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기다리는 성도 시편 130:1-8 08/12/14
12월은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탄 휴일을 기다리고, 연말 망년회의 질펀한 밤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영광의 주님을 기다립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만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달 24일과 25일에 모든 관심을 집중합니다. 특히 불신 세상의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24일 저녁에 도시의 숙박업소들은 오직 놀고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인해 동이 납니다. 하지만 성탄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대강절입니다. 왜냐하면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영국군인 출신인 맥도널드 목사님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포로가 되어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었습니다. 포로들은 모두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맥도널드 목사님의 친구 가운데 전기기술자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라디오를 조립하여 비밀리에 BBC 영국방송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벽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맥도널드 목사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피곤한 가운데 겨우 잠에서 깨어난 맥도널드를 보고 그 친구가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그들이 왔어! (They have come!)” 이 말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합군이 드디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왔다’라는 말은 희망의 소식이었습니다. 목 놓아 기다리던 소식이었습니다. 이 기쁨의 소식이 온 수용소에 퍼지자 포로들은 너무 기뻤습니다. 그들은 마당으로 나가 춤을 추면서 높은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들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포로들의 함성을 들으면서도 그 의미를 몰라 당황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철조망 너머로 총구를 겨누고 있던 독일군 감시병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포로들이 집단으로 미치지 않았나. 해서 총을 겨누고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누군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이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알고 기다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차이 또한 엄청나게 큽니다.
대강절은 2000년 전 아기 예수로 오신 주님을 생각함과 동시에 재림하시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1. 깊은 데서 부르짖음 (적용 해석: 깊이 있는 신앙)
1절=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여기 ‘깊은 데’란 인생의 심연(深淵)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인생의 고난의 심연을 만나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고백합니다. ‘깊은 데’란 불순종으로 인해 요나가 들어가야 했던 물고기 뱃속(욘 2:1)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죽음의 장소이고 절망의 장소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장소에 이를 때 사람은 더욱 진실해지고 깊이 있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깊은 데서 부르짖었다는 것은 시인의 깊이 있는 신앙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성도는 깊은 부르짖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깊이 있는 신앙이 아니고는 예수 그리스도와 진정한 교제를 가질 수 없습니다.
깊이 있는 신앙을 위해 하나님은 성도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광야가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그것이 결코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으리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황무지가 변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의 약속의 땅을 기다리면서 끌레르보의 버나드가 드렸던 기도를 되풀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제가 무엇을 했기에 주께서 저를 피해 숨으시는 겁니까? 이젠 기도하기에도 지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 기도하고 구하며, 계속 기다릴 것입니다. 주님밖에는 달리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깊은 데서 부르짖는 성도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누가복음 5장에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여러분, 지금 우리의 몸은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깊은 곳에 우리 마음의 그물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계신 예수님과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 곁에 모실 수는 있겠지만 그분을 내 중심에 모시어 들일 수는 없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던 초기 단계를 보면 이 진리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증거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역을 막 시작하시면서 아직 유대지역에 계실 때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대면했습니다. 그때 이미 ‘게바’라는 이름까지 얻었습니다(요 1:42). 그러나 그는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고, 갈릴리에 와서 어부 노릇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대로 깊은 데에 그물을 내렸을 때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구주로 맞아들이는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좀 더 깊이 있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좀 더 진지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깊은 데서 부르짖는 기도여야 합니다. 좀 더 깊이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찬양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혹시 오늘도 습관적으로 이 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런 자세로는 교회에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이 한 시간의 예배에 우리의 마음 중심을 하나님의 깊숙한 곳에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깊숙한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으로 예배드릴 때 우리의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2. 죄 사함이 오직 주께 있음을 고백함 (적용 해석: 진실한 회개)
3,4절=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시인은 여호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문제 해결보다 먼저 죄악의 문제를 다룹니다.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이것은 시인이 ‘깊은 데’ 처하게 된 정황이 죄악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암시하며, 동시에 그가 그 죄를 깊이 절감하고 회개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여기 ‘죄악’(아노오트)은 복수명사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도무지 설 수 조차 없는 무수한 죄로 얼룩져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시인은 사유(赦宥)하심 곧 죄 용서가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본 절의 ‘사유하심이’(핫쎌리하)를 직역하면 ‘그 용서’ 입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용서가 하나님께만 있음을 말합니다. 범죄가 전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듯이 용서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문제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리는 성도는 진실한 회개를 통해 용서를 경험한 성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에 대한 진실한 회개 없이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죄를 자복하는 자를 용서해 주시고 그 마음속에 주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사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구약의 위대한 인물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고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충성스런 신하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와 불륜의 정을 통하고 이를 숨기기 위해 우리아를 죽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죄를 지적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왕이요 절대 권력자입니다. 사울처럼 자신의 죄악을 얼마든지 합리화할 수 있었고, 선지자를 내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달랐습니다.
