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유다서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는 성도 유다서 5절

nam씨 2022. 6. 4. 19:21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는 성도 유다서 5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진리이고,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는 길이며,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외에, 어떤 것을 중심에 세우고, 잘 포장해서 속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 진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의 본성과 맞서야 하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퍅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언제나 자신을 중심에 세우고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로 향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만났을 때, 그 문제의 중심에 하나님의 뜻을 세워야만 풀리고 결론이 나는데, 항상 자존심과 지식과 경험을 중심에 두려고 하기 때문에 고난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인간의 의를 버리지 못해서, 거룩한 신앙생활을 하기가 힘이 드는데, 영적으로 어둡게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 역시,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는, 순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고난을 만나거나, 괴롭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지금까지 살아오던 방식대로 먼저 접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 생각이 옳고 그르고, 또 내가 지식적으로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왜 나에게 주셨는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경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이와 비슷한 사건을 만났을 때, 문제들을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했는지 본다면, 분명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는, 성도들이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짓 복음에 흔들리자 편지를 통해 책망했는데, 그들이 알고 있던 구원의 축복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들이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신앙인지 다시 일깨워 줌으로써 돌이킬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인데,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동일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도록 반복해서 전해주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교회들이 복음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유다처럼 반복해서, 성도들에게 전했습니다.

 

로마서 15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데살로니가후서 2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디모데후서 2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해서 거짓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참 복음을 붙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가만히 들어온 악한 자들, 즉 이단들이 전하는 비진리에 속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계속해서 진리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고 일깨워주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들에게 세 가지 사건을 들어, 어떤 불순종을 보일 때 심판하시는지 알려주었습니다.

세가지 사건은, 진리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버린 어리석은 자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수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 애굽 백성을 해방시켜 주셨지만,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편안해지자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나 타락한 천사들이 받는 영원한 심판입니다.

세 번째는 세상이 타락하는 것을 말씀으로 판단하고 분별하지 않고, 생각 없이 살다가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성입니다.

 

첫 번째로 말씀하신 이스라엘이 받은 심판은,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시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계획하고 노력하셨는지 백성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크게 기뻐했던 그들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던 그들이, 편안한 시간이 길어지자, 정말 믿음을 보여드려야 하는 순간마다,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며 죄를 짓고 만 것입니다.

 

자신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자녀들과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삶이 편안해지자, 노예 생활을 하며, 고통을 당했던 그 시간들을 모두 잊고 말았습니다.

지금, 조금 편안해졌다고, 400년이라는 고통의 시간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의를 버리지 못하면,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큰 이익이 없다고 판단이 되면, 바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쫓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약속도, 자신과의 약속도, 시간이 지나면 아예 없었던 일처럼 잊고 맙니다.

 

이렇게 감사를 잊어버리고, 진리를 버린 자를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때문에, 유다는 성도들이 책망을 받게 될까 두려워서, 다시 한번 일깨워주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역사와 기적을 통해서 출애굽 했던 그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의 말을 듣고 통곡했습니다.

 

정탐꾼들이 보고하기를, 우리가 올라가서 보니까,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신장이 장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땅에 사는 아낙자손은 네피림의 후손이므로 거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봐도 우리들이 메뚜기와 같다고 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함께 올라갔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울고 있는 백성들에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올라가기만 하면 능히 이길 수 있으니까 올라가자고 했지만,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10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이기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은 이스라엘과, 그 모든 사실을 잊지 않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선택은 이렇게 달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을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이, 이렇게 다른 판단과 결정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이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지금 편지를 읽고 있는 너희들이 어떤 판단과 결정을 하고 있는지,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이스라엘백성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해방시켜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불평하였습니다.

 

왜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해서, 그들의 칼에 망하게 하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대를 이어 종살이를 해야 하는 고통에서, 이끌어내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아낙자손이 자신들보다 신장이 조금 큰 것을 가지고, 우리가 언제 애굽에서 나오겠다고 했느냐고, 왜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죽게 하느냐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걸고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기적을 베푼 모세를 버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장관을 세워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종살이를 하겠다고 울부짖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한심스럽기까지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던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는데,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이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감사하지 않는 그들을 모두 심판하고 싶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한심한 이런 자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감사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모세가, 자신들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주셨는지 다 잊어버렸습니다.

 

하늘의 권세와 능력으로, 백성을 살리는 기적을 베풀어주었지만, 그들은 그런 모세가 능력이 없다고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간사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저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성숙한 성도로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하고, 상담을 해줘도 자신의 생각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의 의를 건드리면, 바로 정색하며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선포되는 말씀에 찔림을 받는다고 하면서도, 자신들의 습관이나 잘못된 삶을 지적하면, 곧바로 표정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말씀을 듣는 것은 좋지만 그대로 살기는 싫다는 것입니다.

