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증인 5 (계 11:7)
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지금 우리는 본문의 “두 증인”을 통해서 성령님은 누구신지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이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내용을 오늘 강해를 통해서 밝히고자 합니다.
그럼 성령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14. 구원의 결실을 얻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7절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두 증인이 증언을 마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여기 증언을 마쳤다는 것은 아주 끝난 것을 가리키지 않고 증언의 목적을 달성한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증거는 예수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증언이 일단락 마치는 때가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의 증거가 제자들의 신앙고백의 결실을 보신 후 일단락되신 것과 같습니다. 그 전까지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에 집중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는 이 시점이 중요합니다.
마16:21에 "이 때로부터(즉 신앙고백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언이 마쳐진다는 말씀을 한 개인에 적용했을 때 성령의 역사로(요15:26) 그 사람이 예수 믿게 되는 구원의 확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고전12:3에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순간에 전도자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 그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성령 받고 목숨 바쳐 한 일 역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증거의 그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 이 성령의 증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구원 얻은 무리가 자꾸 많아졌고 모두 성령 받아 핍박도 기뻐하는 알곡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열매를 맺으려면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신령한 열매도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2:3-5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구원의 결실을 얻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15. 성령님은 소멸되는 영이십니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여기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은 계 9장에서 황충으로 세상욕망을 가리킨다고 배웠습니다. 세상욕망은 깊이가 끝이 없는 무저갱처럼 그 욕심이 한이 없는 우리의 육성입니다. 그런데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이 두 증인을 죽였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소멸되실 수 있는 영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므로 그 본체가 죽을 수 없고 그 어떤 세력도 성령님을 대적할 수 없지만 오직 하나 성도 안에서 우리의 짐승 같은 육성 때문에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전5:19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영어성경에서는 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 즉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 어떻게 잘못하면 성령의 불을 끌 수 있을까요? 우리의 죄 많은 육성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입니다.
우리의 불순종도 은혜의 불을 끕니다. 우리의 게으름도 열심부족도 완악함도 탐심도 세상사랑도 인간의 생각 이단 신비주의 염려 근심 교만 자랑 향락 우상 기타 죄와 육신적인 속성들이 성령의 불을 끕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두 증인과 전쟁하기 위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이 왜 이 때 올라올까요? 왜 이 때 전쟁이 일어날까요? 이것이 중생 전과 중생 후의 차이입니다. 즉 우리가 중생하기까지는 새 생명을 갖지 못해 갈등도 없지만 성령의 증거로 예수 믿어 내 안에 새 생명을 갖게 되면 이제 내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갖는 독특한 내적갈등입니다. 그래서 갈5:17-18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항상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이 육성을 이기십니다. 그래서 16절에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은 늘 성령 충만 받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충만하지 않으면 죄에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 성령을 소멸하지 않고 늘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16. 성령님은 죽어야 사는 은혜를 체험케 하십니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이 말씀을 앞에서는 각인의 심령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소멸의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좀 넓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려고 합니다. 즉 이 짐승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악의 세력들의 관점입니다.
즉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 같은 악령으로 가득한 악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셨고 결국은 자기를 죽린바 되었고, 나아가 우리도 예수 안에서 죽고 다시 사신바 되었습니다. 이 복음의 신비 관점에서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즉 다음절부터 보면 그 죽음과 삶의 배경이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 다시 사신 그 십자가와 부활의 배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즉 악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으나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셔서 악을 지배하심과 같이 그와 동일한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은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성령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두 증인의 앞날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배경이 펼쳐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 동참케 하시는 그 은혜를 말한 것입니다. 이 시점은 성령의 내적역사로 들어가는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는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고,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는 그리스도의 이루신 공로를 체험할 수 없고 예비하신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만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며 현세에서부터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온갖 영생복락을 신앙 안에서 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사랑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받아 누리도록 쉬지 않고 구속사의 과정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의 은혜로 예수 믿어 하나님의 새 생명의 자녀 되고 그 은혜의 충만함으로 내적 갈등을 이기고 그의 은혜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복음의 신비를 받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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