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최선의 선택 룻1:15-22, 눅22:54-62
우리가 인생에서 선택해야 할 중대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믿을 종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굴 믿고 누굴 의지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평생을 살 것이냐는 선택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선택하면 일생이 행복할 수 있지만 잘못 선택하면 불행과 슬픔가운데 살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선택은 직업과 직장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직장을 잘못 선택해서 늘 후회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평생을 산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남편도 떠나고, 아내도 떠나고, 직장도 바뀝니다. 그러나 한 가지 선택만은 죽음 이후에까지 영원히 유효한 것입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믿음의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거짓 신을 믿고 따르게 되면 더 큰 불의의 도구로 쓰임을 받다가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되지만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심판하실 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이렇듯 무엇보다 믿음의 대상을 바로 선택하여 바른 믿음의 길을 따르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최고, 최선의 선택”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최고, 최선의 선택은,
1.성삼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흉년을 피해 모압 땅에 내려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다시 그가 떠나온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하면서 과부가 된 두 자부에게 내게 소망이 없으니 너희 친정집으로 돌아가 새 출발할 것을 강권할 때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권고를 따라 친정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단호히 거절하며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합니다. 룻기1:16에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말합니다. 룻은 인간적으로는 홀로 된 시모를 돌보기 위해 시어머니를 선택했고, 국가적으로는 모압이 아닌 이스라엘을 선택했으며, 신앙적으로는 이방 신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룻이 기룐과 결혼하여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는 하나님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집에 들어와 살면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룻이 이 집에 들어와 가장 큰 것을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을 만난 것이고, 룻이 친정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지금까지 섬기던 하나님을 버리고 다시 모압의 우상을 섬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를 따르며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룻은 결혼한 뒤 시댁에서 섬기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친정으로 돌아가라 하니 어떻게 우상의 소굴로 다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룻은 시어머니를 붙잡고 시모를 따르겠다고 사정한 것입니다. 재물이야 다시 벌면 되는 것이고 결혼이야 하나님이 짝을 지워 주시는 것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합하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기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낙이요 기쁨이었습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 역시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배와 그물, 가족까지 뒤로 한 채 주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그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분을 위해 지금까지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빌 3:7-9). 까닭에 베드로나 마태도 그랬지만 바울 사도는 나중에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넓은 길도 있고 좁은 길도 있습니다. 넓은 길은 고속도로처럼 평탄하고 만족함을 주는 것 같고, 성공적인 인생이 되게 하는 것 같아 그 길은 많은 사람이 가지만 그 길의 마지막은 멸망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 걷는 좁은 길은 협착해서 가시밭길이요, 많은 고난이 따르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길이지만 그 길은 생명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두 길 중 어느 길을 택하고 있습니까? 넓은 길입니까? 좁은 길입니까? 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교회에 오면 믿음의 사람이지만 넓은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룻처럼, 베드로처럼 성삼위 하나님을 경외하고 따르는 길이 가장 복 된 길임을 알고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을 선택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깨닫는 즉시 회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신약 본문 눅22:61-62 에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했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 버리고 주님을 따랐고, 훌륭한 믿음을 고백하여 주님의 칭찬을 받은 자였지만 엉겁결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비겁하고 부끄러운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왜 그런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을까요? 몇 가지 그의 실패의 요인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귀한 교훈과 경종이 되고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는 기도로 준비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당할 때에 모두 주님을 버릴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절대로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민스러워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가셔서 자신에게 닥칠 환란을 위하여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 돌아와 보니 모두 자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깨우시며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깨워주시며 당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 모두 깊은 잠을 자며 기도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실패하지 않기 위하여 베드로처럼 믿음의 무장을 할 수 있는 기도의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장담 하고 결심해도 우리 자신은 너무 연약하기 때문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한 독수리가 떠내려가는 얼음 위에서 죽은 물고기를 먹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가면 폭포에 도달하는데 독수리는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만 믿고 계속 고기를 뜯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폭포에 도달하자 독수리는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오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발이 얼음에 얼어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음과 함께 무서운 폭포의 물줄기 속으로 휩쓸려 떨어 졌습니다. 날아오를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베드로는 주님을 멀찍이 따라 갔습니다. 예수께서 잡혀가시는 것을 보고 도망쳤다가 차마 아주 멀리 가지는 못하고 다른 이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같이 체포될까봐 멀찍이 주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는 그만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말대로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예수님과 함께 가서 예수님을 보호하고 때로는 자신이 어려운 것은 대신해서 주님의 힘과 위로가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말꾼이 있고, 싸움꾼이 있고, 구경꾼이 있고, 일꾼이 있습니다. 말꾼이나 싸움꾼이나 구경꾼은 우리 주님을 멀찍이 쫓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일꾼은 우리 주님을 바짝 쫓아가며 힘들고 어려운 일에 앞장서고 주님의 십자가 지고 임마누엘 신앙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서 가야바의 집 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고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여 있는 이들 곁에 같이 있었습니다. 거기는 동네 사람들과 비자와 하속들이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한 비자가 베드로를 보고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엉겁결에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있는 자리가 중요합니다. 무엇이던지 제자리에 있어야 가치를 발할 수 있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자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통곡하며 회개한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 하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깨닫는 순간 베드로처럼 즉시 회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용서 받을 수 있고, 충성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착하고 성실하고 흠 잡을 데 없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낚시를 무척 좋아합니다. 낚시 광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낚시를 가자고 하면 주일도 범하고 낚시를 가는 것이 흠입니다.
