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 줄 수 있는 믿음 수2:8-14
보여 줄 수 있는 믿음 수2:8-14, 약2:14~26
줄타기 곡예사 찰스 블론딘(C. Blondin)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장대 하나에 의지한 채 밧줄 위에서 온갖 위험한 동작을 해냄으로 유럽과 미국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1859년 6월 30일, 나이아가라폭포에 로프를 설치하고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높이는 48미터, 블론딘의 곡예를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은 40파운드의 막대기로 균형을 잡은 채 나이아가라폭포를 건너는 곡예를 보며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열광하는 관중들의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뒤로 걸어서 건너기, 안대를 하고 건너기, 자전거 타고 건너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폭포 위를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했습니다.
곡예를 하던 블론딘이 관중을 향해 외쳤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사람을 등에 업고 폭포를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관중들은 “그럼요, 우리는 당신이 사람을 업고도 충분히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블론딘은 “그러면 내 등에 업혀 나와 같이 폭포를 건너갈 사람은 앞으로 나오십시오.”라고 말했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자 관중가운데 서있던 한 남자에게 “당신은 나를 믿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주저 없이 “나는 믿습니다. 기꺼이 당신의 등에 업히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블론딘의 등에 몸을 맡겼습니다.
남자를 등에 업은 그는 로프에 올라가 한발 한발 신중하게 내딛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는 폭포를 건너는데 성공했습니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관중들이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블론딘의 등에 업혀 폭포를 건넜던 남자는 블론딘의 매니저 해리 코드(H. Colcord)였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말이 아니라 실천에 있습니다. 말로만 블론딘을 믿는다고 소리쳤던 군중들과 48미터 높이의 밧줄 위에서 목숨을 블론딘에게 맡겼던 콜코드의 믿음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나의 믿음이 말과 생각만의 믿음일 수도 있고, 실천하는 믿음 일 수 있습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라합이라는 여인은 직업이 기생이고 이방인 가나안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기와 자기 부모, 형제, 친척 등 모두를 구원하였고, 영광스런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라합이 어떤 믿음을 가졌기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을까요? 두 본문을 중심으로 “보여 줄 수 있는 믿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보여 줄 수 있는 믿음은,
1.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고백이 있는 믿음입니다.
라합의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소문을 들음에서 얻게 되었습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지나 요단강을 건너기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는 가장 큰 오아시스가 있고 사람들이 살기에 아주 좋은 여리고성을 점령하기 위해 두 정탐꾼을 그곳에 보냈습니다. 그 때 라합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수2:9-10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땅을 너희에게 주신 것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라합은 소문을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기사와 이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고 지키심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나도 그분을 믿으면 사는 길이 열리게 됨을 믿고 두 정탐꾼에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엇보다 세 가지 고백을 기뻐하십니다. 그 세 가지 고백은,
먼저, 믿음의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네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반석)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아무리 값진 복음이라도 돼지 앞에 던져진 진주처럼 그 가치를 모르고, 유익도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 4:2). 여기 화합이란 둘이 하나 되는 연합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심이 화합이요, 연합입니다. 내안에 있는 내 사상, 내 교만, 내 고집, 내주장을 버리지 못하면 예수님이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5:3에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죄의 고백입니다.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죄를 뉘우치고 회개 할 때 기뻐 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용서 하십니다. 핑계 대고 회개하지 않은 사울은 버림을 받았지만, 겸손히 회개한 다윗은 용서를 받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가롯 유다는 저주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지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 통곡하고 회개함으로 후에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이 주님의 발치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 ‘여인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우리를 사랑 하셔서 생명까지 희생하신 주님은 ‘내가 주님을 사랑 하나이다.’하는 고백,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주님 감사합니다.’고 하는 고백을 들으실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 모두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죄의 고백과 사랑과 감사의 고백을 함으로 나의 믿음을 주님께 보여주는 성도가 됩시다.
2.신앙의 결단과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는 믿음입니다.
