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절,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디모데전서 6:14~15
대강절,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디모데전서 6:14~15
1. 대강절, 무슨 절기인가?
2.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3. 하나님의 경륜으로 본 메시아 대망신앙
4. 하나님의 경륜으로 본 대림신앙
5. 대강절,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설교 목적
대강절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가?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관점(전망대)에서 대강절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이 4주간의 기다림을 통해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대강절의 의미가 명확해질 때 성탄절의 의미도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1. 대강절, 무슨 절기인가?
이번 주일부터 대강절이 시작됩니다. 대강절은 무슨 절기일까요? 우리말 국어사전이 설명하는 대강절(待降節)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념하기 위한 성탄 전 4주간. 대림절(待臨節)이라고도 함. 영어로는 애드벤트(Advent). 6세기 그레고리오 교황(590-604) 때부터 지켜진 것으로 교회(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가 함께 하는) 전통의 고유 절기.
대강절은 대림절과 같은 말입니다. 주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므로 대강절(待降節)이며, 주님이 재림하실 것을 기다리므로 대림절 (待臨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후 40일 만에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 때 천사들이 나타나 주님은 다시 오신다고 일러주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9~11)
신약성경을 보면 교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공동체였습니다. 사도들의 편지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림신앙 또는 대강신앙은 교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에는 그 교회의 신앙에 대한 칭찬이 들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우상을 버리고 참되고 사시는 하나님께 돌아와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이 반드시 다시 돌아오실 것을 굳게 믿고 그 소망 가운데 살았습니다(살전 1:9~10).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그 교회의 신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칭찬을 담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에 깊은 확신을 가졌으며 모든 은총의 선물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고전1:6~7,공동번역성경)
우리 주님이 다시 나타나실 것을 기다리는 신앙은 교회가 처음부터 가장 중요하게 간직한 소망이었습니다. 대림신앙은 교회가 모든 일을 하는 이유와 목적이었습니다. 즉,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므로 그 날에 칭찬을 들을 수 있도록 바른 자세와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교회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런 소망이 잘 담겨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딤전6:14~15, 개역개정)
사도 바울의 글을 보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주님이 우리의 모든 수고에 대하여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림신앙(待臨信仰)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유언으로 남겨준 말씀을 보겠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6~8)
이처럼 교회는 처음부터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은 주님이 나타나신다는 말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나타나심(헬. 에피파네이아 epiphaneia, appearing, 딤전 6:14, 딤후 4:8)을 말할 때 ‘감추인 것을 드러내심’(헬. 아포칼립시스 apoxalypsis, revelation, 고전 1:7)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강림하심’(헬. 파루시아 parousia, coming, 살전 2:19, 3:13, 5:23)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야고보도 교회에 대한 여러 권면의 말씀을 하면서 주님의 강림하심(parousia)을 재차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5:7~8)
위와 같이 여러 성경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살펴본 것은,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늘로서 강림(parousia)하시는 것이며 다시 오시는 것(Advent, comong)이며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epiphaneia, apokalypsis)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림신앙 또는 대강신앙이 신자의 생활에서 매우 중요하기에 교회는 약 1,400년 전부터 대강절(또는 대림절)을 절기로 지켜왔습니다. 대강절은 교회가 처음부터 가장 중요하게 간직한 신앙을 기억하고 확인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2.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우리는 성탄절이 다가오면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를 다시 기억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생후 8일 만에 성전으로 데려갔습니다. 그것은 유대인 사내아이에게 할례를 행하기 위함입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이후로 지켜온 풍습입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 성전에 아기를 안고 들어갔을 때, 두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은 시므온이라는 노인입니다.
