을 가감 없이 원래의 뜻을 통역하듯이 전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성도님은 말씀의 뜻을 잘 배우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웁시다.

 

 

2. 합당한 예배는 회개하며 기쁨을 일으킨다(9-12)

 

에스라가 동역자들과 함께 말씀을 바로 전할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며 울었습니다. 성도들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만 전했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합당한 에배입니다. 예배 때 마다 성도들이 말씀 앞에 엎드려 지는 일이 일어나기 바랍니다. 매일 회개하며 변하기 바랍니다. 예배 때 선포된 말씀을 믿고 순종하려 할 때 성령님께서 일하심니다.

 

2) 울며 회개하는 백성을 총독 느헤미야와 대제사장 에스라, 레위인들은 위로했습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거룩한 날이다.”(9,10,11)고 강조합니다.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

 

참된 회개가 있을 때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는 성도, 회개하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여호와 앞에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회개와 용서의 결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 기쁨 넘치기 바랍니다. 회개하는 기쁨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왔습니다. 말씀을 잘 듣고 받아서 회개와 기쁨 넘치기 바랍니다.

 

3)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셨습니다. 서로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영적으로 즐거웠기 때문입니다(12). 한 사람만 기뻐하지 않고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도 함께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령님께서 교회에 오셨을 때에도 일어난 일입니다. 말씀을 들은 교회는 기쁨에 가득 찼습니다. 함께 떡을 떼고 먹으며 즐거워했습니다(사도행전 2:43-47).

 

같은 성령님께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일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신실하게 말씀을 전합시다. 우리 모두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말고 오직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합시다. 잘 듣고 회개하며 웁시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즐거워합시다. 그래서 매일 말씀으로 인해 기쁘게 삽시다. 모여서 함께 기쁘게 식사합시다. 개인적으로도 서로 만나며 먹읍시다. 코로나19로 만나기 힘든 이 때에는 전화하고 문자하며 즐거움을 함께 합시다.

 

우리 교회 목사가 에스라처럼 항상 말씀을 풍요롭게 잘 가르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의 장로와 집사 직분자가 말씀 사역을 잘 지원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말씀으로 기뻐하고 순종하며 삶에 기쁨이 넘치도록 기도합시다.

 

 

3. 합당한 예배는 더 많은 말씀과 회개와 회복을 일으킨다(8:13-9:5)

 

1) 더 말씀을 배우면서 초막절 예배를 회복(8:13-18)

 

1) 71일 집회 후 대부분의 백성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추수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의 지도자들과 제사장 레위인들이 다시 에스라에게 율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지도자들의 특별성경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을 배울 때 더 말씀에 목마릅니다.

 

요즘은 성도들이 말씀을 바로 전하면 딱딱하다고 싫어한다.”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양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따라 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은 말씀을 달게 받습니다. 더 말씀에 주리고 더 달라고 합니다.

 

2) 함께 말씀을 공부하던 지도자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일곱달 절기(초막절)에는 초막에 거할지니라”(14, 23:16)를 읽었습니다. 백성이 포로에서 돌아 온 지 100여년이 되었지만, 초막절 지키는 것 조차 잊었습니다. 구약 성도들에 1년에 세번 지켜야 하는 3대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 조차 잊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하나님이 일 주일 동안 풀로 임시 집을 짓고 그 안에 사는 절기입니다. 과거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를 여행하던 것과 그 때 하나님께서 보호하셨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715-21일에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할 때 우리는 우리가 잊고 있는 중요한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즉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백성들이 다 초막을 지었다.”바벨론 유배에서 돌아온 것은 제 2의 출애굽과 같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그 조상처럼 이제 바벨론/페르샤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그들은 말씀을 중심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초막절의 첫날과 8일째 되는 날(715, 21)규례를 따라성회로 모였습니다(18, 레위기 23:36, 39). 그 성회의 날에 안식했습니다. 주중에도 매일 에스라는 율법을 읽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1:11에 초막절에 모일 때 율법을 읽어라고 한 대로 읽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잊혀진 초막절 같은 것이 없을까요? 우리에게는 성찬이 잊혀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로마교회가 성찬을 미신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개신교는 신중하게 대합니다. 좋은 태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하실 때, 1년에 두 번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가능한 자주 성찬을 하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코로나 전염병이 지나가면, 한 달에 한 번은 성찬을 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복음을 받으려 합니다.

 

2) 금식하며 더 회개하고 언약의 회복(9:1-5)

 

말씀을 듣고 더 들으면서 교회가 바뀔 때, 성도는 회개도 더 깊어 갑니다.

 

721일로 초막절은 다 끝났습니다. 3일 후 724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모였습니다. 이방인과 절교하고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2). 기쁨으로 초막절을 끝냈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금식과 회개는 710일에 대속죄일에 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대속죄일은 빼먹고 초막절 집회만 했다가 다시 회복했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계속 회개를 일으키십니다.

