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요나

온전한 믿음으로 욘2:1-10

nam씨 2019. 9. 21. 11:30


온전한 믿음으로 욘2:1-10, 7:20-27

 

팔레스타인의 우기는 겨울입니다. 우기가 되면 많은 비로 인해 집을 지을 수 없기에 유대인들은 비가오지 않는 건기에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집을 짓다 깊이 파는 것이 힘들면 그만 굳어진 모래 위에 집을 지어버립니다. 우기가 닥치고 비가 내리면 없던 시내가 생겨지고, 지대가 낮은 곳에는 물웅덩이가 생깁니다. 그러면 모래 위에 지은 집들이 하나씩 무너지며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힘이 들어도 깊이 파고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운 집들은 무너지지 않고 서 있습니다.

 

컬럼비아 대학의 건축학 교수인 살바도르(M. Salvador)는 건축물은 세 가지 하중을 고려해야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고정하중' 은 콘크리트 벽돌, 철골, 빔 등 구조물 자체무게를 버틸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적재하중' 은 건축물 안에 실려 있는 사람이나 각종 물건의 무게를 잘 받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동하중' 이란 건축물에 가해지는 각종 외부의 영향이나 압력인 비, 바람, , 태풍, 지진도 잘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을 반석위에 집을 지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말씀을 들어도 외면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고, 롯의 처처럼 반신반의하다 망하는 사람도 있고,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상황을 만나도 요동치 않는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견고한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소망 하면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온전한 믿음으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1.주님 앞에서 내 생각과 내 뜻을 버리고 주님께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구약 본문에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멸망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니느웨'는 고대 앗수르(앗시리아)의 수도로서 티그리스강 상류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 동쪽으로 700km 떨어진 곳입니다. 니느웨 성읍 둘레는 걸어서 3일 이상 걸리는 큰 도시입니다.(3:3) 이 성에 어린아이만 12만 명이니 총 인구는 100만을 육박하는 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4:11) 니느웨는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우상숭배가 성행했고 포로를 다루는데 잔인했습니다.

 

당시에 니느웨는 역병이 2번이나 돌고 있었고(B.C.765, 753) 일식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B.C.763)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에 대한 암시를 느끼고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멸망을 선포하므로 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욥바로 내려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1:1-3). '욥바'는 이스라엘 서쪽 지중해변 항구입니다. '다시스'는 이스라엘에서 서쪽으로 3,000km나 떨어진 지금의 스페인 지방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니느웨로 가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회개를 외치게 되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죽임 당할 위험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앗수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적대국 관계였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폭삭 망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메시지를 전하라니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코미디 프로에서 하는 말처럼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하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일이었기에 반대 길로 무작정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보다는 자기의 알량한 선입관, 편견, 자존심, 고집을 더 앞세웠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만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자기중심으로 고집하며 계속 나가는 사람은 온전한 믿음으로 나가지 못하고 믿음의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헤밍웨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서 평생 동안 선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았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식들을 신앙으로 키우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어린 시절에 주일학교 성가대복을 입고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며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라서 어른이 되면서 신앙에서 이탈했고, 급기야는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위대한 소설가로서는 세상에 남았을지 몰라도, 믿음에서 떠나 주님을 외면 한 체 하늘나라의 역사에는 아무것도 남길 수 없는 타락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즈음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꽂으려 해도 꽂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움과 공허함 속에 살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끊어야 하는 모래위에 집을 지어 허무하게 무너지는 무의미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유업을 받을 자들입니다. 이 고귀한 유업을 내던졌던 에서와 같은 경솔한 자리에 들어가지 맙시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느 상태에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고 확인해 봅시다. 신앙에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확실한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정쩡하게 처신하다 보면 마귀의 올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신앙심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며 내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의로운 결단을 하며 온전한 믿음을 향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잘 못을 깨닫는 순간 회개하고 돌이키는 믿음입니다.

 

요나는 불순종의 길을 가면서 마음이 괴로워 배 밑창으로 내려가 잠을 자면서 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편안히 항해하던 배에 요나 때문에 엄청난 풍랑이 일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제비뽑기를 해서 요나가 딱 걸려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탄 배에 엄청난 풍랑이 일게 하셔서 요나를 깨우고 급기야 요나는 이 모든 일이 내 탓이라고 고백하면서 나를 바다 속에 내던지라고 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1: 12)

 

이렇게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큰 물고기에 삼킴을 당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17) 큰 물고기에 대해 영어성경도 “great fish”(NIV KJV NASB)로 번역하고 있어 큰 물고기는 어류임이 분명합니다. 어류는 적어도 3가지를 요건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 척추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둘째, 지느러미를 가지고 헤엄치며 셋째, 아가미로 호흡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은 사람을 삼킬 수 있는 물고기로 흔히 고래나 상어를 상상합니다. 하지만 고래는 아가미로 호흡하지 않고 허파로 호흡하기 때문에 분류학적으로 어류가 아닌 사람과 같은 포유류에 해당하므로 고래를 언급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부적절 하다고합니다.

