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첫사랑을 회복하려면 (계 2:4-7)

nam씨 2022. 9. 16. 16:03

첫사랑을 회복하려면 (2:4-7)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이 시간에는 첫 사랑을 회복하려면이라는 제목입니다. 사랑이 중요합니다. 첫사랑을 잃었다면  사랑을 꼭 회복해야 합니다. 역사상 가장 완벽하리만큼 위대한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그런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잃음으로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일까요?


1. 문제점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 주님의 책망이 없었다면 에베소 교회는 별로 문제 없는 것로 착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뭐 하나 미흡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주님께서 문제점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문제점을 깨달아야 합니다아버지께서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시고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 목숨까지도 주셨는데 나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감격이 있는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은 아는데도 감격이 없다면 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기도하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지난 여름 휴가 시 수요기도회 시간이 되어 마음 먹고 찾아간 교회가 있었습니다. 40년 전 저의 목회를 많이 도와주던 어느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어쩌면 동일하게 목사의 설교나 교회의 분위기가 성령 성령 성령 능력 능력 능력,, 아직도 변함없는 그 메시지와 기도하는 모습에 조금은 유치하고 원시적인 감정을 느끼면서도 한 편으로는 교인들의 믿음이 타오르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은 처음 사랑이란 성령 체험 가운데서 나오는 사랑의 감정입니다. 성령 체험할 때 주님이 그토록 귀하고 그토록 사랑스럽고 감사하고 감격스러워 일생을 주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을 잃었다는 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예전 같지 않다면 성령과 너무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단이 정확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2. 첫사랑을 회복하려면 원인을 추적해야 합니다.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이 말씀은 곰곰이 원인을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업적으로 볼 때 몇 가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주의 일에 너무 특심하지 않았는가? 혹시 마르다와 같은 같은 상태는 아닌지, 예수님은 대접한다고 분주한 마르다를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의 일에 열심해야 하지만 지나쳐서 너무 분주하면 주님 앞에 엎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주님과 주의 일이 상관관계가 없지 않지만 구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은 에베소 교회가 너무 말씀에만 치중하지 않았는가? 에베소 교회의 말씀 실력은 거짓 사도나 이단 같은 거짓을 쉽게 분별해 낼 정도였습니다. 당시 신약성경이 갓 기록되고 성경책도 많지 않을 뿐더러 교리적인 완성이 미흡한 시대에 이만하면 대단한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말씀 충만함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은 성령 충만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말씀과 성령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서로 연관성은 있지만 말씀이 성령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성령은 성령입니다. 말씀 수준을 영적 수준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말씀 잘 알아도 얼마든지 성령 충만 못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의 예리한 칼날을 가졌다고 영적으로 풍성한 것은 아닙니다. 한국교회에 제자교육 같은 말씀운동이 일어난 것은 대단히 좋았지만 성령에는 조금은 소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둘 다 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부흥의 운동의 부족한 면을 보충함보다 새로운 스타일로 갈아타는데 급급했고 따라서 제자교육의 등장과 함께 부흥의 불길은 한국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론적 교육으로 성령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타이틀만 제자교육 가지고는 제자교육은 어림도 없습니다. 제자교육에서 말씀과 성령 둘 다 강조합니다. 그러나 제자교육의 현장에서는 대부분 이론교육의 성과만이 난무합니다그만큼 기도가 부족하고 그만한 영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모여서 공부하는 모임은 많아졌어도 날마다 모여서 부르짖고 기도하던 그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5절의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에 나타난 다른 의미로는 너희가 어디서 떨어진지도 몰랐구나 하는 질책의 음성이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은 여간 힘쓰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식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나 교육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데서 비롯되는 성령의 은혜가 강조되어야 첫사랑이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처음 사랑은 삶을 강조해야 살릴 수 있습니다.


5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에베소 교회의 문제점은 행위에 있었습니다. 삶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교육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론도 성경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를 양성하는 일군들이 먼저 제자여야 했습니다그러나 지도자들부터 삶이 부족했습니다몇 학기 교육과정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가르치고 삶을 점검해야 했습니다. 가르친 바대로의 삶이 없다면 수료증을 주지않아야 합니다.


삶이란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방편, 성화의 방편(방법)을 말합니다구원론에서 성화의 방편은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교제와 순종과 사랑과 성례와 섭리적 인도 등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이 방편을 고집적으로 적용할 때 은혜가 임합니다. 모두 삶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 삶이 죽으면 신앙의 감격도 사라집니다. 처음 사랑이란 성령의 은혜로 다가오는 감격이기 때문입니다.


4. 첫사랑을 회복하려면 주님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5절 하 반절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촛대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첫사랑 즉 성령에 무관심하면 부흥은 멈춥니다. 교회가 사라집니다우리의 후손들이 형식적인 신앙으로 치닫다가 그나마 몇 대나 이어질지 불보듯 뻔합니다. 이것은 대단한 경고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어떤 상태였습니까? 2:1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라 했습니다. 주님이 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에베소 교회의 상태가 이 상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걸 해석하려면 역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주의 종들은 능력을 잃어버렸고 하나님께서 너희 회중과 함께하시지 않는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촛대를 옮기리라는 이 주님의 경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부흥은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안디옥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렇게 계속 서진하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 머문 시간이 너무 짧아요. 그만큼 성령을 갈망함을 빨리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철야하며 기도하거나 전교인 새벽기도하면 지금도 이런 교회가 있냐 하고 신기하게 여깁니다. 인산인해를 이루던 기도원도 텅텅 비어 운영을 위해 대여해 주고 있습니다. 아멘할 줄도 모르고 석고상처럼 굳어진 성도들을 바라볼 때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경고를 크게 듣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5. 첫사랑은 작은 불씨라도 살릴 때 가능합니다.


