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아가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아8:5-7)

nam씨 2016. 3. 26. 11:34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8:5-7)

= 승리하는 지상 생활 =

 

요 약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상 성도가 유의할 점은 무엇인가? 먼저 성도일지라도 험한 세상살이가 면제되지 않지만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세상살이의 연단의 환경이 헛되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한다. 그 때부터 경험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차원이 다른 것으로 즉 실족치 않게 품어주시며 뜨겁게 사랑해 주시는 그리고 항구적인 행복한 주의 임재 의식이다.

 

설 명

 

1. 배 경

고향에 와 출산한 후 남편에게 견고한 언약을 요구함이다.

 

 

2. 적 용

(진단) 사랑한 만큼 미움도 생기지 않나요?

(해결)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3. 신령한 의미

1) 세상 수고를 끝내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 가는 이야기

2)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고하며 힘쓸 일을 보여주심

 

4. 지상 삶의 유의점

 

1)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

5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 산모 되어 고향 성을 올라옴을 본 고향 거민들의 말이다.

 

2. 변화를 위해 해산 수고하라

5네 어미가 신고한 - 내가 너를 깨웠노라

술람미를 낳던 그 장소에서 술람미가 왕자를 출산한다.

 

3. 더욱 특별한 사랑 경험 가능하다

6-7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 모성애에서 비롯된 놀라운 술람미의 견고한 사랑의 요구이다.

 

 

아가 8:5-7

 

5 (고향사람들)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솔로몬)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6 (술람미)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원 문

 

5 הלע תאז ימ 미 조트 올라(올라오는 여인이 누군고) רבדמה־ןמ 민 함미드발(광야에서부터)

תקפרתמ 미트라페케트(자신을 기댄 채) הדוד־לע 알 도다흐(그녀의 사랑하는 자에게)

חופתה תחת 타하트 핱타푸아흐(사과나무 아래서) ךיתררוע 오라르티카(내가 깼도다)

המשׁ 솸마(거기서) ךמא ךתלבח 힙벨라테카 임메카(너의 어머니가 너를 고통 중에 낳았도다)

המשׁ 솸마(거기에서) ךתדלי הלבח 힙벨라 옐라다테카(고통 중에 너를 낳은 여인이)

6 ינמישׂ 시메니(너는 나를 둘지라) םתוחכ 카호탐(()같이)

ךבל־לע 알 립베카(네 마음에) םתוחכ 카호탐(()같이) ךעורז־לע 알 제로에카(네 팔에)

הזע־יכ 키 앗자(왜냐하면 강하고) תומכ 캄마웨트(죽음같이) הבהא 아하바(사랑은)

השׁק 카솨(잔인하며) לואשׁכ 키쉬올(무덤같이) האנק 키네아(열정적이도다)

היפשׁר 레솨페하(그것의 불꽃은) שׁא יפשׁר 리쉬페 에쉬(불의 꽃같이)

היתבהלשׁ 솰헤베트야(가장 격렬한)

7 םיבר םימ 마인 랍빔(많은 물이) ולכוי אל 로 유켈루(할 수 없으리라)

תובכל 레캅보트(끌 수) הבהאה־תא 엩 하아하바(그 사랑을)

תורהנו 우네하로트(그리고 홍수가) הופששׁי אל 로 이쉬테푸하(쓸어버리지 못할지라)

שׁיא ןתי־םא 임 잍텐 이쉬(만약 사람이 주더라도)

ותיב ןוה־לכ־תא 엩 콜 혼 베토(그의 집의 온 부를)

הבהאב 바아하바(사랑하는 자를 위해) ול וזובי זוב 보즈 야부주 로(멸시를 받으리라)

 

 

스 토 리

 

고향 가는 번민으로 가득했던 술람미는

드디어 남편과 함께 고향을 가게 되었다.

술람미의 고향 사람들은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비척거리며 올라오는 어떤 산모를 보았다.

그 여자는 바로 왕후 술람미였다.

