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신앙인의 모습 마16:21-26, 갈2:19-21
어느 신자가 남의 집 신발 가게에 가서 구두를 훔쳐 가지고 나오다가 신발 가게 주인한테 들켜 구두창으로 얻어맞고 나서 누워 있었습니다. 그 가정에 목사님이 심방을 하였답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어떻게 합니까? 가서 위로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분이 하는 말이, "목사님! 뭐, 예수님은 십자가 졌는데 이까짓 것쯤이야! 뭐,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더랍니다.
참 신앙인의 모습은 주님의 십자가와 깊은 관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고,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 신앙이 없거나, 구두를 훔친 사람처럼 십자가를 잘 못 오해 하는 신자는 산 신앙을 가진 자의 모습이 안입니다. 사순절 첫 주일을 맞아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산 신앙인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산 신앙인의 모습은
1.옛 사람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성도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처형하는 사형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와는 다른 면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있는 분으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선지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요, 섭리주요, 심판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히4:15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는 상관이 없는 분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셔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것은 순전히 죄인인 저와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죄인을 자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리켜 선지자들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했습니다.(사53:6)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처형되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받을 수치와 형벌과 저주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고, 나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 하면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본문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습니다. 주님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성도들도 함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을 가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 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고, 롬 6:6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했습니다. 엡 4:22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했습니다. 골 3:9에는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했습니다.
또한 갈6:14하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옛 사람이 못 박힌 경험을 가진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세상의 것을 탐하며, 육신의 소욕과 정욕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육의 소욕을 따르며 육의 열매를 맺지 않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 체험을 가진 성도는 새 가치관을 가집니다. 마태복음 본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 영생의 말씀이 있기에 다 주님을 떠나도 자기들은 주님을 떠날 수 없다는 훌륭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이런 신앙 고백을 주님을 믿는 자라면 누구나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경험을 하기는 커녕 아직 십자가를 이해도 못하고 있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수난을 말씀하실 때 그들은 도리어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라고 말했다가 주님으로부터 “사단에 네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아직 십자가의 의미도, 자기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기 전의 가치관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누가 더 높은가에 관심이 많았고, 누가 더 큰 영광을 얻을까에 마음을 쓰고, 하나님의 나라 보다 이스라엘의 독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종종 믿음 없음을 책망 받기도 했습니다. 즉 옛 사람의 정과 욕심 그대로 가지고 세상 것을 더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주님 보다 자기 목숨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기 위해 도망치기도 하고 주님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습이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십자가의 체험이 없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고 난 후 빌3:8-9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는 고전 2:2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갈 6:14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했습니다. 바울은 주님 만나기 전에 세상 것으로 교만했던 사람이었고, 욕심과 야심도 많고, 혈기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십자가 은혜를 받고 체험했기에 그 가치를 알고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 전하며 살았습니다.
2.내 안에 예수님이 거하는 성도입니다.
♠이런 성도는 자기를 부인하며 삽니다. 십자가 은혜를 받고 체험한 성도는 자기를 부인하며 삽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대어 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버리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자기를 비운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비운다는 의미는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념무상 무아지경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신비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행이나 자기 학대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도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의 도를 닦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자기 부인은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하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성도가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는 나의 옛 사람이 나의 주인이 되어 삽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내 생각, 내 의지, 내 자존심, 내 야망, 내 명예, 내 성취, 내 영광, 내 생명 등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이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루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이런 나의 목표를 이루는 도구일 뿐입니다. 끊임없이 내가 우선이고, 나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십자가 은혜를 받은 성도는 십자가에 옛 사람을 못 박았기에 자기를 부인합니다. 끈질기게 내 안에 옛 본성이 살아나려 할 때 부인하고 내려 놓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전 15:31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했고, 고전 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했습니다.
♠이런 성도는 자기 몸과 마음을 성결케 되도록 힘씁니다. 나를 위해 지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 모든 죄를 자백하고 내려놓습니다. 회개하고 버려 다시 죄의 멍에를 메고 죄의 종노릇 하며 살지 않습니다. 내 힘과 의지로 되지 않음을 알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하여 삽니다. 그 때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성령의 은혜가 내 마음에 임하여 내 속에 더러운 죄가 사해 지고, 성령의 불로 살라 사라지게 되고, 성결하게 됩니다.