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시 51:3,4=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다윗은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악을 숨김없이 고백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리라”(삼하 12:13).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지 아니하고 사는 길은 주님 앞에 나의 죄악을 낱낱이 고백하고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의 어떤 흉악한 죄라 할지라도 능히 깨끗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셔 들이는 길은 하나님 앞에 진실한 회개자로 서는 것뿐입니다.
이번 대강절 절기를 기점으로 우리의 죄악된 모든 것을 자백하십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온전히 모셔 들이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주를 기다림 (적용 해석: 파수꾼의 간절함과 인내)
6절= “파수꾼 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시인은 이제 파수꾼의 비유를 통하여 더욱 절절한 심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 절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자의 심경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구절로서 많은 사람의 입에 회자(膾炙)되는 아름다운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이 본 절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비교 대상으로 내세운 것은 ‘파수군’ 입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 인간의 기다림 가운데 가장 길고 간절하면서, 극도의 피곤함 가운데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사 21:11.12). 아무리 지루하고 피곤하더라도 결코 졸거나 포기할 수 없는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 나간 보초병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밤중에 홀로서서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오직 동터오는 아침만을 기다립니다. 보초병 교대 시간만을 학수고대합니다. 그 사이 바스락 소리만 나도 온 몸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모든 추위와 피곤을 내어 쫓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간절함과 인내가 보초병의 그것보다 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인이 ‘파수군’을 비유로 든 또 다른 이유는 6절의 ‘파숫군이 ~보다’에 해당하는 단어(밋쇼메림)이 3절에서 이미 사용한 ‘주께서 감찰하실’에 해당하는 단어(티쉬마르)와 어근이 같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는 이 동사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을 차마 주목하지 않으신다는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용어를 다시 사용하여 시선을 오직 하나님께 고정하고 떼지 않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도의 악에서 시선을 거두어 주시는 것이 은혜라면, 거기에 상응하는 성도의 바른 태도는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악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진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사 30:18).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탕자 이야기’에서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탕자가 돌아오면 때려서 사람을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큰 아들은 그것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혼찌검을 내주려고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옷을 갈아입히고, 새 신발을 신기고, 반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벌이기 위해 기다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다릅니다. 다시 봅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사 30:18).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줍니다.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 30:18).
아주 높은 산에 큰 바위 하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바위의 아주 작은 틈 사이에서 예쁜 꽃 한 송이가 피어났습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작은 꽃씨 하나가 그 좁은 공간에 정착하여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꽃을 피워 냈다고 사람들은 자연의 생명력에 놀라워하며 저마다 한 마디씩 감탄했습니다. 그 작은 꽃송이는 어떤 설교보다도 더 생생하게 생명의 고귀함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바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바위가 꽃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를 ‘풀’이라하지 않고 ‘꽃’이라고 부르게 된 것을 축하해.” 그러자 꽃은 “46일 동안을 헤맸는데 사람들이 바위틈에 절묘하게 피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바위 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고마워”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바위는 자신이 기다린 세월은 만년하고도 46일이었다며 기뻐했습니다. 놀란 꽃은 바위에게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나는 내 속에 있는 소망만으로 꽃망울을 터뜨린 줄 알았는데, 어떤 이의 그리움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 고마워.” 그러자 바위는 또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는데, 이제 네가 있음으로 인해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어. 고마워.” 천사는 바위와 꽃의 대화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절묘하게 존재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이 각자를 기다려 왔는지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 질러도 듣는 이가 없었습니다. <월간기독교>에 실린 글입니다. 큰 바위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생명 있는 성도로 꽃 피우시기 위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님의 강림을 기다립니까?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에게 은혜가 있고 긍휼이 있고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습니까? 구원의 은혜와 죄 사함의 자비를 베풀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수없이 예언하시고 약속하셨습니까? 기다리는 자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기 위함입니다. 영생의 부활을 경험케 하시고, 천년왕국의 영광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파수군의 간절함과 인내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진한 감동과 소망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대강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4주간의 대강절을 거쳐 우리는 성탄을 맞습니다. 이 기간을 잘 준비하는 성도의 가정에는 육신을 입고 오신 초림 예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할 것이고, 재림 예수의 소망의 은혜가 충만해질 것입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깊이 있는 부르짖음으로 주님의 임재를 요청하십시오. 각자의 예배와 기도, 찬양과 헌신에 나타나고 있는 신앙의 깊이를 측정해 보십시오. 진실한 회개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거룩한 마음의 방을 예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군의 간절함과 인내로써 주님의 강림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강림절기의 은혜가 온 교회 위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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