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느웨의 멸망(滅亡). 나훔 2:1-13절, 133.214.319장.
한때 니느웨는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깨닫지 못한 그들의 지나친 잔인함과 악행은 마침내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이제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된 것입니다.
앗수르는 그들보다 훨씬 강한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멸망할 것인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니느웨의 멸망이 직접 목격한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 본문은 실제로 주전 612년에 일어난 니느웨 멸망 사건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1.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합니다.(1-2절)
1절에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 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니느웨를 향해 방어할 준비를 하라는 이 같은 경고는 니느웨를 위한 권고의 말이 아니라 아무리 방어할 지라도 소용이 없다는 조롱의 말입니다. 니느웨를 공격하는 자에 대해 선지자는 “파괴하는 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문자적으로는 “흩는 자”를 뜻하는 이들은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을 가리킵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죄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니느웨를 공격하는 군대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도구들이었습니다. 앗수르도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는 도구로 사용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 지나친 악행과 우상숭배를 강요함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께 사용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 막대기가 불에 던져질 차례입니다.
2.니느웨를 공격하는 군대가 강력합니다.(3-5절)
그들은 피 빛으로 무장한 군대들입니다. 고대의 전사들은 적에게 두려움을 주려고 붉은 색 전투복을 입었으며 방패에도 붉은 색을 칠하거나 구리를 입혀 태양 광선이 반사되면 피를 칠한 것과 같은 효과를 냈습니다.
병거들도 번쩍이는 금속으로 치장하고 차축 끝에는 번쩍거리는 톱날 선 낫을 돌출시켜 접근해오는 것들을 모두 상하게 했습니다. 또한 “노송나무 창이 요동한다.”는 것은 병사들이 임전 태세를 알리기 위해 창을 흔들던 관습과 관련이 있는 표현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4절에 “그 병거는 거리에 미치게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 저리 빨리 가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 번개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공격은 무자비하고 신속하여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병거들은 도시 구석구석을 살피며 패잔병들을 추격하면서 불꽃같이 신속히 움직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침입자들을 막는 방어력이 무너졌음을 나타냅니다. 칼에 의해 번영한 니느웨는 이제 그 칼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급해진 앗수르 왕은 군사 지도자들을 소집합니다.
다급한 왕은 존귀한 자 곧 군사 지도자들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엎드러질 듯이 달린다”는 말은 공격에 맞서지 못하고 당황한 채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3.니느웨의 멸망입니다.(6-13절),
메대와 바벨론의 강력한 공격 앞에 니느웨는 멸망당합니다. 앗수르가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강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막대기였기 때문입니다.
1)성이 함락됩니다.(6절), 있는 힘을 다해 방어하였음에도 니느웨 성은 함락됩니다.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라고 했습니다. “수문이 열리고“라는 언급은 니느웨 안으로 물릴 듯 쳐들어오는 적들을 묘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실제로 물이 밀려들어오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티그리스 강의 지류인 테빌투와 코셔 강물이, 니느웨를 통과해 흘렀는데 강마다 니느웨를 통과하는 물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수문을 설치했던 것입니다. 대적들은 이 수문이 설치된 지역을 점령하여 수문을 열고 엄청난 물을 일시에 방류함으로써 홍수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니느웨 성벽의 일부가 세찬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성 안의 건물들이 물에 잠긴 사이에 적들은 성안으로 침입하여 니느웨를 무너뜨렸습니다. 본문은 메대와 바벨론이 앗수르를 쳐서 승리를 쟁취했던 실제적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의 승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이들의 승리는 하나님에 의해 미리 예언된 것이며 그분의 허락하심 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2)거민들이 포로로 끌려갑니다.(7절), 멸망당한 앗수르의 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갑니다. 3)군사들이 도주합니다.(8절). 멸망이 임박하자 군사들은 목숨을 보전하고자 도망하고. 백성들마저 니느웨 성을 빠져 나가기에 빠쁩니다. 번성했던 니느웨 성은 이제 그 많던 거민들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4)성이 약탈당합니다.(9절), 주민들마저 성읍을 빠져나간 상황에서 정복자들의 약탈이 시작되었습니다. 니느웨는 부를 긁어모으는 저수지와 같았습니다. 약소국가들로부터 긁어모은 재물은 실로 “셀수 없는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니느웨는 약탈자에서 약탈당하는 자로 운명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5)성이 황폐되고 거민들이 두려움에 처합니다.(10-13절), 니느웨는 그 백성들에게 사자굴과 같이 안전한 장소였고 동시에 약탈 물로 가득 찬 저장소였습니다. 유다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맹수처럼 거침없이 약탈하였던 그들의 잔혹함이 사자가 사냥감을 다루는 모습으로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잔혹하게 약탈을 자행하던 니느웨에 대해 심판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13절에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너의 병거들을 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너의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너의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너의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앗수르의 멸망에 대한 심판의 예언은 믿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심판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도록 해줍니다. 때로 악한 자가 세상에서 부귀와 번영을 누리고 평안을 누리다가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합니다. 