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십사만 사천 (계7:1-8)

nam씨 2022. 12. 17. 13:42

십사만 사천 (7:1-8)
      
본문의 십사만 사천은 앞의 일곱 인에 대한 전체적인 조명이다. 즉 십 사만 사천은 성화된 백성들이요, 땅의 바람을 잡음은 성화 환경의 조성을, 해 돋는 곳은 여호와 경외의 신앙이다. 그리고 12지파에서 성화의 방법이 나타나 있으니 유다는 찬송 생활을, 루우벤은 기도 생활을, 갓은 세속을 멀리하는 지혜를, 아셀은 말씀 묵상을, 납달리는 마음 파수를, 므낫세는 근신을, 시므온은 은사의 도움을, 레위는 용서와 사랑을, 잇사갈은 십자가 겸손을, 스불론은 지체와 교제를, 요셉은 연단과 섬김을, 그리고 베냐민은 주야로 갈급하고 사모하는 마음이다.

설 명

<십 사만 사천>

1. 관계성
칠 인을 전체적으로 조명
흰옷 입은 자들과는 동일한 사건의 다른 양태

2. 그 정체
성령 인침으로 성화된 자들
종들 - 하나님 주권 확립 144,000 - 충만한 제자적 분량
12지파 - 성화 방편적인 여러 면모

3. 성령 인침
바람을 잡음 - 인생문제 자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 - 성령의 인
해 돋는 곳 - 예수 믿음과 여호와 경외 신앙

4. 성화를 위하여
각 지파의 영적 특징은 성화를 위한 신앙적 요소이다.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26:7)
<12,000 = 제자훈련수×충만분량수>
유다 - 복음 찬송
루우벤 - 열심 기도
- 분리 지혜
아셀 - 말씀 묵상
납달리 - 마음 파수
므낫세 - 근신 자세
시므온 - 성령 은사
레위 - 용서 사랑
잇사갈 - 겸손 견고
스불론 - 교제 도움
요셉 - 연단 섬김
베냐민 - 갈급 사모


(본 문)

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5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7:1-8)


(강 해)

오늘은 십 사만 사천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섯째 인까지 떼신 후에 십 사만 사천과 셀 수 없이 많은 흰옷을 입은 무리들이 나타납니다. 이 두 삽경의 의미를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학자들은 십 사만 사천과 흰옷 입은 무리를 연속적인 한 사건으로 보거나, 11:26에 의거하여 장차 종말에 이스라엘의 대 부흥을 염두에 두고 십 사만 사천을 유대인 사역자들로 후자를 그 전도의 결과로 나타난 많은 결신자들로 봅니다.

이 두 입장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충돌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은혜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삽경은 앞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 인 재앙을 종합적으로 조명하는 동일한 사건의 양면입니다. 즉 십 사만 사천은 하나님 편에서 인치는 면을 다루었고, 흰옷 입은 무리는 동일한 사건이지만 사람 편에서 즉 연단을 거쳐서 참 신앙을 소유함으로 흰옷을 입어 성화 되는 면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미 인 재앙에서 보여주었듯 십 사만 사천의 이마에 인침은 성화를 의미한 것이며, 흰옷 입은 무리가 큰 환난에서 나온 것도 역시 연단을 통한 성화를 암시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십 사만 사천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 주권 신앙이 수립된 백성들입니다.

3절에 우리 하나님의 종들이라 했습니다.
여기 종들이란 주의 종들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소유 개념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상징함에 더 강조점이 있습니다(1:13, 43:1). 그러나 이 소유 개념에서 엿보이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5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했습니다. 여기 순종케 되어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간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6:46) 하신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한 특징은 우리 하나님이라는 언약적 호칭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11:19-20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3절에서 하나님 주권 신앙이 수립된 모습을 봅니다. 그 증거로 계14:4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는 구절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 주권 신앙이 수립된 자들입니다.