그들은 술람미를 부축하는 솔로몬의 극진한 모습에서

그녀가 한 나라의 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왕후임을 보았다.

술람미는 꿈속에서 바라던 그 공개적 사랑이 놀랍게도 현실에서

더 아름다운 각도에서 신비하게 연출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자기를 해산하던 그 사과나무 아래에서

산고 끝에 해산을 하고 지쳐서 깊이 잠든

술람미를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 솔로몬이었다.

그 순간 술람미에게 강한 모성애가 작용하면서

남편에게 영원히 변치 않을 언약적인 사랑을 요구하였다.

그 당부는 자못 요구의 차원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끼게 했다.

그것은 이제 두 사람의 사랑은 단순한 사랑의 차원을 넘어

왕자의 운명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강 해)

오늘 이 시간에는 견고한 사랑의 맹약이라는 제목입니다. 본문 5절의 상반절은 술람미의 고향 사람들의 합창이요(C. D. Ginsburg, 강병도, 그랜드종합주석), 5절 하 반절은 솔로몬의 노래입니다(Hitzig, Wycliffe, Delitzsch, 강병도). 그리고 6-7절은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당부하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한 마디로 본문은 술람미가 고향에 도착해서 자손을 낳고 남편에게 영원히 변치 않을 견고한 언약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장면입니다.

 

술람미가 고향 가는 이야기는 신령한 의미에서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넓은 의미에서는 성도들이 세상 수고를 끝내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 가는 것을 뜻합니다. 고향을 앞두고 술람미는 많은 번민을 했습니다. 이처럼 일평생 그리고 임종을 앞두고 더욱 번민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1-3) 격려하셨습니다. 우리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과 같이 갑니다. 그 때 술람미가 자던 잠에서 깬 것같이 우리는 죽음을 넘어 천국을 볼 것이고 환영하는 술람미 고향 사람들처럼 앞서간 성도들과 천사들이 나와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6-7절의 사랑의 찬가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는 좀 범위를 좁혀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천국을 가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역경과 고난의 지상을 살아갈 때 성도들이 유의할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럼, 지상을 살 때 유의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1. 이 거친 세상을 살 때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5절에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했습니다.

이는 술람미가 산모가 되어 자기 고향 성을 올라오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법의 사용은 고향 성 거민들의 관심이 그녀에게 온통 쏠려있음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나라와 비슷하게 산모가 자기 고향에서 출산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것이 산모에게 가장 마음 편한 일일 것입니다. 당시의 성들은 대개 산 위에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술람미의 고향을 오려면 거친 들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니 오는 길은 험하지 성은 높지 무거운 말기의 산모의 몸으로 얼마나 거동하기 불편하겠습니까? 그러나 술람미는 몸을 남편에게 의지하고 성을 올라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우리 앞에는 거친 들과 같은 험악한 세상살이가 있다는 것과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우리 힘과 노력으로 세상을 살려니까 답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실 뿐 아니라 행복하게 하실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부로서 남편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들어 괴롭다면 전적으로 우리 믿음 부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함께 해 달라고 요청하시기 전에 이미 함께 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심을 믿고 먼저 평안함부터 갖추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도우심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이 평안한 마음 담대한 마음이 기적을 부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내 평안을 깨뜨릴 수 없어야 합니다. 실패를 통해 신앙을 배웠던 연단의 야곱을 보십시오. 그의 처 라헬은 험하고 거친들 에브랏 길의 그 험곡에 못 이겨 베냐민을 출산하다가 난산으로 죽었습니다. 이처럼 애지중지 염려하는 이 모습이라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왕의 사랑을 받는 술람미를 보세요. 그와 같은 거친 길을 남편을 의지하며 올라오니까 쉽게 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제는 무엇보다 믿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물과 양식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때가 광야에 들어온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는데 이 때 가나안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굶으면 굶고 목마르면 마르고 죽도록 하시겠는가 하며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주실 텐데 믿음이 짧아 불평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받을 훈련은 여러 가지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하나님 주권에 있음을 믿고 염려하지 않는 믿음의 훈련, 범사에 감사하는 감사의 훈련, 꾸준히 경성하여 기도하는 훈련, 어떤 일에도 내 뜻과 내 주장을 내려놓는 자아처리훈련, 환경보다 느낌보다 진리를 의지하는 말씀의 훈련, 죄악과 세속을 회개하여 씻는 성결의 훈련 등입니다.