6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작은 불씨는 남아있었습니다. 교회를 염려하며 이단 니골라 당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니골라당은 육은 더럽고 영은 깨끗하다는 이원론 사상으로 이미 더러워진 육은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쾌락주의였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이런 세속주의 이단이 교회에 퍼지는 것을 심히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조금이나마 주님을 사랑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소망을 발견합니다. 한국교회가 예전만 못한다 할지라도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단들이 양들을 삼키려고 달려들 때 그들의 행위를 미워하며 교회를 염려합니다. 나라가 좌경화되는 것을 기독교인들이 반대하는 것도 국가 안보가 무너지면 신앙의 자유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작은 불씨는 남았습니다영적 상태가 에베소 교회와 같아요. 이단에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회를 지켜 달라고 부르짖는 기도가 살아 있습니다.

 

이 남아 있는 작은 불씨라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과 성령의 운동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기복과 번영신학 대신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신 아버지의 사랑과 죽기까지 희생하신 십자가 복음을 강조해야 하겠습니다.

 

아직 남은 사랑에다 호소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남아있기에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눈물을 흘리며 받아들입니다. 복음을 강조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건의 삶을 기초한 부흥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성령의 불 받은 부흥사들이 많아지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6. 첫사랑을 회복하려면 싸워 이겨야 합니다.


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여기 생명의 열매를 약속하시며 이기라 하셨습니다. 이기라는 것은 저항도 반대도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먼저 나부터 이겨야 합니다. 내 육신부터 이겨야 합니다. 게으른 내 자신부터 일깨워야 합니다. 평안한 자신부터 일깨워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는 너무 편함만 추구합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시간은 잘도 갑니다. 편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편함을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먹고 놀고 누워 편한 것만 추구하며 시간 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텔레비전에서는 매일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걸 다 보면 하나님께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 덜 보고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프로그램도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보다 더 맛있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로 나아가세요. 주님을 사랑하세요. 그것이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형통하는 길입니다. 이 은혜를 진정 맛본 사람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성령의 부흥에 제동을 거는 교회 전통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주님의 사랑을 배반했던 베드로의 사랑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어떻게 만나셨고 또 베드로가 어떻게 주님을 따라 나서게 되었는지 그 첫 사랑의 이야기가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밤새 가며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해 그물 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5:4) 어부의 상식으로 보면 말 같지도 않은 말이엇지만 베드로는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느끼고 순종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는 마음으로 주님을 무시한 것을 깨닫고 뉘우치며 베드로는 그 날로 그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로 인정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 모두와 함께 할 수 없을 때에도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만큼은 옆에 두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특별한 사랑과 신뢰를 감사했고 그래서 몸을 바쳐 충성을 다했습니다. 목숨까지도 주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주님이 고난 받을 것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26:33) 외쳤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밤에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생명을 바치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었지만 초라하게 실패했습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그 참담한 실패로 인해 그는 절망에 빠졌고, 모든 의욕과 열정이 한 순간에 증발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꿈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3년 동안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 모든 열정이 차갑게 식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다던 제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주님은 외롭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과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분부를 듣고 갈릴리로 갑니다.

 

주님께서 왜 갈릴리로 부르셨을까요? 첫사랑의 장소로 부르신 것입니다. 위기에 빠진 부부가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처음 만났던 장소를 찾곤 하지요. 처음 만났던 장소로 돌아가 처음 서로를 만났을 때의 감정을 회복하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첫 사랑의 기억이 서린 곳으로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며 다시 고기를 잡습니다.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새벽이 되어 고기 잡기를 포기하고는 호수가로 돌아와 그물을 정리하는데 그 때 누군가가 다가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 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그 말에 멈칫 했을 것입니다. 3년 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마음에 "혹시?" 하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아니야' 그래도 베드로는 추억을 떠올리며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물에 고기가 가득히 잡힌 것입니다.

 

그 때 요한이 베드로에게 외칩니다. "저분은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넘 반가워 물로 뛰어들어 주님께 달려갑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잡은 생선을 구워 해변가에서 아침 식사를 나눕니다. 식사를 마친 다음, 예수님은 베드로를 따로 불러내십니다. 아마도 둘이서 해변을 걸었는지 모릅니다. 한 참을 말 없이 걸으시던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 예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이름 '시몬'을 사용하십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뜻이 분명합니다. 그러시면서 세 번이나 사랑에 대해 물으십니다.

 

그런데 원문에 주님께서 아가페로 물으시자 그는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헬라어 '필리아'는 형제간의 우정 혹은 친구간의 우정과 같은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깨어지기 쉬운 인간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사랑한다는 대답 같지만 진정한 그 의미는 "제가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부드러운 눈길로 베드로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여라." 베드로는 참혹하게 실패한 자신에게 더구나 여전히 사랑에 부족한 자신을 믿고 일을 맡기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얼어붙었던 베드로의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번 더 그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그에게 양들을 돌보라고 부탁하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실패한 것을 생각하고 세 번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주님을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에베소 교회를 예리한 눈으로 진단하신 주님은 지금 우리를 진단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은혜로 충만하십니까? 얼마나 성령의 사람입니까얼마나 사랑의 감격을 갖고 계십니까? 우리가 처음 은혜 받고 주님을 만났을 때 그 감격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때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힘과 정성과 성품과 뜻과 목숨과 시간과 목소리까지도 다 바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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