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이사야

이사야6장: 이사야의 환상

nam씨 2016. 5. 13. 20:03


이사야6: 이사야의 환상

 

1-7, 이사야의 환상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선지자 이사야는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라고 말한다. 웃시야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 유다 왕국의 열 번째 왕이었다(주전 790-739년경에 통치).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하나님을 구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셨다. 그러나 그가 강성해졌을 때 그는 마음이 교만해졌고,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분향하는 일을 하려다가 즉석에서 나병[한센병] 환자가 되었고 죽는 날까지 그러하였다(대하 26:5, 16, 19, 21).

 

교만하여 범죄했던 웃시야 왕이 하나님의 엄한 징벌로 죽었을 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두려우심을 크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인간 왕은 실패하고 죽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참된 왕으로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들이었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은 자이다. 이사야는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2:41에서 이사야가 주 예수의 영광을 보았다고 증거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는 우리는 구약시대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곧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사야가 본 주께서 높은 보좌에 앉으신 것은 그가 왕이심을 나타낼 것이다. 과연 이사야는 5절에서 그를 이라고 불렀다. 또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은 그가 제사장이심을 나타낼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신 동시에 제사장이시다.

 

[2-4]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이사야는 천사들이 그 영광의 주를 모셔 선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천사들을 스랍들이라고 말한다. 성경에는 스랍을 포함하여 그룹, 가브리엘, 미가엘등 천사 개인 혹은 부류의 이름들이 나온다. 가브리엘과 미가엘은 천사 개인들의 이름이고, 그룹과 스랍은 천사 부류의 이름이라고 보인다. 이사야 6장에만 나오는 스랍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또 사람으로 하나님께 접근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인 것 같다.

 

스랍들은 각기 여섯 날개가 있었고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면서 서로에게 외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하였다.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다른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그들의 겸손과 하나님 경외함을 나타낼 것이다. 또 그들이 다른 두 날개로 난 것은 그들이 민첩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뜻을 온전하게 순종한다.

 

스랍들의 찬송 소리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다. 거룩함이란 유한한 피조 세계로부터 초월해 계심과 도덕적 불결로부터 떠나 계심 즉 도덕적 성결을 가리킨다. ‘만군의 여호와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거느리신 능력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온 세상,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주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이시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로 인해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의 표시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시내산에 내려오실 때에도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었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였었다(19:16, 18).

 

이와 같이,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는, 비록 웃시야 왕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벌로 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었으나, 영원하신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죽지 않고 살아계시며 지극히 거룩하시고 온 세상에 그의 영광이 충만하신 신이심을 보았던 것이다.

 

[5]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보았을 때,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말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대조하여 자신의 죄악됨을 깨달았다. 특히 그는 자신의 입술의 더러움을 깨닫고 고백하였다.

 

사람의 입의 말은 그의 인격을 나타낸다. 주께서는 자기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하셨다(12:34-35). 인간의 죄성은 특히 말의 악함에서 나타난다. 죄인들의 특징은 악하고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의 기관 중에 혀는 매우 악한 부분이다. 야고보서 3:8-10,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교훈하기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였고 또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하였다(4:29; 5:4). 구원받은 첫 번째 표는 말의 성결에서 나타날 것이다. 변화된 인격은 말의 변화로 증거될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했다. 어부였던 베드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 곧 신성(神性)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었다(5:8). 또 사도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보았을 때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었다(1:17).

 

[6-7]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그때에 스랍들 중 하나가 화로에서 쓰는 부젓가락으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이사야에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그 입에 대며 말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제단 숯불을 입에 댄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으로 이루신 대속(代贖)으로 정결케 됨을 상징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력은 오늘도 추하고 더러운 우리의 입술을 정결케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온 몸을 깨끗케 한다.

 

죄사함 곧 더러운 악의 제거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며 특히 말씀의 봉사자인 선지자에게 필요한 일이다. 오늘날에도 말씀의 봉사자들인 목사와 전도사, 그리고 장로, 권사, 권찰, 교사에게 필요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거룩한 직분이 주어져 있다. 이제 우리의 입이 정결하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으며 이 존귀한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정결함을 얻어야 우리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의 요점은 죄사함이다. 죄사함이 구원이다. 또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고 또 날마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씻음받는 자들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이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고 권면하는 자격자가 될 것이다.