2. 경건 신앙을 통해 성령으로 거룩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4절에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했습니다.
앞서 언급했거니와 역사적으로 풀면 종말의 하나님께서 쓰실 사역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령한 관점을 취급하고자 합니다. 신령한 관점에서도 푸는 방법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가령 3×4=12×12=144×1,000을 곱한 수로 풀면 모든 시대에 구속받은 하나님의 교회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완전수 3에 온 땅의 수 4를 곱한 12는 선택수 혹은 교회 조직수입니다. 이 교회 조직수를 제곱하면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고, 여기에 그 수효를 알 수 없는 제한 충만수 1,000을 곱하면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선택하신 모든 시대의 모든 구속받을 성도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보다 성화로 이끄시려는 계시록의 목적에 부합하게 제자의 수 12를 제곱한 수에 충만수 1,000을 곱한 수로서의 의미에 더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참 경건을 배워 성령 충만함으로 변화된 성도들입니다. 대개 제곱은 신구약 혹은 안팎 혹은 영육 혹은 천상과 지상이나 증거나 진실 등을 가리키는 수입니다. 그리고 이마에 인을 맞았는데 이마의 인침은 인격적인 변화를 시사합니다. 마치 666의 인침이 악인화를 의미함과 같이 십사만 사천의 이마의 인침도 의인화라는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으로 볼 때 십 사만 사천은 성령으로 변화된 성화의 성도를 의미합니다.

혹자는 14만 사천의 숫자만큼만 하나님께서 부르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 단체는 이미 그 상한선을 넘고 마는 모순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 수효를 명시함은 숫자에 담긴 영적인 의미가 있어서이지 하나님께서 숫자 놀이하심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 십 사만 사천은 경건 신앙을 통해 성령으로 변화된 인격을 가진 성화된 자들입니다.

3. 여러 면에서 영적인 면모를 가진 자들입니다.

4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라 했습니다.
여기 기록된 12지파에 대해서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혹은 영적인 이스라엘이라는 등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두 가지가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바울이 예언한 롬11:25의 종말의 이스라엘 부흥을 생각해 볼 때 문자적 이스라엘에서 선택된 종들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본문의 12지파의 구성이 신앙 중심으로 독특하다는 점에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지칭함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과연 롬11:25을 지칭하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나아가 영적 이스라엘이라면 왜 지파 중에서 일부만을 선택해야 하느냐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만약 영적인 이스라엘이라면 에브라임과 므낫새가 나와야 마땅하며 문자적 이스라엘이라면 단 지파가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역시 묵시문학적인 계시록의 특징과 쓰신 목적의 안목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즉 신앙적인 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관점에 따라서는 그들이 영적 이스라엘 혹은 육적 이스라엘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어떤 규명적 관점이 아니라 신령한 삶을 강조하는 계시록의 특성으로 볼 때 교훈적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뒤에서도 언급되지만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긴다(26:7)는 점에서 생각할 때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란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십일조의 용례가 그렇고 사19:18의 경우와도 같이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는 개념이므로 그들이 가진 여러 가지 신앙적인 특징들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으로 장성한 자로서 실행하는 성화 방편적인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럼 성령의 인침이 어떻게 진행됩니까?

1. 하나님께서 구원의 환경을 조성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1절에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했습니다.
대개 4는 땅의 수로 세상 세계 사방 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네 모퉁이란 세상의 어떤 환경적인 규제나 장악이나 주관을 뜻합니다. 또 땅 사방의 바람은 어떤 세상의 풍조나 관심 등입니다. 그리고 땅과 바다와 나무는 이 세 종류는 인성의 요소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함은 세상 풍조나 사조나 관심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면서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하여 인생 문제에 깊이 빠지도록 하시는 구원환경 조성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바람을 붙잡아야 인치는 역사가 시작되는 이상한 바람입니다. 가령 질병과 가난과 고난과 죽음의 공포 등 어떤 무엇을 통하여 인생관 가치관 등을 깊이 생각토록 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이러한 인생에 대한 깊은 재고 없이는 사람들은 예수 앞에 나오지 않을뿐더러 거룩한 삶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거룩한 성도들이 극도의 연단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그리스도 앞에 나타난 세례 요한이 이 사역을 했습니다. 그는 선지자와 율법의 화신과 같아서 사람에게 인간은 율법 앞에서 모두 죽을 죄인이며 오직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산다고 역설했습니다. 마치 애굽의 열 재앙도 구원으로 이끄는 준비적 사건입니다. 루터는 함께 있던 친구가 벼락을 맞는 사건을 통하여 인생과 신앙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도 극도의 방황 속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혹은 복음을 대적하는 나라에 선교가 용이하도록 선교의 환경을 조성하심도 그 일종입니다.