 

요나가 욥바에서 배로 가려 했던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으로 당시 광물이 풍부하고 무역이 성행했던 곳입니다. 이 때문에 요나가 타고 있던 배는 지중해를 항해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 어류학의 발달로 이곳은 백상아리의 집단 서식지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백상아리는 사람을 삼킬 수 있는 어류일까? 또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백상아리라고 한다면 백상아리 위 안에서 3일 동안 호흡하면서 회개한 요나(1:172:3)는 어떻게 소화·흡수되지 않고 살 수 있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어류 학자들은 현존하는 상어의 종류는 대략 400종에 이르는데, 크기로 볼 때 사람을 삼킬 수 있는 상어는 고래상어, 돌 묵 상어, 큰 입 상어, 백상아리, 뱀 상어, 흉상어류 등 10여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래상어, 큰 입 상어, 돌 묵 상어는 플랑크톤과 작은 물고기 등을 먹기 때문에 생태학적으로 사람을 삼킬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 어류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백상아리와 고래, 물개, 바다사자, 바다표범 등은 주로 해상 포유류를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난폭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을 삼킬 수 있는 상어는 백상아리와 일부 흉상어류라 할 수 있는데 서식분포도를 볼 때 요나가 던져진 지중해에는 흉상어류가 서식하지 않는다 합니다. 뱀 상어와 흉상어류는 북위 40도 미만의 열대해역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백상아리의 위에 대한 특징은 요나를 삼킨 물고기에 대한 고민에 종지부를 찍기에 충분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상어는 다른 동물과 달리 먹이를 자주 먹지 않기 때문에 위가 먹이로 채워져 있을 때보다 비어 있을 때가 더 많고, 대체적으로 잘 소화되지 않는 먹이를 삼켰을 때에는 일단 그대로 위에 저장하고 있다가, 거북등처럼 도저히 소화시킬 수 없을 때에는 토해내는 경우가 종종 목격된다고 합니다. 실제 길이 5m 이상인, 사육된 뱀 상어의 경우 먹이를 1개월 이상이나 소화시키지 않은 채 위에 저장하고 있는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합니다.

 

백상아리의 경우 큰 먹이를 먹기 때문에 위의 용량(보통 사람 위 부피의 3배 정도)이 클 뿐만 아니라 비어 있는 시간이 일반 상어에 비해 더 긴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보통 비어 있는 위에는 일부 위액과 기타 점액 물질, 그리고 대부분 공기로 채워집니다. 요나는 사람 위 부피의 3배 정도에 달하는 일종의 온실 속 공기주머니에서 3일 동안 견디다가 자신의 신발과 옷 등 도저히 소화되지 않는 물질 덕분에 토해진 것입니다. <도움말 주신 분 한국 창조과학 회 최윤 교수(군산대 해양생명과학부 어류분류생태학) >

 

중요한 것은 요나가 자신의 불순종을 깨닫고 나의 탓이라 하며 죄를 회개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되 버리시지 않습니다.

 

요나의 기도에는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눈앞에서 쫓겨났어도 반드시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다고 결단합니다. 본문 4절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세상에서 힘들고 절망스러운 일을 당해도 요나처럼 주의 성전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절망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갔지만 주님께서 구원해주시리란 확고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본문 6절에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우리를 외면하고,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본문 8-9절에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불순종 하다가 혹독한 징계를 맛본 후 정신을 차리고 불평 버리고 감사로 제사를 드리고 순종하며 살기로 서원하며 결단한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킬 줄 아는 자가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죄를 깨닫는 순간 회개하여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 갖기를 소망합니다.

 

 

3.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요나가 처음부터 순종하는 믿음을 가졌다면 그런 고난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보시고 더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는 징계의 고난을 당하며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서 오직 참된 구원은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각 죄에서 돌이켰을 때 주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고, 그가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도록 다시 기회를 주셔서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신약 본문은 주님이 가르치신 유명한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7: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어리석은 사람도 집을 지었습니다. 물론 자기가 사는 집이니 열심히 집을 잘 지었을 것입니다. 기초를 닦는데,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만큼 외적인 면에, 더 많은 비용을 드려 신경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반석 위에 지은 집 보다 더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초를 반석에 세우지 아니하고 모래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건조기에는 굳은 땅처럼 보여 외관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비바람이 불 때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있었고, 스스로도 믿음 생활을 잘 하고 산다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구제했고, 열심히 기도도 했고, 십일조도 드리고, 금식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데 있었고, 높은 자리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이익을 취하는 일에는 마음을 기울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보내신 메시야 이신 예수님을 믿지도 영접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박해하고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모습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구원 받는 자가 될 수가 없기에 주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사람들을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드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행하는 자들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이요, 지혜로운 자들이라 하셨습니다. 자기 의, 욕심, 고집, 생각, 사상, 철학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 바라보고, 생각하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닮기를 소망하고, 주님 발자취 따라가는 자들이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들이요,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밥 버포드(Bob Buford)하프 타임(Half Time)" 이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신선한 도전과 감동을 줍니다. 그는 책에서 인생을 운동경기로 보면서, 이미 인생의 전반전을 치르고 후반전을 남겨놓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모든 운동 경기가 그렇듯이 하프 타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경기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남은 삶은 지금의 하프타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는 삶이 되도록 기초가 분명한, 지혜가 분명한, 순종이 분명한 온전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복된 성도들의 삶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온전한 믿음으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주님 앞에서 내 생각과 내 뜻을 버리고 주님께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잘 못을 깨닫는 순간 회개하고 돌이키는 믿음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