어느 날도 주일날 낚시를 갔습니다. 낚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합니다. 자연이 주는 즐거움, 기다리고 기대하는 즐거움, 그리고 잡는 손맛을 느끼는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그날 이른 새벽에 낚시터에 도착하니 도시를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을 접하니 마음이 즐거워졌습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물위로 낚시를 드리우고 월척을 낚을 기대를 하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습니다. 그래도 집사님이라서 찬송가를 콧노래로 불렀습니다. 찬송가 349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찬송이 콧노래로 나왔습니다. 두 소절을 콧노래로 부르며 지렁이를 바늘에 꿰어서 물에 던지면서 후렴부분은 기분이 너무나 좋아서 노래로 불렀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집사가 주일날 지렁이를 꿰어서 던지며 낚시하는 모습대로 주님이 받으시라는 찬송을 지금 하고 있다는 것이 깨달아 졌습니다. "이게 아닌데 이 모습이 아닌데 이 모습으로 주님이 받으신다면 책망밖에는, 바깥 어두운데 내어 쫓겨 이를 가는 결과밖에는 없는데" 하고 깨달아 졌습니다. 그래서 낚싯대는 던져 버리고 텐트로 뛰어 들어가서 대성통곡을 하며 회개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로 짐을 싸서 되돌아와서는 다시는 주일을 범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답십리 성결교회 안수 집사로 잘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깨닫는 즉시 회개를 선택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끝까지 바른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 룻1:17-18 에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했습니다. 시모는 룻의 결심이 단호함을 알고 더 이상 친정으로 돌아 갈 것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끝까지, 죽을 때까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바른 믿음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을 선택해야 믿음의 승리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선택 했다가 중도에 미혹을 받고, 핍박이 싫다고, 다시 세상 연락이 더 좋다고 믿음생활 그만 두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른 믿음에서 떠나 미혹의 길로 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의 실패자들입니다.
성도가 믿음 생활 하다 혹 잘 못된 길로 갔다가도 깨닫는 즉시 바른 믿음으로 돌아서는 자가 믿음의 승리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은 일찍이 약속된 땅으로부터 흉년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이방인의 땅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가혹한 시련이 뒤따랐습니다. 10년 후에 나오미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깨닫고 자신의 민족과 고향, 그리고 자신의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4-7절).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며, 결심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인생의 설계를 한 번 잘못 하는 바람에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흉년을 피해 잘 살아보겠다고 모압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백성이 가서 살 곳이 못되었습니다. 그곳은 이방 땅이며 우상이 있는 곳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거기는 갈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오히려 잘 살기는 고사하고 남편과 두 아들 그리고 재산을 다 잃고 소망도, 미래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음에 엄청난 상처만 가지고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잘못된 길로 온 것을 깨닫고 돌아온 탕자처럼 과감히 방향을 바꾸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뭔가 잘 못 되었다 싶으면 과감하게 방향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자존심이 상해도 과감하게 돌아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 후회를 않게 됩니다. 그래야 더 이상 믿음의 실패자가 되지 않습니다.
룻은 동서 오르바와는 달리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자신이 행할 본분을 다 지켜 행했습니다. 시모를 잘 공경하고 이삭을 주어 정성으로 공양하고 효도하는 자부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뒤로 네가 네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어떻게 네가 네 아버지와 어머니와 태어난 땅을 떠나 네가 전에 알지 못하였던 백성에게로 왔는지 내게 온전히 알려졌느니라. 주께서 너의 행한 일을 갚아 주시고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그분의 날개 아래 의뢰하러 온 너에게 온전히 보상해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1-12) 하나님은 진실한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제주도 어느 가난한 가정에 모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그만 중병에 걸렸습니다. 효자 아들이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써 보았으나 어머니의 병은 더 중해지기만 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들의 정성은 여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는, "네 어머니는 요한복음을 먹으면 나을 것이다."하고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이라 요한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들은 약방을 모조리 다니면서 요한복음 약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제주도에도, 부산에도 그런 약을 파는 데는 없었습니다. 서울까지 와서 뒤져 보았으나 헛수고였습니다.
크게 실망한 아들이 집으로 다시 내려가려고 서울 역 대합실에 들어갔는데 바로 거기서 어떤 사람이 "예수 믿으세요!"하면서 나눠주는 책에 "요한복음"이라고 쓴 것이 언뜻 보였습니다. 그 책을 한 권 얻어 가지고 온 아들이 거기에 무슨 약 처방이 있나 하여, 어머니 머리맡에서 날마다 읽어드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의 병이 스르르 사라졌고, 제주도에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구하면 찾아지고 두두리면 열린다는 것을 믿고 행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룻은 주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룻이 단순히 나오미의 말만 듣고 보아스의 침상에 들어갔다고 하면 그녀는 부정한 여인의 일을 한 것입니다. 룻은 분명히 현숙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3:11). 룻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보아스의 침상에 들어가라고 했을 때, 그녀는 그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그 일이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된 일임을 알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보아스의 발치에 누웠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녀의 믿음대로 보아스라는 좋은 남편을 만나고, 이방 여인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존귀한 복을 받은 것입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회개를 선택한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도 회개하지 못한 가롯 유다가 자살하여 죽고, 부끄러운 족적을 남긴 것과는 달리 주님의 분부를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도하다 오순절 성령 충만을 체험 하고 주의 복음을 위해 죽도록 충성을 다하다 주와 복음을 위해 영광스런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끝까지 바른 믿음의 길을 가다가 영원한 복을 받는 성도되시기 바랍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최고, 최선의 선택”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최고, 최선의 선택은,
▣.성삼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깨닫는 즉시 회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바른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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