 

그럼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여기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했습니다. 믿음의 비결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 때 그만큼 믿어집니다. 그래서 롬8:37-39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을 살 동안에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2. 지상에 살 동안 해산하는 수고로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5절 후반절에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했습니다.

여기 왕자의 출산의 장소가 나옵니다. 그 곳은 술람미의 어미가 산고를 겪었던 그 사과나무 아래였습니다. 성경에서 사과나무는 대개 희락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1:12사과나무와 및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했습니다. 아가서에도 2:3에 교제의 기쁨을 사과나무로 비유했고, 2:5에는 미각의 기쁨을, 7:8에서는 부부생활의 기쁨을, 본 절 8:5에서는 해산의 기쁨의 비유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사과나무 아래에서의 출산이란 산모가 고통스럽지만 영광스런 솔로몬 왕의 왕자를 낳는데 참으로 기쁘고 보람된 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낳은 기쁨으로 인해 해산의 고통을 다 잊게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말씀은 술람미를 자다 깨운 이야기 즉 장모가 딸을 낳던 그 사과나무 아래서 자는 술람미를 깨운 내용 같지만 실재는 술람미가 거기서 자손을 출산하는 이야기입니다. 5절의 신고한이란 해산 고통을 가리키는데 줄을 잡아 다닌다는 뜻입니다. 즉 산모가 고통을 이기고 힘을 내어 출산하려고 줄을 잡아 다닙니다. 그런데 왜 왕자의 출산 설명을 위해 아내를 출산시킨 장모 이야기에 실어서 표현했을까요? 이런 표현법은 도리어 사건의 본질을 왜곡시켜나 의미를 약화시키는 역효과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비효율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두 모녀의 출산이 담고 있는 귀한 의미를 함께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변화 받으려면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이 구조는 참으로 특이합니다. 즉 내가 왕자를 낳음인데도 이것을 어머니가 나를 낳는 일에 비유함은 내가 나를 낳는 구조가 됩니다. 세상 상식으로 보면 어머니가 나를 낳았지 내가 나를 낳지 않습니다. 물론 바울도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서 해산의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도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 상으로는 자기가 자기를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산모의 역할과 아울러 출생자의 역할도 되는 이중적인 구조입니다.

 

그런데 이 해산의 수고를 사과나무 아래서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영적으로 변화되는 일이 해산의 수고처럼 힘들지만 그렇게 기쁘게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여기 신고란 고통을 견디기 위해 애를 쓰다는 의미인데 본래 줄을 당긴다는 말에서 온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술람미의 어머니가 사과나무에 끈을 매어 잡아당기는 모습은 성도의 기도의 예표입니다. 힘을 주어 끈을 잡아 다녀야 해산이 되듯 힘을 내어서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계12: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되고 능력 받으려면 부르짖어야 합니다. 묵상기도도 좋습니다. 그러나 커피나 수프가 은은한 향기와 부드러움과 미네랄이 많아도 그것만 먹고 살 수 없는 것처럼 죄악에 붙들려 있을 때는 은은한 묵상기도는 물론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칼빈도 방언 사용이 필요한 예를 들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내적으로 감동하는 힘이 충분치 못해서 기도를 제재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너무 강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일지라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고 마음의 감정이 고조되는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신체의 다른 부분들은 다른 동작을 하게 된다”(기독교 강요 제 3권 제20장 제33)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칼빈의 제자로 자처하면서도 이를 알지 못해 방언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을 통 털어 방언하는 사람들이 절반 이상이 되는데도 방언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냥 부르짖든 방언의 은사를 활용하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왕자를 낳는 마음으로 복음 정립과 기도의 수고를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타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6-7절에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했습니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남편을 향한 술람미의 사랑의 요구입니다. 이 요구는 언제 했습니까? 술람미가 잠에서 깼을 때입니다. 그런데 술람미의 잠이 주는 의미가 큽니다. 왜냐하면 술람미의 마음은 이 잠을 기점으로 커다란 변화를 갖습니다. 술람미 만이 아니라 솔로몬 역시 그렇습니다. 즉 술람미가 자기 전에는 어머니가 아니지만 깨고 난 후에는 어머니였다는 사실입니다. 또 솔로몬도 그 전에는 아버지가 아니었지만 그녀가 깬 후에는 이미 아버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자와 어머니는 분명히 다르고 남자와 아버지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짐승들을 보더라도 새끼를 낳기 전과 낳은 후가 얼마나 다릅니까? 그 약한 어미 닭도 새끼가 깨어나면 누가 새끼 손댈 새라 위풍도 당당하게 새끼를 몰고 다니면서 지킵니다.

