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야고보서

산 믿음의 세 가지 특징 약2:14-26

nam씨 2022. 5. 21. 14:41

산 믿음의 세 가지 특징 약2:14-26

 

믿음을 따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피난생활이 시작된 이들에게 무엇보다 믿음의 열매가 필요했습니다. 지금 장성한 믿음을 모두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행함이 없다면 저들에게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입으로는 믿음을 얘기하지만 죽음믿음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25%가 신자인 나라에서 예수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무언가 예수 믿는 표를 내지 않고 그냥 지내려고 합니다. 죽은 시체가 무가치한 것 같이 믿음이 하등 인생에게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합니다. 매주일 마다 설교는 듣지만 조금의 행동에 변화가 없고 작은 것 하나라도 바꾸려는 노력이 없다면 한번쯤 자신의 믿음을 점검 해봐야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의 믿음이 어떠한가. 야고보의 편지를 통해 점검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산 믿음은 본인과 타인에게 유익이 있어야 합니다.

1)자신에게 유익해야 합니다.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고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구원하고 구원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유익을 얻기 위하여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만일 여러분 몰래 100만 원짜리 수표를 넣어놓았습니다. 주머니 속에 100만원이 들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아도 100만원 수표는 그대로 주머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100만 원짜리 수표가 내 수중에 들어 있어서 급할 때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여행을 떠나는 것과 유익 면에서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도 하나님이 구원 할 바 자기 백성은 다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은혜로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주시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영생의 소망이 있는 성도의 생활과 영생의 소망이 불확실한 사람과 천지차이 입니다.

 

나는 확실히 구원에 대열에 바로 서있는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확실한 증거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죽음이 와도 천국에서 눈 뜰 것을 믿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평상시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어려움을 당해보면 구원이 있음을 확신한다는 것이 그렇게 힘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바로 믿음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어야 산 믿음입니다.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믿음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믿음은 자기를 구원할 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유익합니다. 구원 확신이 있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 가야합니다.

 

어느 교회에 처녀가 20살이 되어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 마음에 구원 확신, 영생이 늘 넘치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어느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어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암 말기 진단이 나왔습니다. 이 처녀가 실망했을까요? 아닙니다. 더욱 교회에 봉사하고 철야기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몸도 불편한데 쉬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때에 이 처녀가 하는 말이 당신들은 앞으로 남은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나는 이제 주를 위해 봉사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가 내게는 귀중하고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사형 언도가 선언된 사형수의 옥중 생활 중에 영생의 확신이 생기니까 하루하루를 귀중히 여기며 찬송하던 것을 보았습니다.

 

2)산 믿음은 다른 형제자매에게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15절과 16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실질적인 이익이 되지 않는데 말만 무성하다면 무슨 이익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다 같이 피난살이에 어렵습니다. 말로만 감사하다 해보십시오. 얼마나 가증스럽운 일이 되겠습니까? 200년 전에 청교도들도 마찬가지지요. 저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말로만 감사하지 않았고 실제 어려움 속에서 감사하고 서로 위로 한가운데 권면하고 어려움을 같이했기에 그들이 토인들에게서 얻은 보잘것없는 것을 얻고도 감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들이 처음 영국을 떠나려고 몸을 실은 배는 "스피드엘"호라는 배였습니다.102명이 옜는데 가족은 약 20-30옜겠지요. 하나님의 인도대로 신앙을 찾아가는 피난인데 "스피드엘"호라는 배가 고장을 일으켜 고생도 했습니다. 그렇니까 도중에 "메이플라워"호를 옮겨 타고 미 대륙에 도착하기까지 배에서 52명이 장례를 치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서 기뻐하고 감사하였던 것은 그들 서로 간의 실질적인 위로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 이였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그리고 사회라고 공동체를 무시하고는 바로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하지 아니하고는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교회주의가 얼핏 보기는 잘 믿는 것 같고 깨끗한 것 같지만 죄인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세상보다 교회가 더 악하고 더러울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을 불러 놓은 곳이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 도중에 죄인라고 마음 놓고 부를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무교회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대개 교회가 더럽기 때문에 혼자 신앙을 하나님과 내 사이를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남을 돌아보지 않고자하는 잘못된 태도에서 발상된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세상 모든 사람을 표현하지만 여기서는 사선을 넘어 신앙을 찾아온 형제입니다. 만일 우리 교회 안에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만일 있다고 손칩시다. 그들을 어려운 것을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7절을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성령의 감동이 와서 마음에서 말까지는 나왔지만 실행하지 못해서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 된 것은 없습니까? 야고보는 우리에게 편지하기를 이런 믿음은 죽은 것이다 고 단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2.증명할 수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믿음은 살았다면 나타내 보여야합니다. 증명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 알고 하나님 알면 됐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살아 있는 믿음은 증명하는데 아무런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1)지식으로만 믿음이 증거 되지 않습니다. 18-19: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허무맹랑한 지식적인 믿음의 허무 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지식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실행을 나누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일주일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솔직하게 나눔으로 속이 시원해지는 것입니다.

 

이단들, 특히 {여호와증인}들 말로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도도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사랑을 세상에 얼마나 봉사하고 수고의 손길을 심고 있습니까? 아니 나는 예수의 사랑은 말하고 잘 알고 있지만 그 사랑의 수고 앞에서 얼마나 아낌없이 수고를 베풀고 있습니까?

 

2)실행이 없는 믿음은 말뿐인 믿음헛것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믿음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이 이것을 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브라함에게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삭을 제단에 받치는 실행이 뒤따르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의 믿음이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고 아브라함을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어서 오늘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얘기 할 수도 없을 뿐더러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 가지 입니다. 말뿐인 믿음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만과는 다릅니다. 외식과 과시욕도 아닙니다. 믿음이 살았다면 자연스럽게 행동이 더러 난다는 것입니다.

 

3.온전한 믿음은 행함이 수반되어야합니다.

이것을 살펴보면 믿음 혼자만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온전한 100%의 구원,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야고보 선생은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함을 받는 온전한 믿음은 산 믿음과 행함입니다.

 

22절에서 24절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그러나 주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의 생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고뇌가 아브라함에게 없었습니다. 모라아산을 올라 갈 때에 아브라함은 그냥 독자를 받친다는 무거운 발걸음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도로 주신다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걸음이 믿음의 발걸음이었다고 성경은 성경을 해석합니다.

11:17-19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100세 아이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기적이요 죽이시지만 도로 살리실 것을 믿는 행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하는 사건입니다. 아기예수가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도 인간의 좁은 한계 안에서는 생각 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발을 길밖에 없습니다. 아기 예수가 죄인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도 기적입니다. 더 큰 기적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부활 승천케 하신 것도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 얻은 형제는 자연스럽게 행함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을 믿음으로 구원의 조건입니다.

이 믿음의 뿌리를 내린 사람은 반드시 열매를 열게 마련입니다.

 

2) 예로 기생 라합을 들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적군의 스파이를 숨겨준 어떻게 보면 반역자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고 온 식구들을 생명을 구한 것은 가치관이 달랐습니다. 판단되었으면 이것이 살길이다 알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옳은 판단을 머뭇거리지 아니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본문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다. 라는 말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산 믿음은 옳은 판단과 행함을 낳게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옳은 판단을 잉태하게 되고 산월이 되면 자연히 행함이라는 출산함으로 그전에 믿음으로 잉태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신을 보면 행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눔을 통하여 행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과 믿음의 주제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26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정상적인 나무라면 자라게 되고 정상적으로 나무가 자랐다면 열매를 맺습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