전에 내 마음에 죄가 가득 차 있을 때에는 마치 습하고 더러운 곳에 곰팡이나 나고, 벌래와 파리와 모기들이 생기고 모여드는 것처럼 사단이 여기가 좋구나! 하며 더러움으로 가득 찬자의 속에 들어 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주인노릇 하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본의 아니게 사단의 도구가 되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런 자라도 주님을 만나고 회개 하여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가 성녀가 된 것처럼 변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세리와 창기 같은 사람도 변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이런 자의 마음에 주님이 들어오시어 좌정하시게 됩니다. 그 때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고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재권이 주님께 있고,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생명도, 명예도, 권력도, 재능도, 학식도, 건강도, 자녀도, 가정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 생명 주신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적인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주인이 되어 나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본문 서신 서에서 사도 바울이 그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런 자에게는 요10:9-10절에 말씀과 같은 은혜가 임합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3.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입니다.
♠십자가를 원치 않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목적이 주님 때문에 복을 받고, 형통하고, 영광을 받기 위해 따르고자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는 주님이 다 우리 위해 지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십자가 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영광만 받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 가르침은 잘 못된 가르침입니다. 오늘 본문 마16:24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없이 영광만 받으려 하면 믿음 생활 하다 고난이 오고 시험이 오게 되면 자기 목적에 맞지 않으니까 미련 없이 신앙 버리는 자가 됩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영광도 없음을 아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다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부활의 영광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 받는 길도, 구원 받는 길도 없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다가 온갖 박해를 당하다 난 상처를 훈장처럼 자랑한 것은 장차 주님 앞에서 받을 칭찬과 상급과 면류관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고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된 것도 하늘의 산 소망을 가진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십자가 없이 내 영광만을 위해 살면 실패자가 되고 남에게 고통을 주는 자로 살게 되지만, 내가 십자가의 믿음 가지고 주님 중심으로 살면 내게도 영광이 따르지만 나를 인해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와 기쁨과 소망을 주게 됩니다. 1889년 같은 해에 히틀러(Adolf Hitler)와 아이젠하워(D. Eisenhower)가 태어납니다. 히틀러는 술주정뱅이 남편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어머니 때문에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합니다. 불량배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군대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제대합니다. 자신의 야욕을 위해 정치한다고 감옥에 드나들다가 정권을 잡았지만 그는 전쟁광이 되었으며, 유대인 6백만을 학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해 출생한 아이젠하워는 텍사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믿음을 이어 받았습니다.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간 이후에 진급을 거듭하다 히틀러가 2차 대전을 일으킬 무렵 유럽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됩니다. 그 전쟁에서 아이젠하워가 승리하였습니다. 그는 제대 후에 미국 대통령이 됩니다. 항상 믿음의 사람으로 살았던 그는 전쟁 중에도 주일예배를 드렸고, 대통령이 되서도 주일을 지켰습니다. 80세에 죽을 때 세계가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습니다. 그는 소련의 후르시초프와 정상회담을 할 때도 주일은 일정을 비워 둘 정도로 철저하게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 십자가의 주님을 사랑하고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자에게 반드시 영광이 따르게 됩니다.
♠기쁨으로 십자가 지는 성도가 행복한 성도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 십자가 지고 가는 자들도 있고, 기쁨으로 십자가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들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주시며 주님은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 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첫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데 둘째 제자는 무척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습니다. 십자가를 진 지 하루 만에 첫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예수께 넘겨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등을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둘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그는 십자가를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주시다니요! 이제 온 것도 그 때문이라구요!” 마음이 상하신 예수께서 그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아니 그렇다면 왜 앞사람은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저는 쩔쩔 매었습니까?” 예수께서 타이르셨습니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라. 그 이유는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에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가 늘어났던 것이다. 앞에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주어 힘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사랑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면 그 십자가가 결코 무겁고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주와 몸 된 교회를 위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섬기고 봉사 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게 된 것이 자랑스럽고, 보람이 되고, 오히려 기쁨이 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져 주심을 느끼며 기쁨으로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행복한 성도가 됩니다. 우리 모두 자기 십자가 지고 즐겁게 주님의 발자취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산 신앙인의 모습은
1.옛 사람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성도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처형하는 사형 도구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 체험을 가진 성도는 새 가치관을 가집니다.
2.내 안에 예수님이 거하는 성도입니다.
♠이런 성도는 자기를 부인하며 삽니다.
♠이런 성도는 자기 몸과 마음을 성결케 되도록 힘씁니다.
♠이런 자의 마음에 주님이 들어오시어 좌정하시게 됩니다.
3.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입니다.
♠십자가를 원치 않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영광도 없음을 아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쁨으로 십자가 지는 성도가 행복한 성도입니다.
우리 모두 형식적인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로 알고, 체험하고, 십자가 신앙으로 무장하여 주님 따르다가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는 산 믿음을 소유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위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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