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고린도전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장 9-10절)

nam씨 2021. 11. 20. 16:59

추수감사주일설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9-10)

 

오늘은 추수 감사주일 입니다. “은혜를 잊어 버리면 짐승 만도 못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감사를 드려야 마땅 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허락하신 은혜, 숨쉬며 건강하게 살아가게 하신 은혜, 일용할 양식으로 채워주신 은혜, 가족을 이루게 하신 은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신 은혜, 예배의 자리를 지켜 가게 하시는 은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소망을 주신 은혜, 복음의 능력으로 인내하며 승리하게 하시는 은혜,....

 

이루 다 셀 수 없는 이 모든 은혜들을 생각할 때, 정말 한량 없는 은혜, 값을 길 없은 은혜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로 영광 돌릴 때 더욱 더 은혜가 은혜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들은 이미 받은 은혜에 진실되게 감사를 고백하시고, 또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을 기대하며, 일평생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감사의 주인공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성경속에 숨어 있는 은혜들을 발견해 보고,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은혜를 느끼며, 감사로 나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게 하라는 말씀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오늘 말씀 잘 들으시면 이 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실 겁니다. 말씀 듣는 중에 은혜가 정말 은혜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감사로 나아가시는 성령님의 감동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라는 단어는 언제들어도, 언제 읽어도, 늘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는 포근함이 있습니다. 오늘 함께 불러본 은혜(손경민 작사, 작곡)”라는 찬양곡의 가사에는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찬양 가사 그대로가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의 제목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개역개정 한글성경에 은혜라는 단어가 총 291번이 나오는데, 첫 번째로 나오는 말씀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이고, 마지막 291번째 말씀은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21) 이 말씀입니다.

 

홍수로 세상이 멸망할 것을 예고 하시면서, “그러나라고 노아를 콕 집어서 생명을 보존케 하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멸망과 심판의 그 날에 노아처럼 꼭 집어서 은혜 입은 자가 될 것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 계시록에는, 끝까지 믿기를 거부한 자들이 무서운 형벌을 받게되는 무시무시한 예언의 말씀이 기록되어있지만, 여기서도 그러나주 예수의 은혜는 모든 자들에게 있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성경이 마무리 됩니다.

 

은혜는,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 주시는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흔적이 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은혜가 있어야 우리의 삶이 유지 되고, 보장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우리 마음 속 깊이 은혜를 간직하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그 은혜들을 후손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진정으로 은혜가 은혜 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왜 은혜 받은 대로 은혜롭게 살지 못할까? 우리는 왜 은혜 받은 대로 감사하며 살아가지 못할까? 그 해답들을 성경의 상황속에서 찾아보겠습니다.

 

 

1. 예수님의 성장 이야기, 은혜 --> 사랑 --> 감사

 

누가복음 252절에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은혜라는 말이 보이지 않으나, “사랑스러워 가시더라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원어에서는 은혜(, 카리스)’라는 단어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누가복음 240절인데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라는 말씀입니다. 아기 예수님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은혜가 은혜가 되고, 계속해서 은혜가 되었더니, 지혜와 키가 자라는 외적인 성장과,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럽게 보이는 내적인 성숙이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이 은혜는,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재료입니다. 곧 은혜의 재료가 충만해지면, 그 사람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저의 옛날 모습은 로봇과 같았습니다. 표정도 딱딱해, 성격도 딱딱해, 말도 딱딱해, 심지어 사진을 찍어도 화석인간 같이, 얼음 인간 같이 땡땡 굳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깊이 만나서 은혜 받고 사랑이 물밀 듯이 들어오자 제 모습이 화석 인간에서 절임 배추처럼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뻣뻣함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은혜의 소금이 저에게 더욱 많이 부어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은혜가 채워지면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 미워하다 정도 일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사랑스러워 가셨음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기 예수님, 어린이 예수님, 청소년 예수님에게는 미워 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죄입니다. 죄를 선택하여 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 죄의 행위들을 극도로 미워 하십니다. 죄는 사랑과는 상극입니다. 죄가 활개를 치면 사랑은 머물 자리가 없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면, 우리는 죄의 유혹에 이리저리 휘둘리게 될 것이고, 곧 하나님으로 부터도 미움받는 대상이 됩니다.

 

나는 왜 감사의 삶을 살지 못할까?,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역순으로 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감사가 사라진 사람은 하나님이 미워 하시는 죄를 선택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죄의 유혹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점점 식어가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은혜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예전의 제 모습처럼, 로봇과 같이, 화석 같이, 딱딱하고, 건조하고, 신경질 적이고, 세상과 사람을 향해 이유 없는 분노를 쏟아내며 살게 됩니다. 참으로 비참한 인생입니다. 이왕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미움 받고 살아갈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은혜 아니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음을 기억하시고, 날마다, 때마다 은혜를 간절히 구하시고, 은혜가 충만해지도록 하나님께 매달리십시오. 오늘 추수 감사절에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큰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여서, 아기 예수님처럼 믿음 생화면 할수록 점점 하나님에게 사랑스러워지고, 그로 인하여 범사에 감사가 넘치는 기쁨의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2. 초대교회 공동체의 성장 이야기, 은혜 --> 성장 --> 감사

 

사도행전 247절에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아멘.