구약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점령하기 전에 두 정탐꾼을 그 곳에 보냈는데 라합은 그들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고 두 정탐꾼을 여리고 왕 몰래 숨겼습니다. 그 일은 목숨을 내건 일이었습니다. 여리고왕의 입장에서 볼 때 라합은 적군의 정탐꾼을 숨겨 적을 이롭게 하고 여리고 성을 망케한 자니 그 일이 탈로나면 사형에 처해질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건 헌신의 행위를 한 것입니다. 신약 본문 약2:25에서도 이러한 라합에 대해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본문 약2:17-18 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했습니다. 여기의 ‘보이라’는 원어의 의미는 ‘눈앞에 드러내 보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눈앞에 나타나는 모습을 통해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야고보는 자신도 믿음의 모습을 보이겠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구체적인 행함을 통해 증명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화가 스턴벅이 한 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절반쯤 그린 후 한 번은 거리에 나가 다니다가 어떤 여자를 만나는 순간 그 여자를 모델로 그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에게 허락을 받고 자기 방에 데리고 와서 그리기 시작했는데 잠시 후 이 여자가 "저 사람은 저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보니 필경 죄를 많이 지은 모양이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화가는 깜짝 놀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분은 죄가 없으신데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못 박힌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여자가 듣더니 "정말 그렇다면 그 분이 당신의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스턴벅은 할 말을 잃고 넋을 잃었습니다. 마음에 대단한 충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은 자신의 죄를 위하여 죽었건만 자신과는 무관한 사건인 것처럼 여기며 십자가를 무심하게 대했던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되면 안 됩니다. ‘나는 곧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울 것이 없도록 바르고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의 허무함과 인생의 욕망이 물거품과 같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세상의 화려함이 주는 유혹과 자신의 욕망을 절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다 공급해줄 줄 믿는다.’는 사람은 의식주 문제에 대한 걱정과 내일에 대한 염려가 없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 이것이 믿음의 법칙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작용하며, 어떻게 나타나고, 어떻게 증거 되며,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요? 신자란 그가 가진 믿음이 그의 행동을 이끄는 사람이며, 그 믿음이 남다른 삶의 결과를 낳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고 하면서 그 믿음이 실제 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17절에 ‘죽은 믿음’이요, 19절에 ‘귀신의 믿음’이요, 20절에 ‘헛된 믿음’으로 형식적인 가짜 믿음임을 야고보 사도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신앙의 결단과 순종의 행위로 주님께 보여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3.주님의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고 새로워지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은 라합은 두 정탐꾼에게 이스라엘의 손에 여리고 성이 망케 될 때 자기 가족을 구원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본문 수2:12-13에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고 말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은 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망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이 믿은 하나님을 믿어야만 살수 있다고 확신했기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내게 구원의 표를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수6:22-25에 보면 여호수아는 두 정탐꾼에게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했습니다. 라합의 믿음으로 그와 그 가족, 일가친척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히 11:31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라합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이방 여인이요, 기생이라는 천한 신분의 사람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존귀한 신분이 되었습니다. 마1:5에 ‘살몬은 라합을 통해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했는데,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라합은 다윗의 증조모가 된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바른 믿음을 가지면 여러 사람을 살리고, 변화 시키는 존귀한 사람이 됩니다. 극동방송에서 어떤 장로님의 간증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어릴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6.25때 피난 갔던 이야기, 추운 겨울에 빈집에 들어가서 잠을 자던 이야기 등 눈물겨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듣고 있던 진행자가 “교회와 관계되어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장로님은 6.25 당시 주님을 믿지 않았지만, 후에 장교가 되어 신앙인 아내를 만나 결혼한 후 아내의 인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후에 주님 은혜로 장로가 되었고, 동생은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가 되었으며, 여동생은 전도사가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부인이 되는 권사님을 통해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 가족, 사명자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라합처럼 믿음을 통해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고 새로워지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보여 줄 수 있는 믿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보여 줄 수 있는 믿음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고백이 있는 믿음입니다.
◎.신앙의 결단과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는 믿음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고 새로워지는 믿음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