 

그들은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햇습니다(2). 회개는 감정적으로 후회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사람들과 결혼하며 거룩함을 저버린 삶에서 돌아서는 것이 었습니다. 회개는 거룩한 삶을 향한 개혁입니다. 소원합니다. 삶을 새롭게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죄도 회개했습니다. 10 여년 전에도 그들은 이방인으로부터 떠나지않은 것(9:1)을 회개했습니다. 그 같은 죄를 다시 범하고 있음을 회개했습니다.

 

말씀은 그것을 들은 성도의 마음에 회개를 일으킵니다. 우리에게 말씀은 계속 회개를 일으키고 우리를 새롭게 되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들이 지은 죄도 회개하는 철저함과 용기도 본받읍시다.

 

회개할 때 말씀과 함께 했습니다. 말씀을 인도하며 가르쳤던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며 회개기도를 인도했습니다(5). 하루 동안 낮 4분의 1은 말씀을 듣고 4분의 1은 죄를 고백했습니다. 말씀을 읽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합당한 예배는 말씀과 회개가 있는 예배입니다.

 

3) 언약공동체의 삶을 새롭게 하기로 결단(9:38)

 

말씀을 더 풍성하게 회개를 더 깊게 하면서 구약 교회는 더 변화되었습니다. 회개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9:38).

 

이방인과 결혼 등을 그만두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나아가 그 동안 흐트러 졌던 모든 것을 개혁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언약을 맺습니다. 10장에서 백성의 대표로 하나님과 언약을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언약의 내용은 첫째로, 이방인과 혼인하는 것을 그만 두어 생활의 순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둘째, 십일조와 헌물을 충실히 하여 여 성전 예배를 회복하겠다고 합니다. 교회를 바로 세우고, 세상에서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헌신합니다.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합당한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새롭게 했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때도 비슷한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도은 개혁운동을 조직하여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루터와 칼빈,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유럽 곳곳에서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는 주님의 종들이 일어났습니다. 교회 전체를 새롭게 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에스라 시대에 모든 백성이 성전에 다 모여서 말씀을 간절히 사모한 것을 본받읍시다. 코로나 전염병으로 모든 성도가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없다고 예배가 흐트러 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영상의 도움을 받아서 각 가정에서 예배합시다. 말씀과 함께 하시는 삼위 하나님께 경배하며 말씀을 받읍시다.

 

우리가 말씀을 신실하게 받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죄를 비춰 주시고 회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계속 회개하며 새로운 삶으로 살아 갑시다.

 

그렇게 나갈 때 우리는 세상과 확실하게 다른 언약공동체로서 분리되어 살아갑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참된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교회와 성도가 합당하게 예배하고 거룩하게 살 때,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 됩니다. 이런 회개가 회복의 복을 얻도록 우리가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고 받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내세의 영광을 맛보라 (111-2)

 

 

1.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2.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이 시간에 내세의 영광을 맛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서 세상의 모든 불행을 혼자 다 짊어진 듯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 때 지나가던 공원지기가 그를 보고 "여보시오,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서 왔기에 해가 지는데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소?" 라고 말했습니다.

 

 

이 퉁명스러운 질문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로 그것이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요." 염세주의 철학자다운 대답입니다.

 

 

아시는 대로 염세주의(厭世主義)란 비관주의 또는 영어로 페시미즘(pessimism)이라고도 하는데 이 세계와 인생을 심히 비관하면서 개선이나 진보 역시 불가능하다고 보는 매우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리킵니다. 얼마나 불행한 생각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소망 없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해 주시고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해주셨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도 예수 믿고 하나님 잘 경외하면 내세의 천국을 성령으로 맛보며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말씀하셨고,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6:4-5"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지상에 살면서도 하늘의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맛보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만이 갖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보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을 오늘 읽은 느헤미야서를 통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성의 거주자가 나오는데 예루살렘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의 예표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심히 큽니다.

 

 

내세의 영광,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보려면?

 

 

1. 세상 죄 내려놓고 회개하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거주자는 1~2절만 아닙니다. 7장을 보면 바벨론에서 귀환해서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원거주자들이 나옵니다. 7:66온 회중의 합계는 사만 이천 삼백 육십 명이요, 그 외에 노비가 칠천 삼백 삼십 칠명이요, 그들에게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사십 오 명이 있었고그랬는데 이들은 에스라의 인도로 바벨론에서 돌아온 1차 귀환자였습니다.

