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십자가 사 53:1~9, 갈 6:11-18
토미라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수학 실력은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온갖 방법을 시도해 봤습니다. 그래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방법으로 천주교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러자 첫 날 학교에서 돌아온 토미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첫 날이라 그러겠지 하고 엄마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매일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학기말이 되자 토미는 성적표를 가지고 왔는데, 수학에서 A학점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엄마는 "얘 이거 어찌 된 거냐? 수녀님들 덕에 이렇게 된 것 맞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토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있잖아, 엄마! 학교에 간 첫 날 첫 시간이 수학시간이 있었는데, 교실 앞에 더하기표인 십자가가 걸려 있잖아! 그런데 거기에 한 사람이 못에 박혀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생각했지! 이 학교에서는 수학을 제대로 하지 않고 어물쩍거리면 안 되겠구나. 잘못하면 나도 저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는 벌을 받겠구나 생각하고 정신을 차린 거지!". 아무튼 토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한 어린이를 수학 성적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역할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8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더 나가서 고전1:22-24에서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했습니다.
고난 주간을 앞두고 종려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자랑스러운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왜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가 자랑스러운 십자가인가?
1.십자가는 나의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 성령님과 더불어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 분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한 마디로 대속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지만 아무 죄가 없는 분이셨지만 죄인들을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사실에 대해 본문 사53:4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라고 증거 했습니다. 사람들은 오해하여 예수께서 자기 죄 때문에 징벌로 저렇게 수치스런 십자가형을 당하게 된다고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또 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에 찔리고, 창에 찔리고, 못에 찔리고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상하셨습니다. 당시의 채찍은 가죽에 쇠붙이가 달려 있어 채찍질을 하면 온 몸에 휘감기며 살점이 떨어지는 아주 잔인한 고문 도구였습니다. 또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매달려 있으면 온 몸의 체중이 못 박힌 손목과 발목에 실리게 되어서 살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지고 부서져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옆구리에 창을 맞으셨을 때 심장이 터져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 피는 우리의 죄를 속하는 보혈의 피 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흘리신 보혈이 우리의 죄를 사하는 능력의 보혈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마치 양과 같다고 말합니다. 양은 온순해 보이지만 아주 고집스럽고 미련한 동물입니다. 게다가 눈이 나빠서 먼 데를 잘 보지 못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돌보아주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자기 멋대로 갑니다. 인간이 양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제 멋대로 죄악의 길로 가는 죄인입니다. 이런 우리 무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셨고,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이사야는 그 사실에 대해 9절에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아주 신기합니다. 사형을 집행한 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강도들과 섞어서 장사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리마대 요셉이 등장해서 자기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새 무덤을 헌납합니다.(마27:57~61)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부자의 무덤에 묻히게 됨으로 이 예언의 말씀이 절묘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전적으로 모든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대속(代贖)이라 부르는데, 죄 값을 대신 치렀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코로나바이러스처럼 중세 유럽에 페스트가 돌았습니다. 한번 감염되면 반드시 죽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습니다. 프랑스 마르세이유에도 페스트가 번져 삽시간에 죽음의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의사들도 속수무책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의사들이 모여 의논을 합니다. 묘안이 없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의견을 냅니다. 페스트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면 치료약을 개발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말에 모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일을 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 기용(Guyon)이란 의사가 나섭니다. 그는 밤새 기도하고 결단을 내립니다. 시체를 해부하고 여러 가지 조사를 하고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2시간 만에 죽고 맙니다. 그가 희생당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페스트에서 구원받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게 대속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죄가 사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용서와 사랑입니다.(롬5:8,롬8:35-39) 십자가를 늘 생각할 때마다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고후5:21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믿고 회개할 때 죄 사함을 받아 의인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십자가는 자랑스러운 십자가가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믿고 회개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십자가에는 나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의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사실을 5절(하). “ ...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가 치유가 일어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중요한 부분이 ‘치유’의 축복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치유해 줍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영적인 상처와 육적인 질병과 온갖 문제와 고통들이 우리를 억압합니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치유되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마라의 쓴 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통과하는데 물이 없어 고생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물을 발견했는데 마실 수 없는 쓴 물입니다. 애를 태우며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비방을 가르쳐줍니다. ‘한 나무’(출15:25)를 지시해 주면서 물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순종했더니 정말 쓴 물이 변하여 단 물이 됩니다. 그 나무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 합니다. 또 12장에 보면 주님을 예표 하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므로 장자를 치는 재앙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을 단절시키고, 원수처럼 분리시킵니다. 