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사도행전

신앙의 앉은뱅이 행3장1-10

nam씨 2015. 10. 17. 12:01

신앙의 앉은뱅이 행31-10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는데는 가지각색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의 유산으로 별 힘들이지 않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천신만고 고생 끝에 자수성가하여 겨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종래 평생 동안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공평하지 못할까? 하는 의구심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잠언서 기자는 '너무 가난하게도 말고, 너무 부하게도 말고 일용한 양식으로 먹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주인공은 나면서 앉은뱅이로 세상에 태어 난 사람입니다.

우리 나라가 복음이 들어오기 전 같았으면, 불교의 영향을 받아,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으면, 나면서 앉은뱅이로 태어났느냐? 고 할 것이었고, 또 유대인들 같았으면, 저 앉은뱅이가 앉은뱅이로 태어난 것이 자기의 죄값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값입니까? 고 물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은연중 남의 불행을 보면, 은근히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번쯤 다 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더욱이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들까지도, 교회 안에서,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교인들에게 알려 질까 봐 쉬쉬하는 경우를 보는데, 왜 그럴까? 하면, 모두 남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것이 두려워서, 아니면 그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 쉬쉬하는 줄 압니다.

 

아무튼 이 앉은뱅이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능력이 없어 날마다 성전 문간에 다른 사람들이 메어다 놓으면, 그 자리에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한푼 줍쇼'라는 동정을 구하면서, 구걸로 살아가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들어가다가, 이 앉은뱅이가 손을 내밀면서 한푼의 동전을 요구하는 것을 볼 때, 그를 주목하면서, '우리를 보라!' 하니, 쳐다보거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면서 저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다' 고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됩니다. 우리가 두 다리가 멀쩡하여 걷는다고 하니, 건강한 사람 인줄 아는데, 영적 의미에서 보면, 모두 신앙의 앉은뱅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 앉은뱅이는 남에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였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제 스스로 걸을 수 없는 남의 도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 문에 앉았던 앉은뱅이에게는 성전에 예배와는 무관한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그에게 성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그 선량한 선남선녀들로부터 떨어지는 몇 푼의 동전만이 그의 관심의 전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문제와는 전혀 관계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러한 경우들이 없지 않는지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과는 거리가 먼 유형의 속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앉은뱅이처럼, 남의 도움으로 이곳까지 들어와 있을 수 도 있습니다. 항상 부모님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니면, 아내나 남편의 이끄는 힘으로 겨우 나와 앉아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여기에 나올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 것이 영적 앉은뱅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은혜를 받기만 하고, 은혜를 끼칠 줄은 모릅니다. 섬김을 받기만 하고, 섬길 줄은 모릅니다. 봉사를 받기만 하고, 봉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영적 앉은뱅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오래 교회에 나왔다고 다 영적 성장인 이 아닌 경우들이 있습니다.

몇십 년을 나왔다고 해도, 아직도 스스로의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결단이 없이 나와 앉았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 앉은뱅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앉은뱅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걷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걷지를 못합니까?

발목에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걸을 수 없는 힘! 발목에 힘이 없어 일어설 수 없는 상태! 그런 것이 앉은뱅이라면, 아직도 교회에 나올 힘이 없습니다.

스스로 주일날 예배당에 나올 발목에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영적 앉은뱅이란 말입니다.

 

2. 앉은뱅이가 바라는 것은 몇 푼의 돈 이이었습니다.

그에게서 구한 것은 영혼의 구원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러 올라갔지만, 앉은뱅이는 기도와

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냥 저들에게서 떨어지는 몇 푼의 은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까지 수십년을 교회에 나왔지만, 나와서 구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솔직한 고백은 이 앉은뱅이의 구한 바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교회 생활의 대부분의 관심이 돈과 직결되어 있지는 아니합니까?

아니면, 영적 깊은 성장과는 별 무관한 지극히 현실적인 육체적인, 감각적인 것들만 구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는데.... 정작 우리가 구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이 앉은뱅이가 구했던 것처럼, [이 세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 [보이는 세계의 것] [순간적인 것]들뿐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아직도 집사가 되었어도 집사만큼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그냥 믿는 생활에서 앉은뱅이 상태로 주저 앉아 있는 경우들을 봅니다.

도무지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앉은뱅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기도의 성장이 있습니까? 전도의 성장이 있습니까?

앉은뱅이는 행동은 없으면서도 들을 줄은 알고, 입은 있어 말은 할 줄은 압니다.

교회 안에서도 보면, 행동은 없으면서, 듣기만하고여 귀들만 높아져 있는 상태가 있습니다. 또 교회에서도 보면, 무얼 하자면 행동은 못하면서 말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영적 앉은뱅인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무엇이 떨어져 주어지기를 바라면서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손안에 쥐어 주는 무엇이 있어야 교회에 나오는 경우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인간적 명예를 더 존중히 여기는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에서 무엇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다면, 바로 그런 경우가 영적 앉은뱅이란 말입니다. 이 앉은뱅이에게는 성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던 그런 것이 상관할 바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성전을 이용하여 자신의 생활 수단으로 돈이 떨어지느냐? 하는데 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교회에 나와 이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런 경우가 바로 영적 앉은뱅이란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차리려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그의 신앙생활의 전부라면, 그것이 바로 영적 앉은뱅이들이란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제 걸을 수 있는 힘, 바로 그것입니다. 그저 언제나 남의 힘으로 끌려 나와서, 구하는 것이 있다면 물질적인 것만 구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이 전부라면, 이제 무엇인가 새로운 결단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3. 앉은뱅이는 바라보던 신앙에서 일어나 행하는 신앙인 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던 앉은뱅이가 이제는 일어나 걸으며, 뛰기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앉은뱅이로 있을 동안에는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신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자신도 성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도 일어나 걸을 수 있었고, 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체험입니다. 도무지 그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는 경우를 경험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왜 신앙이 필요하다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보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에 순종할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히는 결과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각 위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로 있을 동안에는 자기는 걸을 수 있다고 감히 생각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신앙생활에서도 언제나 자기는 못하는 줄로만 알고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전도를 하자고 해도, 헌금을 하자고 해도, 그리고 봉사에 나오라고 해도, 으례히 자기는 못하는 줄 그렇게 알고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봉사하는 일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으레 하는 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에는 영원히 걸을 수 있는 기적은 경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적은 용기 있게 순종하고 결단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을 성전미문에 앉아 있을려고 하십니까? 일어나 걷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한 말을 우리는 또한 깊이 유념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게 은과 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는 말,.....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향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은, 이 사회는 지금도 성전으로 들어오는 우리를 향해 무엇인가를 구하면서 손을 내 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은과 금은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마저 가지고 있지 못한 크리스천이라면, 정말로 맛 잃은 소금일 뿐일 것입니다. 예수 없는 그리스도인들, 예수 없는 교인들, 예수 없는 집사들, 예수 없는 직분 자들이라면, 무엇을 사회에 줄 수 있다고 보십니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신앙의 앉은뱅이의 상태에서 걸을 수 있는 행동 있는 신앙인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말로만, 귀로만 신앙생활 하지 말고, 예수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