저도 어릴 때 일찍이 찾아온 죽음의 공포 속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제 마음에는 온갖 육신적 희망과 포부로 가득했지만 하나님께서 죽음의 공포로 그 바람을 잡아 주시고 나를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래서 쉽게 주님을 영접할 수 있었으며 믿음을 가진 후에도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하여 주님을 추구하며 나를 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람을 잡는 준비적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2. 예수님을 믿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2절에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했습니다.
여기 구태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이라 함은 보통 인침이 아니라 성령의 인침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천사가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인을 칩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여기 해란 하나님과 예수님 혹은 복음이나 은혜 등을 가리킵니다. 일부 부흥사들이 우리 한국인들에게 소망을 주려는 의도로 우리 동방의 한국을 가리킨다 했으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말은 못됩니다.

성경 말4:2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초림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해 돋는 곳은 예수 믿음(4:16) 혹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가리킵니다(4:2). 왜냐하면 예수 믿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나아가 경외하는 믿음이 없이는 충만한 은혜 가운데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은 비슷한 논리이지만 은혜의 역사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부흥이 일어날 때 죄인들이 구원받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죄인을 위해 기도하고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에게 인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령 충만 받는 법을 몰라 시험에 드는데 성령 충만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그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론에 입각하여 하나님 잘 경외할 때 충만한 은혜가 있습니다. 또 예배적인 자세 즉 하나님 주권적인 삶이 은혜 받는 겸손의 삶입니다. 예배와 아울러 예배적인 삶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을 높이어 찬양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겸손함과 복음 진리에 서서 하나님을 섬길 때 성령 충만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이 곧 해 돋는 곳입니다.

3. 성령의 인침은 우리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2-3절에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했습니다.
성령 인침의 일반적인 교리는 예수를 믿어 중생할 때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치셨기에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서정에서는 중생이 믿음보다 앞섭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때는 인침과 믿음은 동시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종들의 이마에 인친다는 것은 이마는 인격의 상징으로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성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봉을 떼는 성령의 인침 사건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또 이마에 인침을 받으면 뒤의 심령 고통을 상징하는 황충 재앙에서도 제외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성령의 인침을 충만히 받으시기 하랍니다.

그럼, 우리가 성화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할 여호와 경외의 신앙의 구체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말씀하기 전에 본문이 영적 혹은 육신적 이스라엘을 나타내려 했다면 열 두 지파 이름만 열거해도 충분한데 왜 같은 내용을 이렇게 12번이나 중복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묵시문학에서는 이런 점까지도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조그만 한 가지라도 무언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는 여기 지파 중에라는 문구입니다. 일반적으로 지파 중에란 지파 안에서 뽑힌 일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역사적 종말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종들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좁게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각 지파에게 주신 특징과 장점이라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하였듯 뽑혔다는 점에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십일조의 용례와 사19:18의 용례와 같이 그 지파가 가진 여러 가지 신앙적인 특징들을 시사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계시고(18:20), 독특한 은사를 부여하사 뽑으실 뿐 아니라(3:7), 받은바 은사는 각각 다르며(12:6), 지파란 유기체적 분파를 의미하는 것으로 형제와 지체는 서로 돌아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17:17, 고전12:25).

이 해석의 키는 바울의 12지파관에도 나타납니다. 26:7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라고 했습니다. 벧전1:10-12에도 이 섬긴 바가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고 그 복을 신약 성도들은 거저 믿음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기 12지파는 결국 성화를 위한 훈련 내용입니다. 그리고 12,000을 해석하면 제자수에 충만수를 곱한 것으로 이를 신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성화적인 분량에 이르도록 해야 할 훈련 내용입니다.

성경은 오묘해서 문자적인 의미도 있으며 영해도 있고 영해에 있어서도 그 관점과 폭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령 객관적 구속사로 이해할 때 다르고 공동체적 교회에 적용할 때 다르고 개인 심령에 주관적으로 적용할 때 다릅니다. 그래서 본문은 한 본문이어도 듣는 대상에 따라 오색 무지개와 같이 각각 다른 오묘한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영해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49장을 보면 유다와 요셉 지파를 제외하고는 축복을 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단점 속에도 하나님이 주신 특징과 장점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열이 존재하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쓰시듯 이 특징과 장점은 우리 신앙생활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열두 지파에는 성화의 원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럼 성화의 분량에 이르도록 훈련해야 할 내용은 무엇일까요?

1. 복음에 선 찬양생활입니다.

