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복음의 일군 1 (계 1:9)

nam씨 2022. 7. 30. 13:15

복음의 일군 1 (1:9)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이 시간에 복음의 일군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해하고자 합니다. 무언의 전도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전도자는 어느 날 제자들을 데리고 전도를 떠나 하루 종일 시가지를 아무 말도 없이 돌아다니다 들어왔습니다. 제자들이 여쭈었습니다. “어떻게 한마디의 말씀도 없이 전도를 하십니까?” 그러자 그는 “다음 주일에 한 번 결과를 지켜보자.”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교회에 와 보니 많은 새 신자들이 예배당에 모여들었고, 예수 믿을 사람은 손을 들라 하자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고 결신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목사는 내려가서 그들에게 어떻게 예수 믿을 결심을 했느냐고 물으니 저는 저 전도하신 선생님의 경건한 모습에 감화를 받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오늘 예배당에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전도자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얼굴만 비쳐도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는 최고의 전도자의 구비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한 위대한 전도자의 자기소개가 나타납니다. 바로 요한계시록을 받은 사도 요한입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당시 유배지만 밧모 섬은 들어가면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서 나오는 악명 높았던 섬이었습니다. 섬을 지키는 군인들이 포학하여 무법천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요한이 노구의 몸을 이끌고 밧모 섬 채석장에서 16개월 동안 중노동을 하는 사이에 그 흉악한 섬은 요한을 통해서 간수들과 죄수들이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여 평화의 섬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는 최고의 전도자였던 것입니다.


그럼, 복음의 일군들이 갖출 구비조건은 무엇일까요?


1. 전도대상과 사랑의 동질성을 갖는 것입니다.


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여기 형제라 했습니다. 우리 이런 말씀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맙시다. 성경은 어느 것 하나라도 영감 없이 쓰여진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냥 형제가 아니고 너희 형제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니까 제자라고 해도 잘못 아닙니다. 혹은 사도니까 사도라고 소개해도 잘못 아닙니다. 그리고 나이 많은 장로니까 장로 요한이라 해도 잘못 아닙니다. 요한은 스승도 되고 어른도 되는 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기를 낮추어 너희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너희 형제란 말씀을 받을 대상과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나도 너희와 똑 같은 형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육신을 입혀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속죄의 어린양이 되시기 위해서지만 전도적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낮아지심으로 인간과 교감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형제라는 말에는 무한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17:17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물이 아니라 피를 나눈 사람이 바로 형제입니다. 요일3: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한 것처럼 형제는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는지, 조금 사랑하는지 많이 사랑하는지 다 압니다. 요한은 사랑의 은사가 가득한 사람 아닙니까? 천사가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대상을 이해하고 그들과 울고 웃는 사랑의 동질성이 없으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을 것입니다.


유명한 '성 다미앤'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요. 벨기에 선교사 다미엔이 하와이 몰로카이에 가서 나환자들을 상대로 해서 전도할 때 잘 먹혀 들어가지가 않았습니다. 너무 깨끗하고 건강한 모습을 가지고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목이 터져라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해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왜 우리들이 이럴까요하며 콧방귀를 뀌고 듣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항상 기뻐하세요. 쉬지 말고 기도하세요. 범사에 감사하세요.” 그렇게 외치면 사람들은 당신이 우리처럼 썩어 문드러진 사람이 아니까 그런 소리를 한다. 정말 우리처럼 병들어 터지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보지 못하고 비참한 운명 속에 있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나 가서 잘하시오.” 하고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마음의 상처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미엔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저 사람들처럼 문둥병을 주십시오.” 그리고는 피하는 그 사람들의 손을 붙잡고 함께 먹고 마시고 살을 비비고 함께 살면서 자신도 문둥병자가 되어서 그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어서 고름을 짜면서 전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눈물을 흘리며 당신은 하나님의 종입니다.”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간혹 그런 불편한 진실이 있다고 합니다. 새로 목사가 부임하면 당신이 정말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우리와 다른 이방인인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은근히 떠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합격하지 않으면 결코 자기들의 마음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 땅에서는 이방인처럼 살면서 전도했고, 유대인에게 가서는 유대인처럼 살면서 전도했습니다. 이 동질성이 중요합니다. 이 동질성은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고전13: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는 말씀처럼 복음 전도는 그 복음의 대상과 동질성을 가지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박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도자로서 고결한 언어와 품행을 갖추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영적 권위가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너희 형제라고 소개했던 요한의 말 속에 이런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2. 전도자는 복음을 알고 복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9절 중반 절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원문에는 앞의 형제라는 말과 동참하는 자가 한 관사로 묶여 있어서 그 연관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즉 요한이 성도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요한은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복음을 정확히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안겨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과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 받은 유일한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일1: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예수의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은 제자로 알려 있는 요한이지만 산 순교자로서 누구보다 온갖 고난을 한 몸에 받은 사도입니다.


그러니까 환난의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벧전1:7-9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한 대로 연단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즉 참 믿음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나라에 동참하는 자였습니다. “나라바실레이아즉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천국의 체험자라는 말입니다. 그가 천국의 체험자인 것은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 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회개한 성결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 하신 대로 은혜로 말미암는 성화를 강조하는 성결의 복음이요, 또 성령 안에서 천국을 체험하며 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이 천국체험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는데 진실로 회개하여 성결을 체험한 자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실 이 부분이 우리의 약점입니다. 성결의 복음을 전하지만 자신은 얼마나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지, 또 하나님 나라를 말하지만 마음속에 얼마나 하나님 나라로 충만한지,,, 그러나 진실로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전도자처럼 지나가기만 해도 전도가 되고 요한처럼 그 어떤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 더불어 역사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음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인내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까지 희생하는 깊은 사랑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한 자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딤후2:11)기 때문입니다.


3. 전도자는 복음전도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9절 하반 절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밧모 섬은 요한이 죄수로서 보내졌던 유배지입니다. 밧모 섬은 요한이 목회하던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약 90km의 지점, 에게해의 스포라데스 군도의 한 섬으로 오늘날에는 팔모사로 불리는 길이 17km, 너비 10km, 중간 부분은 너비가 불과 1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섬입니다. 어느 한 곳 나무 한그루 발견하기 어려운 악산으로 이루어진 섬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이곳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다가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미움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요한에게 독약을 먹였지만 죽지 않았고, 기름 가마에도 던졌지만 그 펄펄 끓는 기름 가마에서 튀김이 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 밧모 섬 역시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서 나올 만큼 험한 곳이었습니다. 요한은 노구의 몸을 이끌고 밧모 섬 채석장에서 16개월 동안 중노동을 하며 핍박을 받았지만 선한싸움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포악한 간수와 죄수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복음 전도에 자기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행20:23-24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정말 전도자는 말씀에 목숨 걸어야 합니다. 성경연구에도 걸어야 하고 복음전파에도 목숨 걸어야 합니다. 평생에 메시지가 나쁘다는 말은 듣지 않아야 합니다. 은혜가 없다는 말은 듣지 않아야 합니다. 행실에 있어서도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실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보일 때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 구주시오 참된 전도자의 본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사람과 동질이 되셔서 죄인에게 다가오셔서 구원의 모델이 되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시고 죄인을 위해 목숨 바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 복음의 일군으로서 온전한 모습을 갖추어 이 험악한 세상을 사도 요한처럼 변화시키는 귀한 전도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