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김 사사기 2장 1-5절
요약 = 성령강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사자의 책망을 듣고 크게 울면서 하나님께 제사하였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예표이다. 본문을 성령론의 관점에서 보면 길갈에서 온 여호와의 사자는 부흥과 회개의 영으로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우는 자들은 회개함을, 그리고 제사 드림은 은혜의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신자의 변화된 삶을 상징한다. 부흥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성령 만이 가능하시다. 그러나 사람이 할 일은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 속에서 복음의 말씀과 회개의 말씀과 십자가의 고난을 가르쳐야 참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어지는 것이다. 벧엘이 보김으로 바뀌듯 신자 역시 변화를 받아야 할 것이다.
(강해)
오늘 말씀의 제목은 "보김"입니다. '보김'이란 '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보김은 지명적으로는 벧엘을 가리킵니다. 이곳 벧엘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본문의 줄거리는 절기를 맞이하여 벧엘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제사했다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예표적으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예표입니다. 길갈에서 온 여호와의 사자의 책망을 듣고 울음의 바다로 변했듯이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실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얼마나 가슴을 치며 회개했습니까? 그 결과 그들 모두 예수 믿어 세례 받고 모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즉 보김은 성령의 역사를 통한 놀라운 부흥운동의 예표입니다. 보김! 우는 사람들! 여러분, 사람들이 얼마나 울었으면 벧엘이 보김으로 바뀌는 역사가 있었을까요? 이 놀라운 부흥운동이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복음화되듯 이곳이 복음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이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1. 이 일은 길갈에서 온 여호와의 사자라야 가능합니다.
1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그랬습니다.
대체 이 여호와의 사자가 누구길래 이토록 온 민족을 울리고 또 울리고 소리 높여 얼마나 울렸으면 그 좋은 이름인 하나님의 집 벧엘이 보김으로 바꾸어질만큼 되었느냐? 이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선지자나 천사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제 2위 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여호와의 사자는 아브라함에게도 나타났고 야곱에게도 나타났고 모세 발람 여호수아 기드온 마노아 엘리야 다윗 다니엘의 세 친구 스가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번 나타났습니다.
영적 부흥은 이 여호와의 사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시대의 여호와의 사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그리스도를 대신한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봐야 합니다. 어디에서 온 사자냐는 것입니다. 다른 곳이 아니라 길갈에서 온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여기에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죄를 씻은 회개의 장소요, 또 언약의 백성으로 새롭게 거듭난 할례의 장소요, 가나안을 다 정복하기까지 악을 무찌른 이스라엘 군대의 본부입니다.
이런 의미의 장소에서 온 여호와의 사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성령께서 부흥의 영, 회개의 영으로 임하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떤 때는 생명의 영으로, 어떤 때는 위로의 영으로, 어떤 때는 능력의 영으로, 어떤 때는 사랑의 영으로, 어떤 때는 계시와 말씀의 영으로, 어떤 때는 창조의 영으로, 혹은 소명의 영으로, 혹은 절제의 영으로, 이렇게 한 성령이시지만 역사하시는 목적이 다릅니다. 그런데 본문은 부흥의 영, 회개의 영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성령의 외적인 역사라고 일컫습니다. 그래서 이 성령의 역사가 임하시면 길갈의 역사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통회하고 자복하고 회개하여 예수 믿고 세례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참 신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성경이나 교회사를 보면 영적부흥이 있는 곳에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부흥의 현장에서 많은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었고, 많은 사람들이 흐느껴 울었으며, 자신도 모르게 성령에 사로잡혀 회개하고 헌신하는 성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처음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데 무슨 이유인지 눈물이 쏟아지는데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그토록 핍박하던 예수를 믿게 되었고 전에는 부모님께도 불효했는데 웬일인지 부모님이 애처럽게만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효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중적인 사역을 알아야 합니다. 이중적인 사역이란 성령의 내적인 역사와 외적인 역사를 뜻합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때도 하나님께서 하늘의 창과 깊음의 샘을 터트려 죄인들을 물로 덮어버리심과 같이 성령의 역사도 내외적으로 역사합니다. 내적인 역사는 중생을 통하여 내 심령 속에서 은혜가 터져 나오는 역사라면, 외적인 역사는 은혜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성령으로 감동되는 역사로서 목적은 회개를 일으켜 완악한 심령으로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이 성령의 외적인 역사가 강하면 전 교인이 바꾸어지고 전 지역이 바꾸어지고 전 민족이 복음으로 휩싸이는 역사로 나타납니다. 마치 폭풍과도 같습니다. 오순절날 성령께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임하신 것도 이러한 상징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가 휩쓸고 지나가면 문화도 종교도 인격도 사회도 가정도 민족성도 경제도 바꾸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울왕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삼상19장을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사무엘선지자가 있는 라마 나욧에 피신합니다. 그것을 알고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사자를 보내는데 그들이 선지자들을 보는 순간 모두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혀 예언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사람들이 미쳤구나' 하면서 다른 사자들을 보내는데 그들도 역시 성령의 강력한 감동을 받아 예언을 합니다. 그래서 또 보내지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나는 안 변한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독한 마음을 가지고 가서 내 원수 다윗을 잡으리라' 하고 다가가지만 웬걸요. 도착하기도 전에 더 먼저 사울도 성령의 강한 감동을 받고 예언자가 되버립니다. 그런데 얼마나 강하게 성령에 사로잡혔던지 종일 종야를 벗은 몸으로 누워있더라고 했습니다. 강력한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육체가 그것을 감당치 못하여 쓰러지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성령의 외적인 역사입니다. 이것이 부흥의 현장에 강하게 나타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역사도 중요하지만 이 외적인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부흥운동 즉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 감동만 받고 사울처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은사까지 받고, 병고침을 받고서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외적인 역사를 신앙의 목적으로 착각하여 회개의 열매를 추구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더 큰 신비만을 추구하다가 결국에는 사단의 무서운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들은 마술사 시몬처럼 이 외적인 역사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부흥의 영은 회개와 성화를 위해 임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오류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반면에 잘못 나가는 소수의 사람들만 보고서 건전한 성령의 운동까지 정죄하는 오류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이 성령에 관한 지나친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어 성령에 관한 것이면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도 신비주의 만큼이나 잘못된 것이므로 조심해야할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의 외적인 역사를 참으로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왠만큼 기도해서는 이 외적인 역사를 볼 수 없습니다. 비가 오려면 많은 수증기가 올라가야 하는 것처럼 부흥운동을 위해서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메가톤급의 거대한 부흥을 원한다면 그만큼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는 확실히 영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최소한 우리의 사명은 이 정도의 분위기를 만드는 일입니다.