5절에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했습니다.
먼저 유다는 모든 복음 적인 요소를 다 갖춘 지파입니다. 야곱의 네 째 아들 유다는 본래 대단한 책임감과 그 책임감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은 사람으로 구속사적 예표입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언약의 핵심부인 막벨라 굴을 기업으로 차지했으며, 예루살렘까지도 유다의 수도였으며, 가나안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고, 진을 치거나 진행해도 맨 앞이었으며, 가장 강성한 지파요, 더 중요한 것은 이 지파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징합니다. 거기다 유다는 찬송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거룩한 성화적인 삶을 위해서는 복음에 서서 늘 찬송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이 나오면 언제나 찬송과 함께 나옵니다. 어린양의 노래 모세의 노래 마리아의 찬송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골로새서 1장이나 에베소서에서도 구원이 나오면 문장은 모두 찬송시로 변합니다. 그것은 감격의 제목일 뿐 아니라 우리가 복음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감격을 나타내는 찬송이 중요합니다. 초대 교회도 찬송하다가 성령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별명이 사자임과 같이 매사에 적극적이고 희생적이며 강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환경과 상태에서든지 상황을 보지 말고 복음에 서서 강한 찬송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모르고 찬송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선 찬송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2. 열심의 기도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5절에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했습니다.
루우벤의 특징과 장점은 창49:3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한 대로 힘의 상징입니다. 그의 힘은 마치 물의 끓음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긍정적으로 바꾸어 보면 열심이라는 장점이요, 이 성격을 신앙과 연관시켜 보면 기도와 귀결됩니다. 즉 힘을 다해 열심히 기도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도 기도하다가 변화를 받았습니다.

3. 세속을 멀리하고 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5절에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했습니다.
그럼 갓 지파의 장점과 특징은 무엇일까요? 49:19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했습니다. 이처럼 갓 지파는 모압과 암몬의 경계선인 요단 동편에 거하면서 짐승을 길렀으며 그들의 호전성과 용맹성으로 인해 그모스와 몰렉을 섬기는 모압과 암몬의 위협을 잘 막아내었습니다. 그모스와 몰렉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자식을 태워 신에게 바치는 세상 정열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사랑함은 자기 영혼을 불사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갓 지파에게서 나를 쳐서 복종시키며 세속을 멀리하고 끊는 지혜를 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6절에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했습니다.
49:20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했습니다. 여기 기름진 식물이 나오는데 기름진 영의 양식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 심령을 옥토로 만드는 기름진 영의 양식입니다. 그런데 왕의 진수를 공궤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보통 양식이 아니라 이 말씀을 먹으면 왕권과 그 영화로움이 나타나는 특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기쁨,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가장 행복하며 이는 성화의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5. 항상 믿음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6절에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했습니다.
49:21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했습니다. 이와 같이 놓인 사슴은 잘 달아납니다. 그런데 왜 하필 달려오는 사슴이 아닌 달아나는 사슴입니까? 이처럼 이들은 가나안 왕 야빈이 침략했을 때 신속히 물리쳤습니다. 여호수아서 강해에 나온 대로 야빈은 비 진리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생각이 찾아올 때 신속히 물리쳐야지 조금만 오래 머물게 하면 마음을 사로잡고 맙니다. 우리는 진리에 서서 한 순간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생각을 사단에게 내어주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의 가치관과 사고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6.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신앙해야 합니다.

6절에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했습니다.
성경에 므낫세는 요셉의 장자이지만 동생 에브라임보다는 못하다 했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에서는 뛰어난 지도자들이 많이 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브라임이 마음의 상징이라면 므낫세는 마음의 지배를 받는 육신입니다. 므낫세 지파는 반 지파씩 가나안 동 서편에 나누어 살았는데 그들은 가나안 서편을 다 정복하도록 7년간 충성을 다해 도왔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마치고 분배를 다하도록 여호수아의 별도의 명령이 있기까지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믿음을 이루려면 이렇게 육신의 안일을 물리치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야 합니다.

7. 성령의 은사를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7절에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했습니다.
49:5-7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했습니다. 이는 축복이라기보다 저주입니다. 그러나 레위는 하나님 편에 섬으로 일찍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백성들에게 흩어져 살면서 귀한 제사장이 됩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별 볼 일 없이 흩어져서 살아서 아무 소망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므온 역시 예수 복음 안에서 큰 축복으로 바뀌었으니 그것은 성령 은사의 상징이 된 점입니다. 즉 백성 중에 흩어져 살듯 성령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온전히 임재하시며, 그들이 맹렬히 잔해하는 기계이듯 성령께서는 죄악을 소멸하시는 역사로 성화를 이루십니다. 그 이름 역시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으로 성령의 오심을 가리키며, 시므온의 500용사 역시 성령에 대한 한 편의 그림과 같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진리는 성화는 은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교훈입니다. 은사의 도움이 없이 혼자서 하는 신앙생활은 심히 어렵고 시행착오도 많습니다.

