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복 있는 사람(3) 마5장9-12,

nam씨 2015. 7. 30. 20:29

복 있는 사람(3) 59-12,

 

어느 성도가 정년 퇴직기념으로 독일제 그랜드 피아노를 교회에 바쳤습니다. 본당 피아노가 낡았기에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본당에서 사용하던 피아노를 처리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은퇴하신 권사가 이십년 전에 권사 임직기념으로 바친 피아노인데 그냥 치워 버릴 수가 없기에 담임목사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권사직분기념으로 피아노 바치셨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바쳤지요” “어떤 성도가 새 피아노를 바치셨는데 설치해도 되겠지요?” 그런데 한참 말이 없습니다. 얼마 후 목사님, 안됩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눈물로 기도하고 바친 건데 치우면 안 됩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새 피아노를 본당에 들여놓지 못하였습니다. 안타까운 목사는 선배에게 방법이 없겠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배 목사가 방법이 있기는 있는데!”라고 대답합니다.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오늘부터 기도를 시작하시오” “어떤 기도입니까?” “간절히 구하오니 하루 속히 그 권사의 눈에 흙이 들어가게 하여 주소서.” 그 권사는 교회를 위해 일한다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일한 것이 아니라, 자기 기분대로, 자기 생각과 마음에 맞추어 일했던 것입니다.

 

세 주간에 걸쳐 산상수훈 팔복의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애통하는 자의 복, -온유한 자의 복에 관한 말씀에 이어 지난 주일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에 대해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팔복의 정상부분으로 -화평케 하는 자의 복,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의 복에 관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화평케 하는 자의 복입니다.

 

