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총(슥3:1-10)
오늘 스가랴서 3장 1절에서 10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은총이라고 하는 말씀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 아랫 사람들을 사랑할 때 쓰는말입니다. 보통으로 일반적인 사랑을 베푸는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랑을 베푸는 경우에 쓰여지는 말입니다. 예를들면 임금이 백성이나 신하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때 은총이라 그럽니다. 가령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 다음에 나라가 이제는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히고 안정이 된 다음 자기의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이 생각났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 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에 나가서 하루 아침에 죽는 바람에 요나단의 아들이 되는 므비보셋을 기르던 유모가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두려워서 어린 아기를 안고 도망가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지고 병신이되었습니다. 다윗이 친구 요나단의 자손을 찾고자하였습니다. 전국을 샅샅히 뒤져서 므비보셋이라 하는 절름발이, 즉 절고있는 친구의 아들을 찾아만났습니다. 특별히 사랑을 베풀어서 왕궁에서 왕자들과 함께 거하게 하고 왕의 상에서 늘 같이 먹고 지내도록 특별한 배려를 베풀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은총이라 합니다. 우리들에게 두고 이야기하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보통 베푸는 사랑, 햇빛을 주시고 공기를 주시고 맑은 물을 주시는 것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은총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하나님의 은총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I. 속죄의 은총(1절-5절)
1절에서 5절에 본문을 읽기전에 예수님의 교훈에서 속죄하는 일, 사죄하는 일이 얼마나 큰 은총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 이른 아침에 많은 사람들이 여자 한명를 끌고 왔습니다.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여자들은 모세 율법에 의하면 돌로 때려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여자가 끌려서 예수님앞에 나올 때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말하게 되면 새파랗게 질려서 벌벌 떨고 섰습니다. 자기의 운명은 이제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달려있는 겁니다. 자기의 운명을 완전히 예수님께 맡긴 상태입니다. 두목들과 사람들이 예수님께 끌고 온 것은 예수님을 존경해서 예수님의 처분을 따르려고 온 것이 아니라 이 여자의 사건으로 예수님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예수님을 올무에 얽어 맬 생각에서 끌고 온 겁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그 여자의 죄 보다 끌고 온 그 사람들의 죄가 더 악질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이 여자가 간음하다 잡혔으니 돌로 칠까요 말까요 하고 따졌습니다. 왜냐하면 돌로 쳐 죽이라 그러면 당시 유대나라가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에 사형을 언도하거나 집행하는 일은 총독의 권한인지라 로마법에 저촉이됩니다. 로마법에 유대인들은 사형집행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이라 그러면 로마법에 걸리는 겁니다. 만약에 죽이지 말라고 하면 모세율법에 저촉이됩니다. 왜냐하면 간음한 여자는 반드시 돌로쳐죽이게 되어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잘 아는 두목과 패거리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얽어 헤치려는 의도가 뻔한 것이 아닙니까?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땅에다 글씨를 썼습니다. 난리를 치던 사람들이 웬일인가 하고 보니 자기들의 죄를 낱낱이 다 써놓았습니다. 자기들이 언제 어디서 무슨짓을 했는지 다 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가 찰 노릇이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일어나시더니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들어 증인으로서 먼저 치라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돌을 들어 쳤다 가는 예수님께서 너는 죄가 없느냐고 따지는날에는 자기들이 먼저 죽게 되었습니다. 돌로 치자니 양심이 괴롭고 안치자니 왜 못치느냐 하고 따질때 할 말이 없고 무리지어 왔던 사람들이 하나 하나 모두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아무도 없고 여자만 홀로 예수님앞에서 있을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를 고소하는 자가 없느냐고 할 때 대답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문 밖에만 나가도 고소할 수 있는사람들이 많았기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묻기를 너를 정죄하는 자는 없느냐? 할 때 없다고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그이유는 아무나 정죄할수 있는 것이 아니기때문입니다. 그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나는 살았구나, 저런 분을 위해서는 내가 목이 열 두 개라도 다 바쳐서 한이 없겠다고 생각을 안 했겠습니까? 그때 사죄받은 감격과 은총이 얼마나 크겠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 여자는 당연히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치 않다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은총 가운데 사죄의 은총이 최고로 큰 겁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5절까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살아 남아 돌아온 사람들중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서 제사장 노릇은 할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대제사장인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는 대제사장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가랴가 환상을 보는 중에 대제사장이 여호와의 사자앞에섰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앞에 섰는데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유대나라의 가장 경건한 사람도 이렇게 더러운 옷을 입었듯이 오늘날에 목사도 별 것 없는 죄인이요 장로도 다 별것없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사탄이란 놈이 나타나 여호수아를 대적을 하고 훼방을 하고 참소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 앞에 섰는 제사장은 말도 못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죄인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여호수아를 책망하며 죄를 들추어 냈습니까? 