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가 자랑인 사람 사53:4-6
십자가가 자랑인 사람 사53:4-6, 갈6:11-18
세기적 음악가 헨델(G. F. Handel)이 메시야를 작곡할 때, 본문 이사야서 53장 부분을 작곡하다가 팬을 멈추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 식사시간을 알려오는 하인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고 있소” 이렇게 성령의 감동과 영감으로 작곡된 헨델의 메시야는 전 세계의 영혼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여 나를 살려주시기 위해 참혹한 십자가 위에서 달려 돌아가셨음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온몸을 찢으시고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신약 본문 갈6:14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순절 주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십자가가 자랑인 사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십자가가 자랑인 사람은,
1.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나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구약 본문 사53:5-6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말씀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4절에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때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로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 된 것은 그만한 죄가 있었거나,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죽음이라고 여겨 나와 무관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처형된 십자가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받을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로마서3:10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아무리 완벽한 삶을 이루어 가장 모범적인 사람이라 해도 윤리, 도덕 양심적으로 죄인일 뿐 아니라, 그가 누구든 나를 만드시고 지으신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 자체가 씻을 수 없는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를 낳아 길러주신 육신의 부모를 외면하고 모른 체 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자기 존재의 출발조차 부인하는 불효자인 것입니다.
이런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과 죄악의 모든 형벌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대가로 받을 형벌은 죽음과 심판과 형벌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심판과 형벌을 십자가의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받을 심판과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아주셨으면 이제 믿는 우리에게 적용 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청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받을 형벌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엡2:14-16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죄의 담을 허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대가를 다 지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에 맨 마지막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헬라 원어로는 '테텔레스타이'라고 하는데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헬라의 도시를 발굴해 냈을 때 옛날의 세금 영수증을 발견해냈는데 거기에 바로 '테텔레스타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금을 지불했다, 지불이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희생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신 고로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부터 죄 값을 다 받으시고 하나님의 책에서, 하나님의 장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지워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빽빽한 구름이 사라진 것 같이,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를 그렇게 멀리 옮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진 십자가를 통해 나의 죄를 대속하셨음을 믿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지나야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선행을 많이 행해서도, 공적을 많이 세워서도, 신앙인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해서, 교회를 오래 다니고 헌금을 많이 해서, 수행과 고행을 많이 해서 얻어지는 것 아니고, 반듯이 십자가 보혈을 지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속죄 하는 십자가 보혈을 믿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 죄의 문제를 해결 하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 받을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보혈을 지나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 의롭다함을 얻은 자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 창시자가, 성자가, 의인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말한 자가 없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죄의 문제를 위해 행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만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하실 수 있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하실 수 있으며, 사도들이 ‘예수님 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이 없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18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가서 1:22-24에서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대해서는 절대로 다른 어떤 교훈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생명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주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는 과거에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그는 본문 갈6:14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원의 능력이 있는 바로 십자가 위에 우리 기독교는 서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을 지나 속죄가 있고,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구원 보다 더 중요한 것도, 시급한 것도 없습니다. 그 구원이 예수님의 속죄에 있습니다. 미국의 백인들이 서부를 개척할 당시 인디언들을 마을에서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은 넓은 평원에 옥수수 밭을 만들어 놓고, 한복판에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사방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이 점점 타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한 두 시간만 지나면 불길이 마을까지 번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불길이 거세기 때문에 뚫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노인이 외쳤습니다. “마을에서 백 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러라! 운동장 크기만 하게 불을 질러라!” 인디언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또 불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노인이 하는 말이기에 순종해서 불을 질렀습니다. 불탄 자리가 운동장 크기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노인은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제는 모두 그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라!” 노인은 한 번 불에 탄 자리는 두 번 다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을사람 모두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이미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내 안에 죄는 이미 불타 없어진 것과 같습니다. 이 주님 안에 거하면 저주의 지옥 불에서도, 어떤 정죄도, 어떤 형벌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지나 구원받은 백성으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3.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온전한 치유와 평안을 갖게 됨을 믿는 사람입니다.
구약 본문 사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했습니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아픔을 주님께 가지고 나와 십자가의 능력으로 치료 받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수시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보혈의 능력을 믿고 맡길 때 고쳐 주시고, 싸매 주시고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치유된 심령에 평안함을 주십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했는데, 여기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로 근본적인 평화를 의미합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너무나 비싸고 귀하기에 거저 주시는 중에 하나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 불안과 염려와 근심 대신 강 같은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신약 본문 갈6:16에도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회를 담임하는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J. C. Ortiz)목사는 심한 편두통 때문에 강단에서 설교를 하다가 기절해서 병원으로 실려 가곤 했습니다. 유명한 의사도 찾아가 보고 좋은 약도 먹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본문을 읽던 중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받았도다.”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이었습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 때문이 아니고 예수의 피 때문에 네가 네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히 너를 알고 있는 내가 용서했다. 그런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너는 누구냐? 나보다 더 거룩한 자냐?” 자신의 불완전성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던 그는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자신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놀라운 평안이 깃들게 되었습니다. 3주일 후, 편두통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나음을 받은 후안 카를로스 목사는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편두통으로 고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불행과 고통과 아픔이 사라지게 됨을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눅 4:18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기로 보장된 은혜요, 축복들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통해 온전한 치유와 참 평안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사순절 주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십자가가 자랑인 사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십자가가 자랑인 사람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나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지나야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온전한 치유와 평안을 갖게 됨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