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눅 1:26-38절
대강절 설교 -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눅 1:26-38절
오늘 말씀은 마리아에게 임한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잉태된 것을 가장 먼저 알게 되듯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구세주 탄생의 소식이 성모로 택함 받은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습니다.
1. 은혜받은 마리아 (26-30절)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수태한 지 여섯째 달이 되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 동네로 찾아왔습니다. 나사렛은 삼면이 산으로 덮여 있어서 공기가 맑고, 오염되지 않은 시냇물이 흐르는 한적한 시골이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세상에 때묻지 않고 순박하고 인정이 많았습니다. 바로 이곳에 평범한 시골 처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가난한 목수지만 뼈대있는 다윗 가문의 요셉과 정혼을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의 결혼 풍습은 정혼을 하게 되면 법적으로는 부부이지만 혼례식을 올리기까지 1년 동안 순결을 지켰습니다.
성경은「마리아가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을 했다는 것과 순결한 처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성취 면에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행 13:22,23절) 또한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사 7:14절)
그러므로 마리아는 법적으로는 요셉의 아내요, 육체적으로는 몸과 마음이 깨끗한 처녀로서 메시아를 낳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만으로 마리아가 성모로 택함 받은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몸과 마음이 세속에 물들지 않은「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또한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순종적인 여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가나 혼인 잔치가 나옵니다. 한참 잔치가 무르익고 흥이 돋을 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들내지 아니하고「주인 의식」을 가지고 조용히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또「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이처럼 마리아는 조용하게 역사 환경을 만드는 내면성있는 여인이요, 기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마리아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준비된 그릇이었습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마리아는 정혼한 처녀로서 꿈 같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믿음이 있고 듬직한 요셉을 생각할 때마다 뛰는 가슴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요셉과 함께 하는 그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때가 여인에게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때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마리아는 현재 요셉의 은혜로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은혜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천사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그러면 마리아가 받은 은혜는 무엇입니까?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일방적인 사랑, 은총, 축복, 선물 등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았거나,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시험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공부한데서 문제가 나왔을 때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적은 전세금으로 좋은 집을 얻었을 때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는「값싼 은혜」입니다. 값싼 은혜는 항상 달콤하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하지만 마음에 깊이 새겨지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말하는「참된 은혜」는 '구원 받은 은혜'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은혜'입니다.
*「구원 받은 은혜」(축복송 -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Amazing Grace'를 작곡한 존 뉴톤은 노예 무역상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노예를 싣고 항해를 하다가 폭풍을 만나서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처음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물에서 구원받았을 때, 그는 목숨을 건진 것보다 더 큰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인으로서 영원히 불과 유황에 타는 못에 참예할 자를 구원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영영 잊을 수 없어서 'Amazing Grace'를 작곡하였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죄로 인해 영원히 심판받아 죽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크고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은혜」(답가 - 그 사랑 전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구원의 은혜와 더불어 하나님의 크신 은혜는 하나님 역사에 쓰임 받는 은혜입니다. 아무 자격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쓰임 받는다는 것은 영광 중에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열왕기서나 역대기서를 보면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중에는 제사장뿐만 아니라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 곳간을 맡은 관리하는 사람들, 성전 문을 지키는 문지기까지 그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볼 때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임을 말해줍니다.
교회를 청소하고, 예배를 돕고,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헌금을 걷는 것은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드리는 모든 수고를 하늘나라의 생명 책에 다 기록하고 계십니다.
마리아는 성모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하나님을 모시는 천사 가브리엘도 부러운듯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임한 것입니다.
만일 마리아가 이런 은혜를 받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요?