오히려 참소하는 마귀를 하나님이 책망하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죄를 들추어 낸 사탄을 오히려 책망합니다. 여호수아에게는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내가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고 더러운 옷을 다 벗겨버리고 깨끗한 옷, 아름다운 옷으로, 완전히 바꾸어 입혔습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겉으로는 거룩해 보여도 심령은 죄가 많고 더러운 죄인이라도, 예수님앞에 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다 사해주시고 예수님의 의로 옷을 갈아 입혀 주신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가 용서 받은것처럼 예수님 앞에 나오면 용서 못받을 죄가 없습니다 드러난 죄도 있고 숨은 죄도 있습니다. 정말 사람들이 볼 때 큰죄도 있고 별로 하찮게 여기는 죄도 있습니다. 예수님앞에 나오기만 하면 무슨 죄든지 다 용서함과 함께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나오지 않기 때문에 용서받지못하는 것입니다. 숨은죄 때문에 고민하는 분, 죄책감을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예수 믿는 기쁨이나 구원의 감격이 없는 분들은 이 시간에 예수님 앞에서 죄과는 이미 십자가로 해결되었으므로 죄책감을 떨쳐버리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죄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또는 죄의식이 없는 사람은 말할 필요가 없고 숨은 죄든 드러난 죄든 큰 죄든 작은 죄든 죄 때문에 고민하시는 분은 예수님이 2천년전에 해결한 문제를 왜 고민하고 있습니까? 주님앞에 나와 자복하고 떨쳐버리십시오.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 얼마나 떨고 괴로워했습니까? 주님 앞에 나와서 개끗이 용서함 받고 즐거움으로 돌아갔는데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뭡니까? 대속하심을 믿는 거지 다른겁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은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고 죄책감을 떨쳐버리고 죄에서 해방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으로 바꿔입혀주신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심을 믿고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속죄의 은총입니다.
II. 사명의 은총(6절-7절)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집을 다스릴것이요. 내 뜻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사명이 우리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사명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사명은 생명과도 같은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명을 위해서 혹은 사명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6절 7절의 내용을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 곳에서는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대제사장 노릇을 할 수가 없었기때문입니다. 성전이 없었기 까닭입니다. 그런데 학개선지자와 함께 포로생활에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돌아왔지만 실상 영적으로 볼 때 더러운 옷을 입은 죄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악의 옷을 먼저 벗겨버리고 그에게 죄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네가 내 율례를 잘 지키면 너는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즉 성전을 다스릴 것이요. 내 성전 뜰, 즉 제단을 지킬것이며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왕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제사장 노릇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제사장이 일감을 계속 수행할수있도록 하는 허락입니다. 즉 여호수아에게 허락하신 내용은 사명의 은총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사야 선지자도 백성들만 죽일놈, 죽일놈 하고 욕하다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후에 자기의 죄를 깨닫고 제거함을 받은 다음에 자기 자신의 변화가 먼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낼꼬 할 때 자기를 보내달라고 해서 보냄을 받지 않습니까? 여러분 죄문제를 깨끗이 해결하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있는 사람에게 이런 사명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은 최고의 은총입니다. 중국의 옛날 고사를 보게되면 갓끈 끈은 용서와 충성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임금님이 잔치를 크게 베풀었습니다. 왕궁뜰에 신하들과 문관과 무관들 만조백관이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촛불을 켜 놓고 즐겁게 술잔이 돌아 가고 흥이 막 돋우어지는데 회오리 바람이 부는 바람에 궁전뜰에 켜 놓았던 촛불이 다 꺼졌습니다. 그때 초청을 받았던 무관중에 장수 하나가 왕의 후궁이 너무 아름다워 홀딱 반하고 있다가 불이 꺼지니까 확 끌어 안아버렸습니다. 이 후궁이 장수의 갓끈을 잡아 뜯어버렸습니다. 이제 장수는 죽은 겁니다. 갓끈이 후궁의 손에 뜯겼으니 피할도리가 없습니다. 이 후궁은 임금님 앞에 가서 바로 어떤놈이 나를 끌어안기 때문에 내가 갓끈을 끊어 가지고 왔다고 일러바쳤습니다. 장수는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고 있습니다. 불을 켜느라고 수선을 떨고 있을 때 임금이 명령하기를 모두 조용히 하라고 하더니 갓끈을 몽땅 다 끊으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누구의 명령이라고 갓끈을 안 끊겠습니까? 갓끈을 모두 끊었습니다. 손에 모두 들고 있는데 이 장수는 갓끈이 없습니다. 불이켜지면 들통나서 죽는 겁니다. 이때 임금이 갓끈을 모두 집어 던져버리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안던질 재간이 없습니다. 