성도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평화의 왕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신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성숙하여 주님의 형상을 이룬 자라야 화평케 하는 자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직 미숙한 신앙의 사람은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분쟁을 일으키는 자가 되기 쉽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한 자입니다. 주님이 내 마음에 들어와 좌정하시면 주님 닮은 모습과 삶으로 늘 새롭게 변화가 되어 주님의 형상을 이루게 됩니다. 주님 닮은 모습과 삶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몇 가지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첫째, 주님 닮은 온유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갑니다. 교만하면 시기와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잠언 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했습니다. 교만하면 사람들과 자꾸 싸우고 다툽니다. 그래서 화평이 깨어지게 됩니다. 늘 싸우는 사람을 살펴보면 겉으로 보이는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 속에서 교만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일이 있을 때마다 늘 싸우고 다툽니다. 평생 싸우다가 끝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만한 사람은 소리 지르고, 화내고, 혈기 부리고, 미워하고, 다툼으로 화평을 깨뜨립니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저마다 개성이 강해서 남자가 이혼하자고 말했더니 여자가 "그래!" 하였습니다. "장군" "멍군"한 것입니다. 이혼하기로 하고 도장을 다 찍어 놓았습니다. 이제 수속 밟는 일만 하면 끝나는데 바로 그 무렵 회사에서 이 남자에게 출장을 보냈습니다. 6개월 동안의 출장길 나서면서 남자가 "이혼하는 거 그리 바쁜 것 아니니까 갔다 와서 하자"하였습니다. 그리고 출장을 갔습니다. 남편이 출장 가 있는 사이에 이 여자가 이혼하겠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살길이 막막합니다. 아무튼 속상한 가운데서 교회를 나왔습니다. 답답하니까 새벽에도 나오고 저녁에도 나오고 또 나오고6개월 동안 그리하였습니다. 남편 돌아온다는 날 차를 가지고 공항에 나갔습니다. 아직까지는 남편이니까. 돌아온 남편을 차에 태웠습니다. 이제 이혼할 사람들이 무슨 인사를 할 것도 없습니다. "" 남편이 탔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이 아내를 보고 ", 너 이뻐졌다. 얼굴이 달라졌다."합니다. 아내는 "남의 여자보고 쓸데없는 소리하는 거 아니야"하고 대꾸합니다. "아무래도 달라진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도 속상해서 교회 좀 나갔지 뭐." "그래? 예수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너 얼굴 달라진 거 보니 뭔가 있는 것 같다. 나도 교회 좀 나가보고 이혼하자." 그래 둘은 갈라서지 않은 채 교회에 잘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라지고,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인격이 변화됩니다. 성령께서 나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작업을 내 안에서 이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내 안에 생기기 때문입니다. 교만을 버리고 주님의 온유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온유 겸손한 주님 마음 품어야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주님을 본 받아 사랑으로 베풀고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욕심 때문에 화평이 깨어지고 분쟁에 휘말리게 되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늘 싸웁니다. 자신 안에서 갈등과 번민이 일어나게 되고, 가정 안에서 가족들 간에, 사회에서 어디를 가든지, 교회 안에서도 가는 곳마다 분쟁하고 싸웁니다. 이같이 분쟁하고 싸움이 있는 곳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늘 힘들고, 피곤하고, 고민하고, 곤고하며, 비틀거립니다. 욕심은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1: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했습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하나님도, 부모, 형제도, 가족과 친구,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결국은 인생의 장님이 되어 더듬거리다가 모든 것을 다 잃고 빈손으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도 대 재벌인 모 그릅 회장이 물러가면서 후계자 자리를 놓고 장남과 차남이 대립하고 있다는 방송 내용을 보았을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화평케 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어떤 백만장자가 신문에 이런 광고를 실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진실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 백만 불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정해진 날짜가 되자 수백 명의 지원자가 모여들었습니다. 저마다 자기는 만족스럽고 스스로 행복하다면서 행복의 내용을 설명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에 대해서 만족스럽다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받는 보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그 보수에 대해서 스스로 항상 만족스럽게 생각하여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고 산다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내에게 만족하고, 어떤 사람은 남편에게, 혹은 자녀들에게 만족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취미생활이 너무 좋아서 여기에 만족을 느끼며 산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하였습니다. "저는 불평하고 싶어도 불평할 거리가 없어서 걱정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열심히들 나름대로 행복과 만족을 자랑했지만 어느 자랑도 납득할만한 것이 못되어 결국 백만 불 상금은 아무도 받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고하니 주인공인 그 광고주가 던진 단 한마디의 질문에 아무도 합당한 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당신들이 진실로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면 내 돈 백만 불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까?" 그들이 만족하다고 하는 이면에는 아직도 많은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질이 귀하지만 하나님, 사람은 더 귀합니다. 물질이 화평을 파괴하는 도구가 아니라 화평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물질을 잘 사용함으로 물질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가족 간에 사랑과 우애가 더욱 깊어지며,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사랑과 존경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더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욕심을 극복하고 욕심을 이긴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면서 스스로 가난을 자초 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사랑으로 베풀고,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 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병든 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온 인류를 위해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에게 부어지는 사랑으로 주님을 본받아 사랑으로 베풀고 섬기는 자로 살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배워 욕심을 버리면 더 평안해지고 넉넉해집니다. 잃었던 신앙도, 건강도, 사람도, 순수함도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고 더 섬기는 성도로 삽시다.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고 알지 못했던 새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섬김으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셋째, 믿음으로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앙의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소망을 두고 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 명예, 권세 등이 가장 귀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얻고자 하니 끝없는 죄와 분쟁과 다툼 가운데서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얼마나 평화를 필요로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국가와 국가 간에 이 평화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이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끼어들기만 하면,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혜가 없는 것 같아도, 배운 것이 없는 것 같아도,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아도 있는 그 자체로 주변을 평화롭게 하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 주석가인 메튜 헨리는 평화를 만드는 자가 복을 받는다면, 평화를 깨뜨리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혹독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12:18)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했습니다.