이게 곧 영적 사망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분리’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영과 육의 분리요,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참 생명이 없고, 은혜가 없고,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고, 축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함으로 다시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중보자 즉 대제사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유일한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이란 단어가 라틴어로 ‘Pontifex’인데, ‘다리를 놓아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인해 끊어졌던 관계의 다리를 다시 이어주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이 되시어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내가 화목(和睦, Reconciliation)을 이루게 되는 겁니다. 이를 가리켜 바울은 롬5:1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 진리만이 우리를 죄에서, 사망에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합니다. 세상의 다른 조건은 하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억만금도 화려한 권세와 명예도 헛것입니다. 화학자로, 미생물학자로, 광견병 백신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부귀영화를 모두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종이 가까워지자 그 모든 게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며 한 손으로 아내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십자가를 꼭 붙잡았습니다. 드디어 숨을 거둡니다. 고통스러워하던 그의 얼굴이 이내 평안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단 한 가지 구원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갈 6:14을 통해 이러한 구원의 십자가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 즉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십자가이기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볼 때 감격이 있습니다. 북한 압록강 변에 할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 건너편 중국 땅에 어느 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50년 만에 교회의 십자가를 보신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매일 2시간씩 걸어와 강가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강을 건너기 시작합니다. 강을 건넌 할머니는 교회에 도착해 목사님께 보자기를 내어놓습니다. 그 안에는 할머니가 50년 동안 모아온 십일조 예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배고파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이 예물을 드리러 왔습니다." 50년 동안 모아온 할머니의 십일조 앞에서 목사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할머니는 다시 강을 건너 북한으로 가시며 십자가를 바라보며 계속하여 기도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나라를 긍휼히 여겨 달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오늘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의 표인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십자가의 길에는 영광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성형을 하고, 헬스장에서 몸매를 가꾸고, 또 문신을 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면 유대인들도 육체의 흔적인 할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할례란 요즘 말로 포경수술인데 이 할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표식이었기 때문에 이 표식은 그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할례를 받아도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운 흔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갈6:15에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본문 17절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합니다. 여기 “흔적”은 헬라어로 ‘στιγμα,스티그마’ 입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노예에게 낙인을 찍었는데 그 낙인을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이 흔적은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흔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주와 복음을 전하다가 채찍과 돌에 맞은 흔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를 따르다가 생긴 고난의 흔적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 흔적을 훈장처럼 자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묵묵히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온갖 고초를 다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는 영광, 승천 하시는 영광,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영광이 따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나타나셨습니다. 요20:20에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바울 사도가 주님 고난의 발자취 따르다가 받은 흔적은 주님과 함께 받을 영광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여긴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전도하다가 서른아홉 번씩 맞는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한 번만 맞아도 병신이 된다는 그 매를 수없이 맞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온 몸은 흉터로 뒤덮여 있었을 것입니다. 손목과 발목에는 쇠로 만든 착고에 채인 흉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한 번은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이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피투성이가 된 그를 성 밖에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행14:19). 이게 다 바울 사도가 가진 예수님의 스티그마 즉 흔적이었습니다. 그의 흔적들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영웅들도 그 얼굴에 흔적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의 얼굴의 상처는 너무나도 흉해서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알렉산더의 얼굴은 전쟁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무섭고 잔인할 뿐 그대로는 덕과 용맹을 갖춘 영웅의 모습을 갖춘 만족할 만한 작품을 그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그러한 데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우리에게 예수의 작은 흔적조차 없다면 그것은 잘못 믿은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못 먹고, 예수 때문에 병들고, 예수 때문에 매도 맞아보고, 예수 때문에 가난도 해보고, 예수 때문에 핍박도 받고, 예수 때문에 옥에도 들어가는 그 흔적이 자랑스러운 흔적입니다.
중세기의 유명한 성자인 프랜시스는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여 주님의 고난을 더 알기 원했고 또 그 흔적을 가지길 원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동굴에서 기도할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온 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웠습니다. 동굴 바닥에서 마구 뒹굴었습니다. 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손과 발에 못 자국과 허리에는 창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그 자국에서는 진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바울이나 프란시스처럼 마음으로 육체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랑스러운 흔적을 갖길 바랍니다. 정리합니다.
고난 주간을 앞두고 종려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자랑스러운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왜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가 자랑스러운 십자가인가?
♡.십자가는 나의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나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에는 영광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아멘.
<2020. 4. 1. 호현낙선. http://cafe.daum.net/sungsans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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