우리가 악을 행하는 자의 풍요와 번영을 부러워하지 않고 의를 굳게 지키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굳게 확신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 인 우리는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이미 꽃아 놓고 믿음으로 전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 불신자와 악행을 행하는 자들이 잠시 번성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는 기쁜 일이 있으나 슬픈 일이 있으나 감격과 감사로 여호와 하나님께 화답함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1-2절입니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니느웨를 파괴하는 자가 니느웨를 파괴하러 올라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곧 앗수르 제국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이 맞물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앗수르 제국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북이스라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넘치는 죄가 멸망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정하며 하나님의 목전에서 자행한 우상숭배와 교만과 음행과 불의의 결과였습니다. 그러기에 죄 무서운 줄 알고, 죄의 유혹과 함정에 대해 영적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죄를 가볍게 여기고 합리화 시키며, 심지어 죄를 자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로 하나님이 심판에 대해 겁이 없고 심판의 무서움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사람들의 심령이 너무 강퍅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의 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죄를 밝히시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좋은 게 좋다고 적당히 타협하고 동조하고 맹목적으로 이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엄중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 인간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본심과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본심과 목적은 회복입니다. 회복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본심과 목적입니다. 다시 세우시고 그를 통해 선하신 주의 뜻을 이루시며 영광을 옷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든 앗수르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본심과 목적을 바로 알고 의심하지 않으며,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그가 누구든 하나님께서 다시 받으시고 회복하시고 세우시고 들어 쓰십니다. 영광의 관을 씌워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인정과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동의와 경청이며, 말씀을 따름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듯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인정과 순종이며, 말씀의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역사에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약속입니다.
3절에서 7절은 니느웨를 멸망시키러 오는 군대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과 멸망당한 니느웨의 참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자료에 의하면 니느웨성은 주전 612년경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약 500여 년 만에 앗수르 제국의 흥망성쇠의 막을 내린 것입니다.
이어 8절 이하 13절은 니느웨의 어제와 종국에 대한 말씀입니다. 8-9절입니다.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풍요롭고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8절의 니느웨가 ‘물이 모인 못 같다’는 것은 당시 니느웨에는 물이 풍부했음을 알게 하고, 그로인해 물이 많은 정원들과 과수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앗수르 왕 산헤립 당시에는 니느웨에 50Km에 달하는 수로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9절을 보면 니느웨에는 은과 금이 풍부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도시가 철저하게 파괴돼 공허하고 황폐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 존재한 나라는 어디이며,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누구일까
요?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까 이집트라고도 하고, 중국, 일본이라고도 하고, 우리나라도 오래된 나라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중국의 이충윤이란 사람으로 257세를 살았다고 하고, 또한 969세를 산 성경의 므두셀라라고 합니다. 견해와 주장의 차이가 있어도 세계에는 오래된 나라들이 있고, 오래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아무리 오래 존재하고 살았다고 해도 그 마지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이 있고, 인생의 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시간이나 보이는 것을 자랑하거나 장담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세상에서의 영화, 번영, 권력을 자랑하거나 그로 인해 교만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과 역사의 마지막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소멸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영원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마음에 품고 기다리며 사는 것이야말로 인생과 역사의 진정한 지혜입니다.
실로 오늘 우리는 보이는 것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비단 오늘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어느 시대보다 보이는 것에 제한 받고, 보이는 것으로 비교하고 평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 때문에 위축되고, 보이는 것 때문에 우월감을 느낍니다. 보이는 것 때문에 실패자가 되고 보이는 것 때문에 성공했다고 자만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언젠가는 안개처럼 소멸하고 말 것이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보이는 것으로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도 선한 것이 아닙니다. 맹목적으로 보이는 것을 부정하고 정죄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들은 그 자체가 인생과 역사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의 일을 위해 기회로 주신 것임을 바로 알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영적 유익을 위해 감사와 겸손으로 지금 내게 있는 것을 사용하고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또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도 갑니다. 내일도 가고 이 달도 가고 올해도 갑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이 나를 맞는 그날까지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함께 죄가 아닌 참된 현실인 하나님의 영원을 위해 시간과 인생과 소유를 선용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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