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이사야

사40장: 이스라엘의 회복

nam씨 2017. 1. 7. 11:55



사40장: 이스라엘의 회복

이사야 40장 이하도 1장부터 39장까지 쓴 선지자 이사야가 쓴 내용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2:38, 40에서 이사야 53:1과 이사야 6:10을 인용하면서 그것들이 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임을 증거하였다.

1-11절, 하나님의 오심

[1-2절]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 . .

이사야 39:6-7에서 유다 백성이 장차 바벨론에 포로될 것을 예언한 선지자는 본장에서 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회복될 날을 암시한다. 선지자는 말한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로하신다. 그것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로 인해 징벌을 받아 멸망당하고 오랫동안 바벨론 포로생활로 고생할 것이지만, 이제 회복의 날이 올 것이다. ‘그 복역의 때’라는 원어(제바아흐)는 ‘그의 전쟁’ (KJV, NASB), 혹은 ‘그의 고역’(NIV)이라는 뜻이다. “그의 복역의 때가 끝났다”는 말은 그가 죄의 징벌로 받은 포로생활의 기간, 즉 전쟁 같은 고역의 기간이 찼다는 뜻이다. 유다 백성은 그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징벌을 충분히 받았고 이제 그 죄악의 사함을 받았다.

[3-5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 . . .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이루어질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메시아의 강림을 암시한다. 이 예언은 신약시대에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에게 적용되었다. 선지자는 말한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여호와의 길’ ‘우리 하나님의 대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오실 것을 보인다. 여기에 ‘외치는 자’는 메시아의 강림을 준비하며 선포했던 세례 요한을 암시한다. 그는 광야에서 회개를 전파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준비시켰었다. 광야와 사막은 거친 세상의 현실이나 인생의 수고로운 삶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셔서 회복시키실 것이다.

선지자는 계속 말하기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한다. 골짜기는 거짓과 미움과 탐욕과 음란으로 복잡한 사람들의 죄악된 심령을, 산과 작은 산은 사람들의 교만한 마음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들을 다 버리고 겸손히 회개하는 자들만 영광의 하나님을 영접할 수 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는 말씀은 신적 구주의 강림을 말하는 중요한 계시 내용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자기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메시아의 성육신(成肉身)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1:14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하였다.

본문은 마지막에 부언하기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말씀하셨음이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오심,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에 대한 이 예언은 하나님의 입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니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신적 메시아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언하신 바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6-8절]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 . .

6-8절은 인생과 세상적 영광의 헛됨을 증거하며, 그것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한다. 선지자는 말한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고 떨어질 것이다. 인간은 허무하다.  그것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이다. 인생의 허무함은 그들이 죄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다. 이 말씀은 특히 이스라엘 백성의 쇠약함과 멸망을 두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 말씀은 헛되지 않고 영원히 서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있다.

[9-11절]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 . .

9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에 대한 소식을 널리 전하라고 말한다. 그는,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 시온이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 예루살렘이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 . .”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KJV, NASB).18) “너희 하나님을 보라”는 말씀은 장차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오실 것을 증거한다.

10-11절에서 선지자는 메시아의 오심을 좀더 구체적으로 예언한다. 그는,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고 말한다.

주 여호와께서는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며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다. 그는 공의로 심판하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그는 선한 일을 행한 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며 악한 일을 행한 자들에게는 벌을 내리실 것이다(계 22:12). 또 그는 좋은 목자이실 것이다(요 10:11). 그는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들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고,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실 것이다. ‘젖먹이는 암컷들’(NASB)19)은 교역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양들을 모으시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심을 가리키고, 양들을 안으시는 것은 보호하심을 가리킬 것이다.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인간의 삶이 헛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영원하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고,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사도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였다(벧전 1:24). 인생이 허무한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 말씀은 많은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고 쇠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은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헛된 영광을 추구하고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만 소망하자.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신적 구주께서 오셨다.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하였다(요 1:14). 성육신하신 하나님, 신적 구주이신 그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도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라고 썼다(딤전 1:15). 우리는 이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고(마 28:19-20), 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다(막 16:15).

셋째로, 이제 우리는 신적 구주의 인도하심만 따르자. 신적 구주께서 능력의 팔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품에 보호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공급하시며 마지막 날에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0:27-28). 요한계시록 14:3-5는,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만 4천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고 말한다. 우리는 오직 구주 예수님만 따르자. 그가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 되자. 그의 말씀이 성경책에 있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교훈대로 행하자.

12-17절,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12절]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보았으랴.