누가는 시므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눅2:25~26)
시므온은 나이가 많은 노인입니다. 그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늙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시므온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가 오실 것인데 너는 그분의 오심을 볼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시므온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를 뵈었을 때 그는 크게 위로를 받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공생애 사역을 하신 후에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을 가리켜 교회는 초림(初臨)이라고 불렀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재림(再臨)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의 초림 이전에 살던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 모두 기다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기다림과 우리의 기다림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신앙을 메시아 대망신앙(待望信仰)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을 대림신앙(待臨信仰) 또는 재림신앙 (再臨信仰)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2천 년 전에 이미 오셨고, 우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장차 오실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시간은 약 2천년이며, 예수 그리스도부터 오늘 우리의 시대까지도 약 2천년입니다. 이렇게 기나긴 세월을 좀 멀찍이 떨어져서 살펴본다면 대림신앙이 무엇인지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 서울에는 남산타워가 있는데, 거기 전망대에 올라가서 서울을 둘러보면 서울 전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동네가 어디쯤인지 찾아보고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절기도 멀리 떨어져서 살펴볼 때 그 전체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볼 수 있기 위하여 올라가야 할 전망대는 무엇일까요? 그 전망대는 바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전망대에 올라가서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조망해 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기나긴 시간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3. 하나님의 경륜으로 본 메시아 대망신앙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위대한 계획이 하나님의 경륜(God’s Economy)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God’s Master Plan)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창조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심으로 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그 마지막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창조를 들려주는 이야기는 창세기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책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시 새롭게 만드신다는 이야기로 완성됩니다(계 21:5).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은 창조에서 시작하여 새 창조로 종결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지혜로 하늘과 세상 모든 것을 지으셨다고 찬양합니다(시 104:24, 136:5). 하나님은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성경은 소개합니다(창 1:31). 성경은 세상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 땅에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죄악의 그림자가 세상을 덮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더럽히고 망가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자기 세상을 바로잡으시려고 일어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으시려고 일어서시는 행동을 심판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노아 시대 때 홍수가 있었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로 세상은 다시 물에 잠겼으며 창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바람을 불게 하시어 물을 물러가게 하심으로 뭍이 드러나고 새로운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세계는 노아의 가정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런데 시날 평지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탑을 쌓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언어가 혼잡해지고 온 세상에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 만민에게 다시 복을 주시고 새로운 세상을 물려주시려고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만드셔서 열방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충실한 대리인으로 산다면 열방은 그 빛으로 나올 것이며, 아브라함의 언약대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목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민족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배반하여 그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약속을 저버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땅에서 쫓겨날 때 그들은 강대국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짓밟고 포로로 끌고 간 강대국은 앗수르와 바벨론, 그리고 페르시아 같은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잠시 돌아온 후에도 그 백성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살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뒤에 일어난 나라들에게 정복되어 계속 포로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라들은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언약한 백성들이 나라도 잃고 사방에 흩뿌려진 씨앗들처럼 살고 있을 때, 어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조상 다윗에게 하나님이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리라고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그 약속이 언제나 이루어지나 하고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기다린 것은 하나님이 그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씨로 오시는 분을 보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오실 분은 또한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면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될 것입니다. 그 언약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실 민족과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왕이 되시고 만국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 왕은 공의와 정직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며 언제나 성실하게 통치하실 것입니다(사 11:4~5). 그렇게 되면 세상은 어둠이 물러가고 다시 광명한 새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언자들이 꿈꾸던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그런 메시아, 그런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4. 하나님의 경륜으로 본 대림신앙
마침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되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예언대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눌리고 갇힌 자를 풀어주며 모든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얻을 때가 되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서 어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실망도 하고 미워하다가 결국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메시아는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쳐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강력한 나라를 예루살렘에 세우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심당원들의 폭력을 지지하지 않으셨고 자신을 지지할 정치세력을 영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소외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뿐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시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려고 오신 임마누엘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며, 그 옛날 성막에 충만하게 임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게 임하여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자기 자신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보면서 제자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되었음을 확신했습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할 것없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면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며, 하나님은 그들을 대리인으로 삼으셔서 세상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시작하셨고 그 일을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계속하심을 제자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할 때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제야 비로소 예수님의 대리인으로 바르게 살고 있음을 확신하며 기뻐하기도 했습니다(행 5:41). 