여기 은사에는 객관적으로 교회에 내신 주의 사역자들도 은사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온전케 하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주관적으로는 성령의 은사인데 이는 덕을 위해 주신 것으로 역시 온전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8. 용서하고 사랑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7절에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했습니다.
레위 지파 역시 시므온과 함께 저주받았지만 철저히 하나님 편에 섬으로 제사장직의 축복을 받습니다. 제사장은 죄를 덮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발에 끌려 덮이는 긴 옷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온 나라에 거하면서 피해오는 죄인들을 도피성으로 도피시키고 죄인들의 죄를 위해 속죄했습니다. 이처럼 용서와 사랑이 성화의 중요한 방법이요 목표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없으면 하나님도 그를 용서하지 않고 사랑이 없으면 그 신앙은 죽은 것이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9. 십자가 아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7절에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했습니다.
49:14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했습니다. 나귀는 우직하고 특출함이 없지만 힘이 세고 인내가 있고 성실한 동물입니다. 특히 나귀의 인내는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약한 양 앞에 얼마든지 자기를 과시할 수 있는데도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았으니 얼마나 겸손한 자세입니까? 그리고 건장하다고 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도 그를 일으킬 수 없는 것으로 이것은 십자가 아래 굳게 선 견고한 겸손입니다. 우리는 그 누가 무어라 해도 겸손의 위치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겸손 역시 중요한 성화의 방편이요 목표입니다.

이렇게 하나씩 12가지 성화의 요소가 나타나지만 한 가지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중요한 성화의 방편입니다. 12수는 깨어져서는 안될 수입니다. 가령 다 잘 했지만 기도를 안 한다 하면 그 신앙은 무너지고 맙니다. 혹은 다 잘했지만 복음을 모른다면 역시 어렵습니다. 혹은 다 잘했지만 세상을 사랑한다거나 교만하다면 그 역시 참 신앙이 성립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이 중에 어느 하나를 무너뜨리려 할지 모르므로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10. 지체와 영적인 교제를 해야 합니다.

8절에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했습니다.
49:13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했습니다. 스불론은 그렇게 큰 기업이나 좋은 옥토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중해와 갈릴리 사이에 거하면서 무역을 했습니다. 무역을 하는 이유는 나 혼자는 살 수 없으니 서로 물물교환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내가 제일이란 생각을 버리고 지체의 도움이 필요함을 깨달아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 거룩한 삶을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베니게의 제일의 항구 시돈까지 무역을 했습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옳고 필요하다면 세상에서도 배울 것이 많다는 교훈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면에서는 어둠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1. 연단을 통해서 성화됩니다.

8절에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했습니다.
49:22-26에 그를 축복한 내용이 있는데 그가 이런 강성한 복을 받은 것은 연단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애굽 나라로 보내져서 종살이와 옥살이의 연단을 거쳐서 총리대신이 되는 과정은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의 일련의 과정을 보는 듯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심과 높아지심에 연합되어야 합니다.

이 연합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믿어서 되는 신령한 부분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삶에 적극 동참하는 인격적 연합이 있습니다. 가령 결혼을 통해 법적 그리고 육체적인 연합을 이룹니다. 그러나 마음의 연합은 깊은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요셉처럼 연단의 환경에서 철저히 죽어지고 충성할 만큼 낮출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요셉을 높여 주시듯이 영광스럽게 해주실 것입니다.

12. 항상 사모하는 강한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8절에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했습니다.
49:27절에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했습니다. 이러한 호전적인 기질은 사사 에훗과(3:15-22), 기브아 전투(20:19-23), 사울왕의 전투(삼상11:6)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먹이를 갖고 주야로 싸우는 단점 투성이 이리에게서도 장점은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듯 강한 애착을 가지고 항상 가난한 마음 가지고 은혜를 찾고 사모하라는 교훈입니다. 이리는 썩은 것조차도 가리지 않는 먹이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다. 마치 수로보니게 여인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한 그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는 어디까지 이르렀든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결론>
이처럼 거룩한 믿음의 사람 십 사만 사천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12지파에 나타난 대로 성화의 방편을 열심히 활용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실로 기뻐하시는 성화의 참 십 사만 사천과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강해설교연구원원문보기글쓴이: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