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재림을 사모하라 베드로후서 3:8-13
예수 재림을 사모하라 베드로후서 3:8-13
베드로후서 기자는 두 가지 근거로 재림신앙에 대한 조롱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5절) 세상 만물은 그 토대가 아무리 확실해보여도 하나님 말씀에 종속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보다 말씀이 우위에 있다면 만물의 지속성으로 다시 오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은 이미 물로 멸망한 적이 있으며, 앞으로 불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6,7절) 세상이 겉으로 보면 변함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현대 지질학에서 볼 때도 옳은 이야기입니다. 지구에는 빙하기가 반복되었습니다. 지금도 판 운동이 계속됩니다. 아주 느린 움직임이지만 지구의 판 운동은 바다를 산으로 만들고, 산을 바다로 낮추기도 합니다. 베드로후서 기자가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세상이 영원불변하지 않으며, 그 토대도 절대적인 게 아니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세상이 늘 그대로 있다는 논리로 예수 재림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후서 기자의 생각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하기 곤란하다면 그의 생각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설명을 좀더 들어보십시오. 그는 독선적인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그의 세계 인식은 정확하게 그의 설명은 논리적이며, 또 친절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재림 지연을 조롱하는 사람들과의 논쟁과 연관해서 재림 지연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세 가지의 전이해가 필요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은 다릅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사람은 시간을 연대기적으로만 인식합니다. 어제 다음에 오늘이 오고, 오늘 다음에 내일이 옵니다. 2011년은 1011년보다 뒤에 있습니다. 이건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우리 인간의 시간 경험이 그렇습니다. 천 년은 일 년의 천배입니다. 일 년은 하루의 365배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시간 계산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 경험을 뛰어넘습니다. 천 년이 하루처럼 순간입니다. 하루도 천 년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좀더 냉정하게 직관하면 베드로후서 기자의 진술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은 시간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시간은 빛의 속도 안에서만 절대적입니다. 빛의 속도를 넘어서 움직이는 세상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흐릅니다. 심지어 거꾸로도 흐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까지 말합니다. 지금 본문은 시간 개념을 통해서 100년 동안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었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경솔한 것인가를 말합니다.
둘째, 주님은 모두의 구원을 기다리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9절) 베드로후서 기자의 영성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생명완성의 순간을 연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성을 이해한다면 예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을 견디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셋째, 주의 날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옵니다. 본문 10절은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온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시간표 안에서 바라보는 것에 길들여졌습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일을 못 견뎌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시간표대로 흘러가야만 마음이 편합니다. 그걸 지키느라고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시간표를 잘 지키고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의 날은 도둑처럼 온다는 말씀을 잘 생각하십시오. 생명 사건은 우리의 시간표와 다르게,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이 우리의 예상대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보다 죄인과 세리가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깝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온다는 말은 궁극적인 생명 사건 앞에서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가리킵니다. 이게 옳다면 주의 재림이 지체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왈가왈부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야 합니까? 본문이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 12) 하나님의 날은 물론 재림을 가리킵니다. 그 날을 사모하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세상에서의 삶 자체를 부정하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매일 기도하고, 말씀 읽고, 전도하고, 예배드리는 일에만 전념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바라보고 사모한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형식으로 가능한 게 아닙니다. 삶 전체에 관계된 일입니다. 영혼의 차원입니다. 예수 재림으로 이뤄질 생명완성에, 세계완성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 세상을 가리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온 영혼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이 아직도 멀게 느껴지시나요?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신가요?
절대적인 세계는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듯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이비입니다. 간접적으로만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의’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 의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의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의 불의와 대립되는 세계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가 불가능합니다. 대한민국의 법은 의로워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한미 FTA 협정문이 1천 쪽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정의로울까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오늘 현실의 교회에 의가 살아있을까요? 사람이 행하는 일에는 의가 불가능합니다. 의에 대한 인식이 없으며, 그걸 실천할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본질적으로 그런 속성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기자는 로마가 추구하는 제국주의적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가 예수 재림에서 이뤄진다고 보았습니다.
절대적인 의는 무엇인가요? 예수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생명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재림을 사모하라는 말씀은 부활의 실체가 드러나는 때에 영혼을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견인해가는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생명형식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냥 여기서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좀 착하게 경건하게 개혁적으로 살면 되지 재림은 무슨 재림 타령이냐,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후서 공동체가 처한 신앙적 위기는 오늘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교회 밖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도 재림 신앙은 묵살되고 있습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을 맞아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완성하실지 기대하시고, 그 때를 사모하십시오.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생명완성인 예수 재림이 가까이 이르고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