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스데반처럼 사도행전 7장 54-60절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몇 사람을 선출했습니다. 선택 기준이 있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지혜가 많은 사람을 뽑자는 자격 요건을 설정한 후 일곱 사람을 뽑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정말로 대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는 그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스데반이 공회에 붙들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곳입니다. 성경은 이 스데반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능이란 권세와 능력의 두 낱말인데 권세와 능력이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놀라운 일을 많이 보였다는 것인데 성경은 큰 기사와 표적을 인간에게 행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적을 많이 만들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능력 있고 지혜로운 사람인가에 대해서 성경은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여러 사람들이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행6:9-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을 하는데 능히 당하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스데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인가를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비결을 아는 행복한 주일 예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백성들에게 잡혀 끌려가서 공회 앞에 세워졌습니다. 이제부터 대제사장의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네가 성전을 헐겠다고 했느냐, 모세의 율법을 고치겠다고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스데반의 장문의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면서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수없이 원망하였고,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수많은 우상숭배와 범죄로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은혜의 하나님, 복 주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 공회에 잡아 세우고 핍박하는 이들을 보면서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바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7:52-53)라고 외쳤습니다. 의인이라고 하면 메시아, 우리 주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옛날 의인이 오신다고 예언하던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더니, 이제는 그 의인 예수를 잡았으며, 살인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제 유대 교권자들을 향하여 예수를 잡아 죽인 살인자들이라고 지적할 때에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찔림은 회개로 이어지지 않고,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교권을 유지하려는 집단적인 이기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대교권자들은 이를 갈았습니다. 이를 간다는 말은 머리에 재를 뿌리거나, 옷을 찢거나 하는 행위와 유사한 행위입니다. 극심한 분노를 나타내었습니다. 죽이고 싶을 때에 이를 갈았습니다.
스데반이 전에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지만, 이 순간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성령님이 스데반으로 하여금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 순간,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기독교 역사상 처음 순교자를 내는 순간이요, 그런 자리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스데반으로 하여금 그런 무서운 순교의 자리를 감당하게 역사하시고 충만하게 임하여 주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지혜가 충만”(행6:3)하고 “믿음이 충만”(6:5)하며 “복종”(6:7)하고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6:8)을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에 충만해서 살면 나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건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과거에 내가 할 수 없었던 것도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 성령 때문에 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우리의 표정마저 달라집니다. 우리의 인상마저도 성령께서 주관하십니다. 6장 15절에 보니까 고통을 당하고 순교자가 될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환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충만해지면 영성이 발달되고 영이 열려서 영의 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육신을 갖고 이 땅에서 사는 인간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영의 세계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7:55). 성령이 충만하여 영의 눈이 열리고 영적인 세계가 보이고 하나님의 세계가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나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들 그들만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전후좌우 사방만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소리는 이 사방을 보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하늘을 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시력을 밝혀 주셔서 저 하늘의 주님을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늘을 바라보실 수 있기 바랍니다.
순교의 믿음은 성령충만 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스데반 집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순교라는 말은 희랍어 "마르투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본래의 뜻은 "증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순교는 죄를 지은 대가로서 받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죽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사는 시대는 당장에 목숨을 잃어버리는 순교의 시대는 아닙니다. 순교자적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시대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죽음을 초월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 저들은 다 사도가 되어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대부분 순교하였습니다. 무엇이 저들을 그렇게 딴 사람이 되게 하였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저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친히 목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도한 후 저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제자들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하게 된 것이 저들이 변하여 참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은 용감해졌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무서워 피하여 도망하였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서 죽음이 끝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 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랬습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 최초의 순교자였던 오늘 본문의 스데반을 보아도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스데반을 통하여 그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돌로 치는 순간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죽음을 초월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의 자리에서 자기 영혼을 깨끗이 위탁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미래, 자기 생명, 자기 운명을 다 맡겨 버립니다. 아주 깨끗하게 위탁하는 것입니다. "아이구, 내가 돌에 맞아 병신 되면 어떡하나?" 복잡한 생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겼습니다. 그 때에 평화가 옵니다. 우리는 스데반의 이러한 모습에서 참된 기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주님 안에서 죽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나는 예수안에 있는 자이구나!. ’내 죽음은 예수안에서의 죽음이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 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이 잉태되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죽음은 그 후에,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통스런 죽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유익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편안한 죽음으로 승화 시킬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의미가 있기에 죽음을 즐거이 맞았던 것입니다. ‘참 의미가 있다면 죽을만.. 합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이 그러하였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을 살만큼 살아서가 아니라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죽음이라면 어떤 죽음이라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초월해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두운 날을 생각하는 것이요, 불행에 대한 준비하는 대비하는 삶입니다. 정말 보람 있는 일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그 준비비는 가장 보람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준비로 죽음을 초월하는 신앙이 있을 때 순교의 믿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용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언젠 가라도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결코 사랑의 극치가 아니고 기본적인 것이기에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도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가 우리를 사랑했는데 그것이 원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베풀어야 할 사랑의 기본적인 사랑도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많이들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에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까지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스데반도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을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하여 원망하고 저주할 만도 한데,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가지고, 예수님의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몰라서 그래요, 여러분들이 나를 향하여 돌을 던지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알지 못하여 저렇게 하고 있는 나의 형제, 나의 동포를 용서해 주세요. 저들 모두가 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구원의 진리를 알아서 나처럼 예수님을 믿게 해 주세요.” 간절히 용서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 기도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중보의 기도는 자신의 용서를 전제로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원수를 진정으로 용서한 자는 하나님께 용서를 부탁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용서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런 기도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스데반은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긴 참 제자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마지막 가는 길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 사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용서하였습니다. 이것이 스데반에게서 발견하는 귀한 믿음입니다. 그는 용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고, 용서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용서를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뛰어난 사람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이러한 용서의 기도를 통하여 바울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변화가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이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메섹에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그 위대한 이방의 사도가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맺은 아름다운 열매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을 베풀고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우리는 미워하는 사람, 우리를 헤치고자 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격려의 박수만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비난도 하고 억울하게 정죄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사람들을 의식하지 맙시다. 그것이 선이기에 묵묵히 실천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언젠가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스데반 집사님과 같은 성품과 인격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비록 욕을 먹고 핍박을 받게 되더라도, 그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 대신, 내가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어야 참으로 진실한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새롭게 변화되어야, 주님께서 가신 길을 온전히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할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 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해결해야 할 급선무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악한 생각과 기만, 그리고 시기와 비방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용서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용서의 신앙이 있어야 순교의 믿음으로 무장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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