 

 

그리고 느7:73을 보면 이들 모두는 이국땅에서 하나님을 사모한 나머지 돌아와 예루살렘 본성에 거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방나라의 침입을 받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지방에서 살면서 생업을 가져 예루살렘은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 총독은 보계문서에 기록된 1차 귀환 명단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옛날 그 마음을 회복하여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오기를 희망했습니다. 즉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도성을 그리워하며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돌아왔던 것처럼 그 사랑의 마음을 품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우리 믿는 자가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면 누구든지 새 예루살렘의 은혜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22:14-15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도 회개하여 깨끗하게 씻으면 하늘의 영광이 우리에게 비쳐옵니다. 절망이 있습니까? 문제가 있습니까? 진실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천상의 100명의 의로운 의인보다 죄악 된 세상에서 진실로 회개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명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2.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늘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또 예루살렘 거주자가 나옵니다. 1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3절에는 점 더 자세히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자손들이라고 나옵니다. 즉 그들은 행정 및 종교의 의무를 담당하는 자로서 백성을 통치하며 제사하는 것이 그들의 주 임무였습니다.

 

 

이처럼 신령한 지도자와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요 제사장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행정과 종교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이들은 바로 우리 마음 중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내세의 은혜를 맛보며 살려면 우리가 신령한 통치자가 되어 마음을 다스려 늘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하고 순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의 행정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제사장이 되어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함에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늘 기도하고 찬송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의 분량이 구약의 제사장만큼 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루를 돌아볼 대 최소한 그들이 조석으로 번제하듯 시간을 정해놓고 하루 두 번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과 절기와 제사 등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의무만큼 지금은 형태와 모양은 다르지만 그 시간 그 정성 그 분량 정도는 헌신해야 정상적인 영적생활이 가능합니다. 자신과 세상일에 너무 바쁘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목동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으로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은사를 입혀주실 것입니다.

 

 

3. 의무적으로라도 믿음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1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왜 제비를 뽑았을까요? 예루살렘에 거주할 지원자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대부분 생업의 터전이 외부에 있었기에 예루살렘에 돌아오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의무적으로라도 충실히 하라는 교훈입니다. 우리에게 주일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한 주일 돌아오는 것은 정말 빠릅니다. 여러분보다 목회자는 그걸 더 실감합니다. 한 주간이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매일 매일 준비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입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은 모두가 그 생활이 어느 모로나 규모가 있고 규칙이 있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 얼마나 규칙적이고 규모 있는 신앙생활이었습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의 청년 다니엘이 규칙을 정해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은사 주셔서 바벨론의 총리가 나라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규칙을 정해 의무적으로라도 열심히 하면 은혜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날마다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했는데 다른 신에게 절하거나 기도하면 사자밥이 된다는 법 앞에서도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지독한 규칙쟁이였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루터도 매일 새벽마다 2시간씩 기도를 하곤 했는데 하루의 일과가 바쁜 날일 것 같으면 3시간씩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야 마귀한테 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도 메도디스트(mathodist) 즉 규칙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 시간에는 어떤 일에도 양보하지 않고 힘슨 결과 성령에 사로잡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장로교도 믿음의 조상들이 물려준 좋은 전통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위대한 신유사역자 카메론 페디 박사는 30세에 목사가 되어 60세까지 목회를 했으나 성령의 세례도 모르고 신유의 은사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부인이 병들어서 신유에 관한 성경을 연구한 결과 예수님은 3/2의 병자를 고쳐 주셨고 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아니하시는 주님이신 것을 믿고 또 그에게 믿고 기도하면 병을 고쳐 주실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밤중에 남들이 다 잘 때에 일어나서 한 시간씩 신유의 은사를 구하고 성령충만하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기도시간은 집에서나 산에서나 바닷가에서나 언제나 꼭 규칙적으로 지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다가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서 병이 나았고, 그가 성령의 능력을 받고 두 달 동안 전도한 것이 은혜 받지 않고 30년 전도한 것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제비뽑기가 보여주듯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의무적으로라도 규칙을 정해 순종할 때 내세의 영광, 새 예루살렘의 은혜를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4. 성령의 감동을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이 사람들이야 말로 참으로 귀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업을 포기하지 못하고 망설일 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사람들이 대적들의 훼방과 공격의 목표가 되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려는 것을 꺼릴 때 그들은 대적들에게서 예루살렘을 파수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사람들입니까?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의 감동입니다. 늘 성령의 감동 받아 살면 하늘의 은사를 맛봅니다. 그러므로 늘 성경 보며 복음 방송 가까이 하여 말씀과 찬송과 간증 등 성령의 감화 속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지체들을 통해서도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은혜를 사모하세요.

 

 

6:7-8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하셨습니다. 내세의 영광과 은혜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임하는 내세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세상 죄 내려놓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되, 규칙을 정해놓고 부족하지 않게 힘쓰고, 성령의 감동을 받는 대로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살아서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과 같이 온전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자신과 모두에게 증거가 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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