그녀는 요셉과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꿈꾸고, 요셉을 위한 평범한 주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명이 없는 주부의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 자녀들과 씨름하고, 저녁마다 TV 연속극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쭈글쭈글 해지는 피부와 흘러나오는 아랫배를 막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또 갱년기가 지나면서 점차 무관심해지는 요셉을 보면서 실망하며 바가지를 긁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마리아는 세상 여인들처럼 그저 그런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마리아는 인류가 흠모하는 성모가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여인 중에 최고로 복 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들어 비범하게 쓰십니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별과 같은 인생을 살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75세의 무명의 아브람을 부르셔서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촌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을 살았을 때 세계를 변화시킨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만 짓다가 죽을 우리 인생들도 불러주셨습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서 천사도 흠모하는 귀한 일꾼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 양떼들의 생명을 맡기시고, 모든 종족과 나라들을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 임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이처럼 은혜만 생각하면 항상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은혜에는 감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희생과 아픔」이 있습니다. 은혜가 크면 클수록 그에 따른 희생도 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요, 열국의 아비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자기 중심적이고 아기자기한 잔재미를 부인해야 하는 아픔과 희생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성모로서 살기 위해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옥합을 깨고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처럼 요셉과의 소박한 꿈을 깨야 했습니다. 또한 처녀로서 아기를 배었다는 갖은 오해와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중에는 자식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이는 칼이 그 마음을 찌르는 듯한 아픔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성모로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은 의미 있는 고난입니다. 예술가가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하기 위한 진통이요, 진주 조개가 살 속으로 파고든 모래 알갱이를 감싸 안고 자신의 살을 깎아서 진주를 만드는 아름다운 고난입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사람을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강건하게 하고, 새 생명을 탄생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종들은 모두가 고난의 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 등 어느 한 사람도 고난 없이 위대하게 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여러가지 인생의 고난과 훈련을 받습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애쓰고 또한 영광스러운 주님의 일꾼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제대로 쓰지 않으면서도 양들에게는 최고의 것으로 섬깁니다. 이런 수고와 헌신을 해도 양들은 은혜를 배반하고 떠나가기가 일수입니다. 이외에도 사명을 감당하고자 남모르는 아픔을 겪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에 대해 할 말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왜 이렇게 희생을 하는 것입니까? 이는 우리에게 주신 목자의 직분이 가장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은 말합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주와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드린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비천한 우리를 들어서 하나님의 일꾼 삼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 영원히 왕노릇 하실 예수님 (31-56절)
* 그러면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탄생하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첫째, 예수님은「구원자」가 되십니다.(31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천사는 수태하게 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짓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마 1:21절)
예수님은 이 땅에 죄 문제를 해결하시러 오셨습니다.
인간 사회를 살펴보면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9.11 테러를 기점으로 하여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이 더욱더 강하게 충돌하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한쪽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으로 고생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폭력과 이혼 문제가 심각하고, 청소년들은 마약과 정욕으로 깊이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행복의 동산 에덴을 잃어버리고 유리 방황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죄로 인해서 탄식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조차 내면 속에 있는 죄의 찌꺼기로 인해서 고통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을 배우고자 몸부림치지만 때로는 티클 같은 작은 문제로 인해 화를 내고 분해할 때가 있습니다.
한번 분을 내면 잔잔했던 내면은 헝클어진 머리처럼 되어서 마음이 혼란스럽고 기쁨과 평강을 잃어버리고 지옥처럼 변하게 됩니다. 또한 교만과 정욕으로 고통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시꺼먼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절)
이처럼 구원받기 전에나 구원받은 후에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칼 하임'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지 양팔 저울 한쪽에는 한 사람의 죄를 달아 놓고 다른 편에는 지구를 달아놓았는데, 저울이 사람의 죄 쪽으로 기울었다고 하였습니다.
* 이렇게 크고 심각한 인간의 죄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과거의 죄, 현재 짓고 있는 죄, 미래에 지을 모든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구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2) 둘째, 예수님은「큰 자」가 되십니다.(32절)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세례 요한도 "주 앞에서 큰 자"(눅 1:15절) 1:15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본체가 큰 자」가 되십니다. 사람은 위대한 일을 하여서 큰 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큰 자일 때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위대성은 예수님의 인격과 삶 속에서 하신 말씀과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온전히 나타났습니다.
(3) 셋째, 예수님은 우리를「영원히 다스릴 왕」이 되십니다.(32-33절)
"...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예수님은 왕으로 오시되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다윗의 위를 이어받은 왕으로 오셨습니다.(삼하 7:12,13절) 다윗의 위를 이어 받았다는 것은 왕 되신 예수님의 정통성과 통치 성격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다윗과 같이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십니다. 또한 목자가 양들을 돌보는 것처럼 다스리십니다.