 

술람미의 마음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낳은 후 남편을 향한 요구가 놀랍도록 강해졌습니다. 그 내용은 자기를 버리지 말라 만약 버린다면 그 질투는 죽음처럼 음부처럼 여호와의 불처럼 일어날 것이며 이 사랑의 기세는 아무도 꺾지도 끄지도 바꿀 수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고 서릿발 나는 독설입니까? 즉 만약 나를 버린다면 이 세상 아니 저 세상 어디까지 가서도 가만 두지 않겠다는 느낌입니다. 이 요구가 표면적으로는 자기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왕자를 위한 모성애였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자녀를 가진 후의 부부의 결합은 더욱 견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실재로 많은 부부들이 갈등하면서도 쉽게 돌아서지 못하는 이유는 혈육의 자녀들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녀란 더욱 견고한 연합을 이루는 접착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강한 사랑이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들을 생명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자기 피로 사신 택하신 성도들을 영원히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했고, 8:35-37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했습니다.

 

사실 술람미가 아이 아빠인 솔로몬에게 요구한 그 내용은 고스란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특별한 사랑의 내용입니다. 즉 우리를 도장처럼 성령으로 인치셔서 품에 안아 영원히 버리시지 않습니다. 또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없는 질투로서 징계하시면서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의 징계가 얼마나 잔혹하시든지 때로는 불과 같고 지옥과도 같고 여호와의 불과도 같습니다(1:16). 그리고 이 사랑은 너무나도 진실해서 바다 같은 세상도 홍수 같은 죄악도 그 사랑을 결코 식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성도는 영원히 주님을 부인할 수 없고 혹시 잠시 세상을 가까이한다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찾아 회개시키시고 맙니다.

 

그런데 술람미가 출산하듯 변화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제부터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강하게 품어주시며 뜨겁게 사랑해 주시고 다시는 방치된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 즉 하나님의 강한 임재 의식을 영원히 느끼게 됩니다. 마치 자녀가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더욱 관계를 깊게 만듭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불변합니다. 그러나 성장한 만큼 예비하신 것을 풍성히 누리게 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사랑의 찬가는 우리에게 엄청난 복락을 암시합니다. 이 복락은 지상에서도 성결을 통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성령 안에서 더욱 변화되기 위해서 수고하십시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술람미가 남편을 의지하듯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여 세상을 살아갑시다. 또 영적 해산의 수고가 아무리 크다 해도 왕자를 낳는 기쁨만큼 하겠습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변화 받는 일이 곧 내가 왕자의 모습이 되는 것이요 사람들을 전도하는 일 역시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의 요구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며 더욱 분발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 > 아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는 빨리 달리라 (아8:8-14)  (0) 2016.04.01
고향을 앞에 두고 (아 8:1-4)  (0) 2016.03.19
합환채의 향기 (아7:10-13)  (0) 2016.03.12
종려나무 같은 키 (아7:6-9)  (0) 2016.03.05
마하나임의 춤 (아7:1-5)  (0) 2016.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