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임재의 은총 시22:3-5,
주님 임재의 은총 시22:3-5,
이기선 목사는 일본 재국 시대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고생했습니다. 한번은 경찰국장이 자기 방으로 불렀습니다. 경찰국장이 일어나서 이 목사를 맞았습니다. “이 목사님, 연세도 많으신 분을 이렇게 고생을 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좋은 의자에 앉혀드리고 차도 한 잔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경찰국장이 편지 하나를 내 놓았습니다. 그 편지는 미국서 공부하여 공학박사가 된 큰 아들 정근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목사는 편지를 뜯어보고 아무 표정도 없이 다시 책상 위에 척 놓았습니다. 내용은 다른 목사들은 다 신사참배를 하고 편안히 사는데 아버님만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고생하실 것이 무엇이냐면서 겉으로는 신사참배를 하고 속마음으로만 안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아드님 편지를 받으니 생각이 어떠하십니까?” 경찰국장이 물었습니다. 이 목사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지식으로 말하면 나는 지식이 많지 않지만 아들은 세계가 알아주는 공학박사이니 지식적으로 보면 내 선생 격 입니다. 그러므로 사제의 관계로만 본다면 그 청을 들어주는 것이 옳을 것이고, 또 혈육의 관계인 부자간의 입장에서만 생각한대도 그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말하면 이 사람은 평신도이고 나는 이 사람을 지도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에 관한 문제이므로 평교인인 아들이 아버지가 고생하는 것이 하도 딱해 보여서 철없이 한 말이니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경찰국장은 “이 목사님은 과연 위대한 분이구나 목사가 되려면 저런 목사가 되어야 해!” 하며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일본 경찰국장은 그 분을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비록 믿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아도 늘 하나님의 편에 서서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믿음 때문에 고난을 받을지언정 일신의 평안을 위하여 타협하지 않고 늘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삽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 앞에 인정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 임재의 은총”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임재가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주님의 임재가 있어야 하고, 찬송을 해도 그 찬송 중에 주님이 임재 하셔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에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아무리 준비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가인의 예배처럼 실패한 예배입니다.
예배에 예배를 받으시는 주인공인 주님의 임재가 있어야 예배다운 예배가 됩니다.
1.주님의 임재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주님의 임재는 주님께서 개인이나 단체나 어느 장소나 공간에 임하셔서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3절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했습니다. 여기 ‘계신다.’는 말이 주님이 임재 하신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야샤브’라는 말인데 ‘앉다, 머무르다, 살다, 거주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주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말씀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심으로 직접 임재를 보여 주셨고, 창28장에 야곱은 꿈 가운데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출3장에 보면 모세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역대하 5:14에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했습니다. 신약 행10:44-48 고넬료는 기도하다가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주님 분부를 따라 같이 모여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 듣다가 모인 무리 가운데 성령이 임하는 주님 임재의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잠간 임재를 체험하는 정도가 아니라 임하셔서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임재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별명 가운데 하나가 임마누엘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 말라 하시며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창5:21 이하에 보면 에녹은 65세에 무드셀라를 낳고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림을 받는 특별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주님을 만난 후 주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갈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했습니다. 성도가 늘 성령 충만하여 항상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 주님 임재 가운데 사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주님 임재 가운데 살면 고난이 와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구약 본문은 고난의 주님에 대한 예언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제자 중 하나에게 팔리고, 제자들이 졸며 자고 도망칠 때, 군병들에 의해 채찍에 맞고, 조롱을 당하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과 함께 계셨고, 함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하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2.주님의 임재의 은혜는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주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 하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며, 주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되게 합니다. 고넬료에 집에 모인 무리 가운데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도 사랑하시며, 그들 역시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체험하고, 후에 예루살렘 지도자회의에서 아직도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자들 앞에서 자신의 체험을 간증함으로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이방 세계에 복음 전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열어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도는 내 안에, 내 가정에, 우리 교회에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자리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무엘 시대에 사무엘은 자신의 고향인 라마 나욧에서 신학교를 운영했습니다. 라마 나욧은 교회가 어떠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라마 나욧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했습니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누가 되었든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체험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삼상 19장에 보면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피해서 라마 나욧으로 가서 사무엘을 만나고 그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 소식을 사울이 듣고 다윗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군인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라마 나욧에 도착한 군인들이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은 다윗을 잡지도 않고 사울에게 돌아가지도 않고 그곳에서 예언을 하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이 다시 다른 군인들을 보내지만 그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울이 또 세 번째 군인들을 보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사울은 자신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라마 나욧으로 갔는데,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재 하니 그가 왕복을 벗고 벗은 몸으로 넘어져 하루 반을 넘어진 상태에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주님의 분부를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했던 무리들에게 임한 성령 충만한 주님의 임재는 초대 교회를 탄생시켰고, 복음이 온 세계로 흘러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성도가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면 죄를 회개하고 버리게 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기쁨으로 봉사 하는 자가 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하는 일은 천한 일이 없습니다. 청소를 하고, 주방에서 봉사를 하고, 차량 봉사를 하고, 안내하는 것은 천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은 모두가 거룩한 일입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일이요, 그런 마음에 주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됩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 교회 가운데 강하게 임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든든히 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입니다.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암 부스는 “장차 종교는 있으나 성령이 없고, 교회는 있으나 예수가 없는 시대가 오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머리 되시는 주님께 순종하고 머리 되시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해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나타날 줄 믿습니다.
3.주님의 임재를 위한 신실한 신앙 가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행10:44-48 고넬료는 신실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특별한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 즉 로마 군대의 백부장 장교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중대장 정도 되는 계급입니다. 그는 유대총독으로 부임하는 말룰루스와 함께 유대 가이사랴 지역으로 파병을 나와 그 지역을 관할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살면서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권세로 식민지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여하거나 아니면 지주들에게 압박을 해서 재물을 상납하도록 할 수도 있었고, 세리나 장사치들이 찾아와 뇌물을 주면서 자기들의 부정을 눈감아 달라고 하는 뇌물을 받을 수도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의로운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식민지의 사람들 중에서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임재 의식을 가지고 경건한 신앙을 가졌기에 백성들을 사랑하는 일에 힘쓴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시간을 정해 놓고 매일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기도는 주님께 무엇을 달라고 요청하기보다 주님 안에서 선한 뜻을 묻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구제하는 방법들을 위해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베드로가 그의 집에 왔을 때 그 앞에 엎드려 영접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나무랄 데 없는 신실한 신앙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의 경건생활 그 자체가 가식이 아닌 진심이 묻어나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사자를 보내어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라고 말하며 베드로를 보내어 사모하여 모인 무리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역시 매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재 의식 가운데 살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그는 사람은 없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를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하며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은 “30센티 앞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처럼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감리교를 세운 웨슬리는 “집에서 늘 내 옆에 의자를 둔다. 왜냐하면 내 옆에 주님이 계시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살았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 남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성도가 됩시다. 시 143:6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를 얼마나 사모했는지 이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마른 땅에 물을 뿌리면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모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 간구했습니다. 좋은 성도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찾으며 주님의 임재 속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을 본받는 성도가 됩시다. 이제 정리합니다.
♡.주님의 임재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주님의 임재의 은혜는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주님의 임재를 위한 신실한 신앙 가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늘 성령 충만하여 주님의 임재가운데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