세상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권력으로 다스립니다. 이로 인해 힘없고, 의롭게 살고자하는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특히 헤롯이나 네로, 연산군과 같은 폭군이 나라를 다스릴 때 얼마나 고통하였습니까?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사랑과 공의로 다스릴 때 아이들은 해맑은 모습으로 자라납니다. 그러나 부모가 권위적이고 폭력적일 때 자녀들은 피지도 못하고 쪼그라듭니다. 내면이 병들고 반발심으로 충만해 집니다. 가정 문제를 보면 대개 아버지들이 문제가 많습니다. 집 밖에서는 죄짓고 집안에서는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는 주로 밥상을 엎고 소리를 지릅니다.
통계 자료를 보니까 남편은 아내가 있어야 오래 살고, 아내는 남편이 없어야 오래 산다고 합니다. 이런 아버지로 인해 상처를 받은 많은 청소년들이 하루에 1분도 아버지와 대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느 시대나 올바른 통치자가 없어서 불행한 삶, 비뚤어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왕이시지만 높은 보좌에 앉으셔서 군림하지 않으시고, 가장 낮고 냄새나는 말구유에 오셔서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 또한 친히 본이 되셔서 우리의 갈 길을 가르쳐 주시고, 때마다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도 다스려 주십니다.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은 늘 새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정욕으로 더러워진 마음」을 들고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은 죄 사함을 주시고, 정결한 마음을 주십니다.「교만과 이기심」으로 병든 내면을 들고 나아가면 예수님은 한없는 겸손과 긍휼 한 마음을 부어주십니다.「사고를 당해 두려울 때」주님께 나아가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말할 수 없는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세상 나라는 아무리 왕이 훌륭해도 죽으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다스리시는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영원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서 죄와 죽음과 마귀의 세력을 파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기를 비우고,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다스림 받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자신은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아이를 밸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 이성을 초월한 불가능한 일도 능히 이루어집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성령님이 역사하셨고,,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도 성령님이 역사하셨고,, 인간이 구원받을 때도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새 생명이 잉태되는 곳에는 항상 성령님이 계십니다. 한 영혼이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은 처녀가 잉태하는 것만큼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믿음을 심기 위해서 엘리사벳의 예를 들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베었느니라 본래 수태치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지이다."
마리아는 즉시 대답했습니다.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결정을 내리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부모님의 의견도 들어야 하고, 요셉과 상의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 앞에 계집종으로서 자신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지이다."
이 결단은 마리아가 성모 마리아가 되도록 하는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손바닥은 서로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자 손을 내밀었을 때, 믿음으로 화합해야 은혜가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믿음으로 화합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고자 해도 베풀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화합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각과 계획과 꿈을 접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언제든지 쓰시고자 하면 자신을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기꺼이 들으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또 언제라도 순종할 수 있는 자세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순종은 우리 몸에 멍에를 씌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축복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우리가 마리아와 같이 항상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순종했지만 마음에 위로와 상담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누구를 찾아갔습니까? 엄마를 찾아가 "엄마 큰 일 났어요, 나 임신했어요." 하고 말했습니까? 아니면 요셉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이해해 달라고 하였습니까? 마리아는 신앙 선배인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을 찾아가지만 인간적인 사람은 인간적인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구합니다.
만일 마리아가 그의 어머니나 요셉을 찾아갔다면 인간적인 생각에 빠져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가장 합당한 충고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었을 때 아이가 복중에서 뛰놀았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42,43절)
엘리사벳은 성령님이 마리아에게 어떻게 역사 하는가 분별하고, 하나님 편에서 해석하고, 카운슬링을 해주었습니다. 또한 자신은 주의 선구자를 잉태하고 마리아는 주님을 잉태했다고 비교하며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딸과 같은 마리아에게 "내 주의 모친"이라고 하며 마리아의 믿음의 결단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엘리사벳의 카운슬링을 들은 후 마리아의 심령에 드리워졌던 인간적인 생각이 사라지고 성령의 밝은 빛이 비치어졌습니다.. 기쁨과 감사의 찬양이 샘물처럼 터졌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6-48절)
마리아는 비천한 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였습니다.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더 나아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탄생하신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 이시오,, 우리를 영원히 다스리시는 왕이 되십니다. 이번 성탄에 예수님을 심령 깊이 영접하고 기쁨이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마리아와 같이 언제든지 쓰임 받을 수 있는 주의 계집종, 주의 남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