여기 길갈에서 온 사자는 오순절날 설교한 베드로를 예표하는 것 같지만 베드로는 쓰임 받은 도구일 뿐 역사의 주인공은 성령이셨습니다. 고전3:7에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로되"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길갈에서 온 여호와의 사자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 성령이 오셔야 참된 부흥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부흥운동을 모두 합심하여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2.여호와의 사자가 무슨 말씀을 하였길래 그렇게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을까요?
먼저, 순수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1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사자의 메시지입니다. 그 내용은 이스라엘의 구속사와 언약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십자가 구속사건의 예표로 복음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언약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새언약의 예표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진정한 결실이 있으려면 이렇게 순수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아무리 역사하셔도 복음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합니다. 이 때 사영리 같은 복음의 안내서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오순절에 이러한 순수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세상 철학이나 만담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창조시에 성령의 운행이 있었어도 가라사대의 말씀이 있을 때 창조의 역사가 나타남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처럼 복음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다음은, 죄를 깨닫도록 했습니다.
2절에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했습니다.
이제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어도 죄를 회개시켜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책망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찌할꼬 통곡했습니다. 또 오순절날 유대인들도 "형제들아 어찌할꼬" 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람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 속에 회개를 가르쳐 그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다음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은총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3절에 "그러므로 또 내가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 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했습니다.
이 말씀의 문자적인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과 상종하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서로 혼인을 하고, 그들의 신을 섬긴 결과로 이제 이스라엘에게 고통스런 결과가 있을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바꾸어 생각하면 이러한 우리들의 죄악을 대속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대신 손에 못을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며, 이것 때문에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의 옆구리의 가시를 위해 주께서 옆구리에 창을 받으셨고 영원히 죽을 우리의 죄와 사망의 올무를 위해서 주께서 저주 받은바 되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사53:5-6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장성한 참 성도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를 위한 예수가 아니라 예수를 위한 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장한 성도입니다. 그래서 장성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삽니다. 이것은 나 때문에 그리고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알 때 가능합니다.
오순절날 베드로도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이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그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으며 그 증거가 이 보내주신 성령이라고 하니 이 범인들이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을 보내사 나를 구원하셨다' 이것을 깨달을 때 진실로 주를 위해 사는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 높여 운 후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4-5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깨닫고 소리 높여서 울고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이 우는데서 끝나지 않고 제사까지 드려졌다는 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제사는 번제로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노라는 헌신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제일된 목적입니다.
진정한 성령운동은 여기까지 와야 온전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모르고 불 받았다고 날뛰지만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여야 합니다. 이 열매를 맺으라고 불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역사에만 매료되어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나중에 외적인 역사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없습니다. 도리어 교만만 남을 뿐입니다. 또 정말 성령의 은사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알아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는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으로 바꾸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김의 마지막 교훈입니다.
이렇게 되면 비 온 뒤에 샘물이 터지듯 각인의 심령에 성령의 강수가 강 같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내적충만입니다. 이것이 진짜 내 것 되는 은혜입니다. 이렇게 까지 되어져야 부흥운동이 온전히 열매 맺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예루살렘에 영적부흥이 임했지만 회개하는 무리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믿어 세례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예수 믿을 자의 받을 성령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이 말씀 안에서 신앙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생수의 강은 겔47장을 보면 여호와의 보좌가 있는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흐릅니다. 우리는 주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생수의 강이 흘러야 정상입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보좌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중심의 신앙생활이 되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으나 아직 내 중심에 있으니까 생수의 강이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속히 회개하여 하나님 중심의 신앙,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신앙을 소유하십시오. 그러면 그때부터 심령의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김의 마지막 교훈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부흥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 우리 각인의 심령에서 은혜의 생수가 터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대 부흥의 역사를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였던 그 부흥의 역사, 또 19세기 미국을 복음으로 불질렀던 영적대각성운동, 또 1907년에 한국에 임한 그 부흥의 역사가 이 땅에 또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와 복음의 도구로 헌신할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일은 길갈에서 온 여호와의 사자만이 할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께서 회개의 영으로, 부흥의 영으로 임하시도록 기도하십시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 민족의 소망이며 인류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모두 이 진정한 부흥에 사용되어지는 귀한 일군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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