모두 던진 다음에 임금이 다시 불을 켜도록하고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 처럼 잔치가 끝났습니다. 이때 장수가 어떻게 생각했겠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임금이 자기를 들추어 내자면 못 들춰어 내겠습니까. 임금이 짐작을 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없었던 것 처럼 용서해 주시는 것은 그장수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임금님의 배려가 아닙니까? 저런 임금을 위해서는 내가 목숨이 열두개라도 다 바쳐서 한이 없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적군이 침략해 들어오고 나가 싸울 때 목숨을 내 놓고 싸워 대승리를 거둔겁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사람을 누가 감당을 합니까? 그 나라가 매번 싸울 때 마다 이기고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갓끈 끊은 용서와 충성 아닙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앞에 우리의 죄를 또는 과거를 들추어 낸다면 천하에 있는 쥐구멍이 다 모자랄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즉 드려난 죄, 숨은 죄, 큰 죄, 작은 죄, 전부 예수님앞에 나와서 사죄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제는 죄책감을 떨어버리고 이제는 기쁨을 얻을시고 감격속에 목숨 내 놓고 사명에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더러운 죄의 옷을 벗은 후 아름다운 대제사장의 옷을 입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명을 감당한 것은 하나님의 크신은총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사명주신 은총에 감격하여 최선을 다 하시기를 바랍니다.
III. 평화의 은총(8절-10절)
8절에서 10절까지 읽어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말을 들을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종 순을 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앞에 세운돌을 보라 한돌에 일곱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 길것을 새기며 이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말씀은 바로 평화의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겠다는 뜻 입니다. 여러분 한 가정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섞여 살면 참 불행스러운 일이 많습니다. 한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가고 한 사람은 믿음과 상관 없이 살아가게되면 가정이 얼마나 불편합니까. 또 예수를 믿어도 식구따라 믿음이 다를 때 역시 불편합니다. 예를들어 다윗임금이 예루살렘을 왕도로 정한 후 예루살렘에 성막을 아름답게 짓고 오벰에돔의집에 있던 법궤를 메어 올립니다. 얼마나 임금이 기쁜지 그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열심히 춤을 추는데 자기 아내되는 미갈, 즉 사울 왕의 딸이 창밖으로 내다보고 왕이 체통없이 춤을 춘다하여 나무라고 업신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둘 중에 누구를 칭찬하셨습니까? 다윗은 누가 뭐라해도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이 기쁨으로 춤을 추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무슨 체통입니까? 하나님께서 미갈에게 진노하시매 평생 아기를 못 낳고 혼자 외롭게 살다 죽었습니다. 이처럼 부부지간에도 믿음이 다르면 불편하고 괴롭습니다. 또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빠 나사로와 언니 마르다와 동생 마리아 이 삼형제가 하나같이 잘 믿으니까 예수님이 즐겨 찾으시고 편히 쉴 수 있는 행복한 가정, 복된 가정이었습니다. 온 가정 식구들이 합심하여 주를 섬길 때 평화로운 가정이 되더라는 말입니다. 본문를 다 읽고 이미 간단하게 말씀드렸지만 여호수아 대제사장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 다음에 나의 종 순을 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순이라는 말은 새싹이라는 말 입니다. 즉 새싹이되는 그리스도를 보내리니 그가 메시아 왕국을 이룩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일곱눈을 가진 돌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은 돌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만민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 성령으로 성도들 마음속에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하루의 죄악을 해 하리라." 는 말씀은 예수님이 이땅위에 오셔서 죄악을 단번에 제해버리고 평화의 왕국이 이룩되어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여 오늘 저녁에는 내 집에서 잔치하고, 내일저녁에는 네집에서 잔치하며, 서로 초대하는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지리라 이 말입니다. 이사실은 메시아의 초립에서 이루어질 영적왕국을 말합니다. 즉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교회를 가리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속죄의 은총입니다. 속죄는 모든 은혜의 왕자입니다. 속죄없이는 천국도 의미가 없기때문입니다. 속죄다음에는 사명의 은총입니다. 사명은 성도에게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자에게 허락하시는 은총은 평화입니다. 육체적인 평안보다는 영적인 평화가 더욱 귀한은총입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전쟁이 여호와께 속했다고 하면 평화도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없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도 하나님의 허락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겁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예수, 남편의 마음속에도 예수, 아들 딸 마음속에도 예수, 바로 이렇게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속에 평화의 세계를 이루어 주실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고 하셧습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평화로운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평화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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