 

저는 가정심방을 자주하면서, 개인적인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자제하는 편입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열심히 권면을 하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 올바른 믿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고, 선한 선택과 결정을 해서 하나님께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목회자가 좌지우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담해 보면, 자기의 생각과 동일한 말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 책망을 해야 하는데, 굳이 싫은 소리를 해서 관계를 해치는 것도 원치 않기 때문에, 자제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입을 다물어 버리면, 저는 편하겠지만 성도는 멀리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쉬운 길을 눈앞에 두고도 듣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때로는 상담하는 성도가 성숙하지 못해서, 제가 하는 말의 핵심을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도리어 분을 내는 것을 보면서, 속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섬기는 마음으로 직접 사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좀 더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도저히 도와줄 수 없기 때문에 마음에서 내려 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하나님과 지도자를 버리고,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백성들 앞에, 모세와 아론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들을 말렸습니다.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토록 고생한 모세와 아론이, 왜 그들에게 엎드려 빌면서, 이렇게까지 말려야 하는 것입니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그들에게, 모세와 아론이 무릎까지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비는 것은, 성숙한 자와 성숙하지 못한 자의 차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믿어드리지 못하는 그들이,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깝고, 화가 나지만,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해서,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숙한 자가 도리어 성숙하지 못한 자에게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우리도 가나안에 그들과 함께 갔다 왔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며, 너희들이 싫다고 버릴 수 있는 그런 땅이 아니라고 소리쳤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소리치며 울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이 너무나 한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런 자들을 달래고 있는 모세와 아론이 보기에 너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모세가 자기의 축복을 위해서 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평안을 누린다면, 그것은 그들이 누리는 축복이지, 그 평안함을 모세와 아론이 대신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했기 때문에, 사명을 잘 감당한 것이므로, 백성들이 평안한 것을 보면서 기쁘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자신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주면, 모세와 아론이, 자기들이 누릴 평안과 축복을 대신 누리는 것처럼, 그들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 계신 하나님께서 과연 누구를 심판하시겠습니까?

 

사람은, 자기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생각을 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이라고 말해줘도,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보다, 아낙자손만 보이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잊지 않고 있으면,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땅이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아낙자손이, 아무리 거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밥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죽을 결심을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다고 결단해도, 그들 앞에 나서기 힘든데, 싸워보지도 않고 주저앉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과 이적을 통해 그들을 여기까지 인도하셨는데도, 내가 힘이 없기 때문에, 아낙자손을 이길 수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미련 없이 버리실 것입니다.

 

, 유다가 우려하는 것은, 나는 할 수 없다는 나약함도 문제지만, 하나님께서 돕지 않아도 나는 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도 문제입니다.

 

고라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들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을 만난 백성이라며 모세와 아론을 대적 했던, 그 말을 지금도 어리석은 성도들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는 자들도 심판을 받지만, 자신의 힘을 믿는 자들도 심판을 받습니다.

 

내가 세상의 재물과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힘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하나님께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는 이런 교만이 혹시 남아 있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힘으로 삼는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만함을 버리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배운 말씀을 잊어버린다면, 머리로만 하나님을 아는 교만한 자가가 될 것입니다.

 

유다가 굳이 애굽 사건을 예로 들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유다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절대로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온전히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단들이 전하는 거짓복음을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차라리 말씀을 아예 몰랐다면, 교만하지도 않았겠지만, 말씀을 조금 아는 것으로 자신들이 말씀을 알고 있다고 자만한 것입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불신앙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처럼,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지만, 쫓아오던 애굽군사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고통의 요소들이 사라지자 인간의 본성을 서서히 드러낸 것입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만 잊지 않아도, 세상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올바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도바울은 믿음의 형제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릴 몸은,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다가 예배에만 참석하는 그런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전 인격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함을 입었다면, 주어진 인생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예배이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사인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것은, 보이는 세상뿐 아니라, 영혼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라는 부탁입니다.

 

영육간의 강건한 믿음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우리안에 성령의 법과 죄의 법이 공존하고 있지만, 사도바울처럼 날마다 죄의 법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조금 건드리면 분을 내고, 상대방의 뜻은 전혀 포용하지 않고, 내 뜻을 고집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자신을 찌르고 남을 찌르는 자리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조롱을 받는 자리, 겁이 나고 두려운 자리, 매맞는 자리, 죽음의 자리라 할지라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신앙이 바로,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고, 가나안으로 담대하게 들어가는 성도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죽이고, 많은 생명을 살려내신 그리스도를 기억하시고,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기를 다짐하기 바랍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지 고민하고, 헌신하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그런 결단만 해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부끄럽지 않도록 도와주실 것이며,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의 뜻을 알고 행하여 칭찬받는 성도로 살아가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