 

여기에서도 은혜라는 단어가 안 보입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라는 말씀 중에 칭송이라는 말이 원어에서는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값없이 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예루살렘 성 안의 모든 사람(온 백성)들이 교회의 성도들을 칭찬하는 용어로 쓰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은혜가, 세상의 좋은 평판을 말할 때 쓰였다는 겁니다.

 

앞서 예수님이 자라나시면서 점점 사랑스러워 가셨던 은혜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일대일의) 관계 속에서의 은혜라면,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세상과 사람들과의 수평적인(다면적인) 관계 속에서의 은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온 백성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한 목소리로 칭송하기를, 저 사람들은 참 은혜로운 사람들이야 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이토록 크게 칭송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초대 교회 사람들의 공통된 행동들을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 했고,

재산과 소유를 팔라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고,

하나님을 찬미(찬양)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온 백성이 칭송을 했고, 구원 받는 새 신자들이 날마다 더하여지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교회의 5대 기능이라고 하는, 예배(, 레이투르기아), 전도(선교, 헬 마르튀리아), 교육(, 디다스칼리아), 봉사(, 디아코니아), 교제(, 코이노니아)가 활기차고 왕성하게 진행 되었더니, 칭송하기에 충분하였다, 은혜의 모습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는 설명이 됩니다.

 

 

 

은혜가 은혜되면 교회는 당연히 생기가 돋아나게 되고, 생기있는 교회는 날마다 구원 받는 무리가 밀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는 날마다 칭송이 끊이지 않게 되고, 은혜가 은혜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칭송 받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는 당연하게 감사가 넘치는 교회가 됩니다.

 

수직적인 은혜가 사랑이었다면, 수평적인 은혜는 성장입니다. 이 성장은 외적인 숫자의 부흥과 내적인 영적 성장이 포함 된 것을 말합니다. 개인이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사랑으로 승화 시켜 나갈 수 있다면, 교회 공동체는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칭송 받게 됩니다.

 

여기서 또 생각해 보기를, 왜 교회들은 은혜롭게 성장을 하지 못할까? 왜 교회들은 세상에서 은혜롭다는 칭송을 받지 못할까? 이 것도 앞선 내용을 역순으로 생각해 보면 됩니다.

 

감사와 기쁨이 사라져 가고 성장을 이루어 가지 못하는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칭송 받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은혜로운 예배, 은혜로운 전도, 은혜로운 교육, 은혜로운 봉사, 은혜로운 교제가 날마다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기가 사리진 교회,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들이 유명무실하게 된 교회는, 칭송 받기는커녕 무관심과 비난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토록 기도하며 소망하는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어떻게 이루어야 할까요? 우리 각자가 교회의 5대 기능에 속하는 본질적인 행위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헌신할 때, 우리 교회는 구원의 교회, 칭송 받는 교회, 은혜로운 교회, 감사가 넘치는 교회로 평가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00교회 믿음의 공동체는, 이웃과 세상을 향한 수평적인 은혜를 발산하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을 향해 복음의 능력을 담대하게 선포하고, 칭송 받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노력하고 헌신하여, 감사와 영광이 넘치는 아름답고 복된 교회를 이루어 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용서와 화해 이야기, 용서 --> 화해 --> 감사

 

빌레몬서 17절을 읽어 드립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아멘.

 

여기서도 은혜 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라는 말씀 중에 기쁨이라는 단어가 원어로는 은혜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있는 빌레몬에게 편지를 쓴 이유가 있습니다.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습니다. 종인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쳐 나와서 기독교인으로 회심한 후, 지금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오네시모가 지금의 터기 지역에서 로마까지 그 먼거리까지 왜 도망쳐 왔는지는 모르나, 이동이 제약된 종의 신분으로 멀리까지 도망친 것을 보면, 아마도 범죄를 저질렀거나 주인에게 큰 손해를 끼치지 않았을까 추측이 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의 회심과 열심의 이야기를 들려 준 후, 허락해 준다면 오네시모가 계속 여기 로마에서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습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도망친 종을 잡으러 올 수도 없는 상황임에도, 정식으로 종을 용서해 달라고 정중히 요청하는 바울이나, 도망친 종인 오네시모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빌레몬의 모습이나 참으로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진정한 화목은 서로의 허물을 용서해 주고, 진심으로 화해를 하는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은혜의 정점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에 대해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용서하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나는 절대 용서 못해,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지 않고는 절대 용서 못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용서 못해,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절대 용서 못해단호하게 용서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의 상처와 아픔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없기에, 강압적으로 섣불리 누군가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절대 용서 못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절대적인 은혜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용서 받음으로 우리는 구원과 영생의 소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받을 것 다 받았는데, “남은 절대로 용서 못해, 예수님이니까 용서하지 나는 절대 못해라는 완고한 자세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예수님의 용서함을 힘입어 나도 용서함의 긍휼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계속 치유와 회복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계십니다.