 

 

이사야 6:1-7에서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깨닫자.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보았다. 하나님을 알며 그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며(1:7; 10:9),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다(17:3).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자.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죄성(罪性)을 깨닫자. 이사야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자임을 깨달았다. 베드로는 주 앞에 엎드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었고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었다(5:8; 딤전 1:15).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심히 부족함과 죄악됨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몸과 입술을 정결케 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쓰임을 받으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몸과 우리의 입술을 정결케 하자(딤후 2:21).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고(고후 7:1), 또 무엇에든지 정결하자(4:8). 또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요일 3:3).

 

8-13, 나를 보내소서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자신의 추함과 입술의 부정함을 깨달았고 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제단의 숯불로 그의 입의 악을 정결케 하심도 보았다. 그는 이 일들을 환상 중에 보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라고 표현하신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몇 번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셨다(1:26). 또 그는 범죄한 아담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보내실 때,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말씀하셨다(3:22). 또 노아의 자손들이 뜻을 모아 바벨탑을 쌓았을 때, 그는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고 말씀하셨다(11:7). 하나님께서 이처럼 때때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그의 삼위일체의 신비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위해 사람을 사용하심을 보인다. 그것은 성경 역사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에 사람을 사용하신다. 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실 만한 사람이 많지 않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나님의 일은 어려운 일이며 그의 일을 수행하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다 고난과 핍박을 당했고 멸시와 배척을 당했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욕과 비방을 당하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고전 4:9-13).

 

이사야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응답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했다. 그는 어디에서 이런 헌신의 용기가 났을까? 그것은 분명히 그가 본 사죄(赦罪)의 환상에서 났을 것이다. 죄책감은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무기력함에 머물게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은 죄사함을 확신할 때 힘과 용기를 얻고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하게 될 것이다. 죄는 영원한 멸망의 원인이며 거기에는 두려움밖에 없지만, 죄사함은 영생의 길이며 거기에는 기쁨과 평안이 넘친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9-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직무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좀 이상한 말씀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달려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진리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은혜 주실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지만, 그가 버려두신 자들에게서는 그의 은혜를 거두신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고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무지 깨닫지도 못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구원을 받지도 못하고 참된 의와 선을 행하지도 못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이것은 성경의 분명한 진리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또는 칼빈주의라고 불리는 것이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사도행전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사도행전 16:14,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로마서 9:16, 18,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선지자의 직무를 받은 이사야는 하나님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여쭈었다. 하나님께서는,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고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바벨론의 침입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될 때까지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불순종하는 유다는 결국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의 사역은 전망 없는 사역, 결실 없는 사역처럼 보였다. 하나님의 일은 때때로 전망 없는 사역, 결실 없는 사역처럼 보인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사역이 대표적인 예이었다. 그는 41년간 사역했지만, 한 명도 구원하지 못한 사역이었다. 예루살렘은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마침내 멸망을 당하였다(5:1).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도 외형적으로는 성공적이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런 사실들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이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을 배우게 된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그러나 전도자는 고난을 각오하며 전도자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딤후 4:3-5).

 

[13] . . .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그러나 사람이 무지하고 완악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루터기는 나무를 벤 후에 남은 나무둥치를 가리킨다. 유다가 멸망해도, 그 그루터기는 남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땅의 거룩한 씨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메시아를 암시하는 말씀이라고 본다. 그것이 이사야의 책 전체에 흐르고 있는 메시아 진리이다. 이사야서는 또 남은 자에 대해 많이 말한다.3) 그들은 메시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들은 처음에는 적은 수효일 것이지만(12:32), 마지막엔 셀 수 없이 많은 수가 될 것이다(7:9). 하나님의 일은 결국 실패치 않고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힘들고 지루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이사야 6:8-13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자가 되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이사야는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였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 사역을 위해 보내실 만한 사람들을 찾으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그 죄사함을 확신하고 그 죄사함받은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즐거이 헌신하자. 또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기를 소원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어렵다는 것을 미리 알자. 사람은 심히 부패되어 있고, 사람 구원의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만 간구하며 또 하나님의 심정을 배우며 인내하며 일해야 할 것이다. 목회와 전도, 주일학교 교사와 권찰의 일, 또 교회의 모든 봉사의 일이 다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어려움을 알고 단단히 각오하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남은 자들이 되자. 인류의 소망은 거룩한 씨에 있다. 거룩한 씨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세상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남은 자들에게 소망을 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이다(6:3-4; 15:4-5). 그 증표는 믿음과 순종과 거룩한 삶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남은 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