선지자는 말하기를,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보았으랴”라고 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가 심히 크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 또 바다와 산들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 우리가 사는 지구가 매우 크지만, 그것은 온 우주에서는 한 작은 점에 불과하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거대한 공과 같다. 그 둘레는 약 4만 킬로미터가 된다. 표면 면적은 약 5억 천만 평방킬로미터, 그 중 바다가 육지보다 약 2.4배 많다. 육지의 넓이는 약 1억 5천만 평방킬로미터이다. 육지에서 가장 높은 산은 높이 8,848미터인 에베레스트 산이며, 바다에서 가장 깊은 곳은 깊이 약 11,000미터인 마리아나 해구이다.

그런데 이 큰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아홉 개의 행성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태양에서 가장 먼 행성인 명왕성은 태양에서 약 60억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그러면 태양계의 직경은 약 120억 킬로미터이며 빛의 속도로 거의 12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약 1000억개의 이런 별들이 모여 은하계라는 것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은하계의 직경은 10만 광년이라고 한다. 1광년은 빛이 1년간 날아가는 거리인데, 약 9조 4500억 길로미터이다. 은하계의 직경은 그것의 10만 배라고 하니 상상하기 어렵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우주에 이런 은하계가 약 1000억개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우주의 광대함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누가 지구 표면의 거대한 바다들의 물의 부피를 달아볼 수 있겠는가? 누가 지구의 흙을 되에 담아 달아볼 수 있겠는가? 누가 저 높은 산들과 저 작은 산들이라도 그 무게를 저울에 달아볼 수 있겠는가? 누가 저 광대한 하늘의 크기를 재어볼 수 있겠으며, 저 끝없이 펼쳐진 우주의 크기를 재어볼 수 있겠는가? 단지 추측하고 상상해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지구, 이런 우주를 창조하신 자이시다.

[13-14절]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선지자는 또 말한다. “누가 여호와의 신[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홀로 하셨다. 이사야 44:24,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와 우주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를 나타낸다. 창조자 하나님을 지혜로 지도하고 가르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에게 의와 지식을 가르친 자도 없었다. 그는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이시요 지극히 의로우신 자이시다. 그러므로 욥기 12:13은,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다”고 말하였고, 시편 147:5는, “우리 주는 광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라고 고백하였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15-17절]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선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조자 하나님 앞에서 열방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증거한다. 그는 말한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지금 세상에는 악인들이 권세가 있어 보이고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학대하는 이방나라들, 곧 앗수르와 바벨론의 세력이 대단하여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신다. 그는 이방나라들과 그 권세들을 무(無)로 여기신다. 그는 온 세상을, 세상 나라들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

다니엘도 그 진리를 강조하여 증거한다. 다니엘 4:17은,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또한 다니엘 4:35는,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고 말한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결국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그의 뜻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들 중에 택한 자들을 다 구원하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시는 것이다. 그는 그 뜻을 다 이루신다. 시편 93:1-2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고 말한다. 주께서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다(요 6:40).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 과정이다. 다니엘 2:44는, 로마 제국 시대에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며 그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않을 나라라고 예언하였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과 하나님의 뜻의 이루어짐을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마 6:10). 또 그는 그의 음성을 듣는 그의 양들이 있다는 것과, 그가 그들에게 영생을 줄 것이라는 것과, 그들이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며 그들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다(요 10:28). 그것이 구원이며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된다.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과 완전하심을 알자. 이 광활한 세상과 우주를 파악할 수 없는 인생이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어찌 파악할 수 있으랴. 하나님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은 지극히 크셔서 피조물인 우리가 다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굴복하며 그를 인정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 나라들을 주관하심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열방을 통의 한 방울 물같이, 저울의 적은 티끌같이, 또 없는 것같이 여기신다. 그는 홀로, 주권적으로 온 세상의 열국들을 통치하신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임을 알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그의 뜻을 이루심을 알자. 하나님의 섭리의 목표는 택자들의 구원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표를 다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이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시고 홀로 통치하시는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택자들을 구원하시고 교회와 자기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을 알고 오직 그를 믿고 섬기며 순종하자.

18-31절, 참 하나님을 섬기라

[18-20절]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 . .

이사야는 본장 초두에서 이스라엘을 위로하라고 선포하였다(1절). 그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회복될 것을 암시하는 예언의 말씀이었다. 또 그는 땅의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 풀이 시들고 꽃이 떨어짐같이 그것들이 다 시들고 쇠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그의 약속의 말씀도 영원하다고 증거하였다(6-8절). 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없는 것과 같다고 증거하였다(15, 17절).

그러므로 이제 선지자는,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고 말한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명 없는 우상을 비교한다. 그는, “우상은 장인이 부어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우상은 보통 놋쇠로 부어만들고 금으로 입히고 은사슬로 장식한다. 그는 또,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고 말한다. 놋쇠와 금은을 살 여유가 없는 가난한 자들은 나무를 택하여 그것을 공교한 장인으로 조각하게 하여 우상을 만들었다.