 

교회 공동체는 용서함 받은 자들의 모임인 동시에, 용서를 베풀어 가는 화해의 공동체입니다. 아직 마음에 큰 상처로 인해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우리 주님의 십자가 은혜와 용서의 능력으로, 용서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난 절대로 용서 못해 라는 마음은 거두시고, 나도 빨리 용서의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용서하면, 막혀 있던 감사가 활성화 됩니다. 용서하면,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참 평안을 맛보게 됩니다. 용서하면,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의 참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날마다 심령 천국의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용서하면, 범사에 감사함이 넘치고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실 수 있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해 과거의 상처와 분노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누구든지 다 용서하고, 어떤 사람과도 다 화해하고, 오직 이미 용서함의 은혜를 받은 천국 백성으로서, 위로와 기쁨과 감사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4. 믿음과 영생 이야기, 고백 --> 부활 영생 --> 감사

 

이제 드디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라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고백은 아무나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고백이지만, 결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가벼운 고백이 아닙니다.

 

지금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여기저기서 넘쳐나고 있지만, 이 말을 고백하는 당사자가 누구이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면, 이 말이 가식적인 자기 포장으로 하는 말인지, 처절한 삶의 몸부림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된 고백인지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이 고백의 진실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성령과 동행하면서 어떤 고난 가운데에서도 충성된 삶으로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수고하는 자의 고백이 될 때,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맥추 감사절이든, 추수 감사절이든, 우리가 감사절을 맞이하여 가장 진실되게 고백해야 하는 것은, 구원받은 은혜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특히, 바울이 이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할 때, 만삭되지 못한 자신에게조차 부활의 영광을 얻으신 예수님을 보게 하신 그 은혜를 강조하여 감사 드렸습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감사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 주님이 부활하셨기에 나도 부활 할 수 있다는 사실, 죄인 중의 죄인인 나 같은 인생에게 까지 부활의 은혜를 입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최대의 감사, 최고의 고백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라는 고백이, 참으로 가슴에 깊이 와닿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이 고백이 철저한 자기 부정, 자기 버림, 자기 비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겁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 중의 가장 작은 자이며, 교회를 박해한 자라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다른 서신서의 고백을 덧붙이면, 바울 자신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딤전 1:13)였으며, 배설물과도 같은 잘못된 신념(자신만의 의로움, 지식, 율법)을 따르던 자(3:8)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자기 스스로를 처절하고 통렬하게 부정했습니다. 믿음의 고백은, 내가 철저하게 십자가에서 죽고, 은혜로만 다시 살아난 목숨이라는 사실을 가감 없이 드러낼 때 은혜가 은혜 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감사가 감사 되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도 지금껏 신앙생활 동안 이미 많은 횟수의 고백을 통하여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라는 고백을 나름대로 드려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오늘 추수 감사절에는 특별히 오늘 은혜가 은혜 되게 하는 말씀들을 인용하여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내 몸과 마음에 항상 은혜가 떠나지 않게 하시고, 내가 점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랑스러워 가게 하실 것을 믿으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감사로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자신과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으며, 구원 받은 무리가 날로 더해지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심을 믿으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감사로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영혼이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고, 영원한 용서의 기회를 얻은 것처럼, 나도 세상의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로 이끌어 주심을 믿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감사로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악한 자 중의 악한 자였으며, 교만과 거짓의 선봉자 였으나, 십자가 구원의 은혜로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품고 사는 하나님 나라의 예비된 백성이 된 것을 참 되게 믿으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감사로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아멘, 참으로 아멘입니다.

 

우리는 이왕에 은혜 받은 자로 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하나님 앞에서, 세상 앞에서, 언제 어디서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당당하게 고백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은 우리에게 은혜를 기억하게 하여 감사로 나아가는 절기입니다. 감사의 고백은 진실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 받은 만큼, 칭송 받은 만큼, 용서 받은 만큼, 부활의 주인공이 된 만큼, 오직 감사 받으시기 합당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입술을 크게 열어 감사의 고백을 드리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의 진실 된 감사의 고백을 받아 주시고, 더욱 은혜를 사모하며 믿음으로, 충성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은혜로 은혜되게, 감사로 감사 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