 

평화의 주님을 믿는 성도는 화평하게 하는 직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되고,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기에 욕심 부리기보다, 세상 연락에 빠지는 사람이 되기보다 하늘에 보화를 쌓기 위해 양보하고 희생 하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술 취하고 방탕한 삶을 살다가 예수 믿고 불신앙적인 모든 것을 끊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서 주지사도 되고 이제는 세계를 움직이는 대통령이 되었노라고 당당하게 고백했습니다. 부시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알코올 중독자로, 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이 그와 가족과 미국과 세계를 세우는 사람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화평케 하는 자들로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다음에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의 복입니다.

 

우리는 어느덧 팔복의 마지막 정상에 있는 말씀까지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말씀보다 더 길게 설명까지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마음에 평안을 가지게 되고, 구원을 받고, 치유를 받고, 형통 하게 되는 복을 좋아 하지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미움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핍박을 받고, 손해를 보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최고의 복으로 알고 기뻐하는 성도는 그리 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이 왜 최고의 복일까요?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와 동일한 신분으로 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요 15:18-19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울이 성도들을 핍박하게 될 때에 예수님은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당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또 손해까지도 보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환난과 참음에 동참하는 삶을 살고 있는 주님의 동역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1:24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나라.”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십자가,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일꾼, 교회의 일꾼으로 부르셨는데, 우리들은 일꾼으로 주님을 위하여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헌신하며 사는 것, 이 모습이 십자가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 할 때 고난은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철저하게 박해하는 참혹한 공산정권 치하에서만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저 이슬람 국가나 불교 국가에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많은 훼방과 조롱과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뿐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14:22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8: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고난을 받으셨고 지금 영광가운데 올리우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삶에도 먼저 고난을 받는 것이고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사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말씀을 준행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살 때 기뻐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불순종할 때 슬퍼하시고, 징계를 통해서라도 바로잡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모세를 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수1: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예수님은 산상수훈 말씀을 마치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7:24-27)

 

1:25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바울은 복음 전파를 사명으로 하는 일꾼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일꾼은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 자부심이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알고 섬기기에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말씀대로 맡겨진 사명을 이루는 성도가 되지 못하고 자신의 잘 못된 신앙관과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어려움을 당할 때 자신이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고 잘 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여 성도가 교회 봉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가정 일은 거의 돌보지 않고 남편과 자녀들을 등한시합니다. 그러자 시부모와 남편과 자녀들이 그 여성에게 불만을 쏟고 화를 냅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그 여 성도는 자신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며 교회에 와서 박해의 영들아! 떠나라고 철야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는 결코 의를 위한 박해가 아니라 오직 그릇된 신앙의 오해에서 온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과 어리석음에서 스스로 자초한 고난인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거나, 자신에게 복을 주는 고난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셋째, 하늘나라가 저희의 것이요, 또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본문 마5: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마5:11-12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했습니다. 왜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까? 주님은 그렇게 핍박을 받는 자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말씀합니다.

 

누가 하늘에서 상을 많이 받을까요? 교회에서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하며 높임 받는 사람이 천국에서 받을 상이 클까요? 안입니다. 직분과 상관없이 주님을 위해 의를 행하다가 핍박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천국에서 크다 인정받고 상급을 받습니다. 5: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저들이 채찍질을 당하고도 기뻐한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당한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고 나서, 매를 많이 맞고 손과 발이 착고에 채워졌지만, 감옥에서도 오히려 기뻐하며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받는 핍박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며, 따라서 장차 하늘의 큰상 받게 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먼저 화평케 하는 자의 복입니다.

 

첫째, 주님 닮은 온유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될 때, 둘째, 주님을 본 받아 사랑으로 베풀고 섬기는 사람이 될 때, 셋째, 믿음으로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될 때 화평케 하는 자로 살 수 있습니다.

 

다음에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의 복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와 동일한 신분으로 여김을 받기 때문이요,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사는 모습이기 때문이요, 셋째, 하늘나라가 저희의 것이요, 또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팔복의 은총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