현대인도 여전히 조상신을 숭배하여 제사나 차례를 드리며 심지어 부적을 소지하기도 한다. 죽은 자의 영혼이 신이 되어 자손들에게 복과 화를 내리겠는가? 부적 종이조각이 신적 보호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또 현대인은 인간을 숭배하고 자신을 높인다. 그들은 과학을 숭배하고 돈과 육신의 쾌락를 최고 가치로 여긴다. 그러나 거기에 참 평안과 행복이 있는가? 창조된 것들이 신이 될 수 있는가?

놋쇠, 금은, 돌, 나무 등으로 만들어지는 우상이 생명이 없고 능력이 없으며 그런 것을 섬기는 행위가 헛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또 인간과 돈과 육신의 쾌락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것이 허무하다는 것도 자명한 일이다. 원시적 우상들이나 현대적 우상들이나 그 어떤 우상도, 또 인간이 절대적 가치를 두려 하는 그 어떤 피조물도 헛되고 무익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런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21-22절]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 . . .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창조자이심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한다. 그는,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遮日)[휘장]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신 자이시다. ‘궁창’이라는 원어(쿠그)는 ‘둥근 원[궤도], 둥근 천장’이라는 뜻으로 하늘을 묘사한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초월적 존재이시다. 그는 하늘에 계신 자이시다. 땅의 거민들은 그 앞에 메뚜기 같아 보인다. 그는 하늘을 휘장같이 펴셨고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다. 그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자이시며 창조주 그분만 참 하나님이시다. 예레미야 10:11은,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고 말한다.

[23-24절]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 . . .

하나님은 또한 섭리자이시다. 선지자는, “[그가]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귀인들을 폐하시고 세상의 재판관들을 헛되게 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25-26절]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 . .

이사야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거룩하신 자이시다. 그는 모든 피조 세계로부터 초월해 계신다. 그의 존재 자체가 초월적이며 그의 도덕성이 이 불결한 세상과 구별되신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 세상을 홀로 섭리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을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사야는 다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증거한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그 수효대로 이끌어 내셨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셨다. 그의 능력이 크고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이 창조되었다. 이 세상의 어느 신, 어느 우상이 이런 능력을 조금이라도 가졌는가?

[27절]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 . . .

이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낙심된 마음 상태를 지적하며 그들을 위로하려 한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내 사정’이나 ‘내 원통한 것’은 그들이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내용을 말한다. 그들은 죄 때문에 당연히 고난을 받고 있지만,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을 갈망하며 또 그들을 학대하는 이방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공정한 보응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깊은 뜻 가운데 자기 백성을 고난 중에 버려두셨고 그들을 잊으신 것처럼 보였다. 그는 때때로 그러하셨다(시 13:1-2).

[28-29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 . .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가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주실 것인지 증거한다. 그는 말한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이스라엘은 먼저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분이심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스라엘은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피곤치 않으시고 명철과 능력이 무한하신 자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명철과 능력으로 그 선하신 뜻을 다 이루신다.

[30-31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 . . .

이스라엘은 특히 하나님께서 피곤한 자들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고 피곤하고 낙망할 수 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실수하거나 낙심할 때가 있었다. 사람은 질그릇과 같다. 능력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 시편 62:11은,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난 중에도 낙심치 않는다고 고백하면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증거하였다(고후 4:7). 사람은 연약하지만,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고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며 걸어가도 피곤치 않고 달려가고 곤비치 않을 것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상숭배가 헛됨을 알자. 놋쇠나 나무로 만들고 금은을 입힌 우상은 아무 생명이 없다. 제사와 차례도 헛되고 가증한 우상숭배임을 알자. 또 돈 숭배와 인간 숭배와 육신의 쾌락 추구도 헛된 것이다. 우리는 헛된 우상숭배를 버리자. 인간 숭배, 돈 숭배, 육신의 쾌락 추구를 버리자. 그것들은 우리에게 참 평안과 행복을 주지 못하고 더더욱 영생을 주지 못한다.

둘째로, 우리는 참 하나님만 섬기자. 태초부터 하늘 위에 앉으신 자,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홀로 섭리하시는 그 하나님만 믿고 섬기자. 그는 명철과 능력이 무한하시며, 피곤치 않으시는 자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자신을 증거하셨다. 그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의 죽음과 부활로 자신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그 하나님만 믿고 섬기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날마다 새 힘을 얻자. 이스라엘은 고난 중에 피곤해져 있고 낙심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실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감동하셨고 회개하며 주께로 돌아오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주와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앙망해야 한다. 우리는 피곤함과 낙심을 떨쳐 버리고 날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새 힘을 얻고 하나님 안에서 살며 활동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