전에 성전에 충만하게 계시던 하나님은 이제 교회와 함께 충만하게 계시며 교회를 통하여 일하고 계심을 확신했습니다(요 1:14, 빌 1:6). 그러므로 제자들은 교회의 일원이 되어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물질을 드려 교회를 섬겼으며, 교회들은 서로 연대하고 협력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분명한 것은 아직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어그러진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여전히 공중의 권세잡은 자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사람들을 삼키려고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그의 먹이감이 된 사람들은 우상숭배와 탐심에 마음을 빼앗기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교회는 예수께서 하신 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교회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칭찬과 상급을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날에는 주님이 친히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고 만물을 새롭게 만드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 날에는 옛 하늘과 옛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낡은 세상은 물러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을 두고 하늘의 세계로 들려 올라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하늘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을 하늘로서 강림하신다고 말합니다. 대강절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대리인인 교회가 주님이 맡겨 주신 일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주님이 오셔서 마침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고 하나님이 하늘에 새겨 놓으신 그 영롱한 계획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대강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이유는 우리를 불러 하늘로 데려가시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늘에 있는 성도들을 데리고 오시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4)
예수께서 많은 비유를 들려주셨는데 그 중에 포도원을 맡기고 떠난 주인의 이야기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 포도원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맡은 땅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은 하나님의 세상인 이 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시며 관리자시며 경영자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포도원을 아끼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생명으로 충만한 땅을 만드셔서 그 자녀들에게 그것을 물려주시고 그 충만한 삶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아름답고 놀라운 이야기인 하나님의 경륜이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5. 대강절,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대강절에 대해서 위와 같이 정리를 하고 나니 기독교는 기다리는 종교임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탄생한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강절은 이런 기다림 신앙을 되새겨 보는 기간입니다. 앞으로 4주 동안 우리는 대강절을 지키면서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해서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 이전 시므온과 같은 경건한 유대인은 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믿었습니다. 그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 백성을 높이시고 열방에 복을 주셔서 그 결과 온 세상이 공의와 평강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의 사슬에 매인 사람들도 자유를 누리며 사람답게 살 것이며, 사자와 어린 양이 어우러지는 것처럼 힘 있는 자들과 약한 자들이 상생하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이 약육강식의 정글과 같은 곳이며 사람이 사람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린 까닭은 그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이 계획하신 세상에 대한 꿈이 너무나 선명했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이 주신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없는 사람은 다른 욕심에 이끌려 결국 패망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만민이 그 제사장과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고 진실되게 살아감으로 그들의 공동체가 생명수가 샘솟는 에덴동산과 같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여 하나님의 경륜, 곧 하나님의 꿈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대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초림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구약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새겨진 하나님의 영롱한 계획이 우리들의 마음에 새겨져서 우리의 꿈이 되고 우리의 헌신을 통해서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이 모든 일을 다 이룰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답게 가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고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시며 상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면전에서 만물을 새롭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의 수고는 그리스도의 새 세상에서 더욱 의미를 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우리의 기도와 바람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위대한 양탄자 그림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될 그날에 얼마나 아름답게 성취되고 응답되었는지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넘치도록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신앙(대강신앙)의 사람들은 환경과 형편에 낙심하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실 세상을 기대하며 간절하게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릴 수 있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 세상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착한 일이 장차 온 세상에 충만하게 이루어지고 완성될 때 얼마나 놀라운 세상이 될 것인지를 꿈꾸는 성도는 지치지 않고 주님을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영광을 보았기에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엡 1:18, 새번역성경)라고 했습니다.
이 대강절에 우리는 선택된 몇 명의 사람들만이 들림 받아 그들만의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왜곡된 선민사상을 꿈꾸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고 어서 낙원에 들어가 살 것을 꿈꾸지도 않습니다. 또한 이 대강절이 우리는 인간의 지혜와 노력, 그리고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우리 손으로 지상낙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을 꿈꾸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이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을 때마다 어지럽고 혼잡한 세상에는 건설이 중단되어 흉물이 된 바벨탑 잔해가 널린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또한 그것을 주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이므로 그 위대한 꿈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언자들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이 꿈꾸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바쳐 세우시던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소망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눌린 자를 풀어주며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오늘도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동역자들입니다.
이 4주간의 기간 동안에 우리는 세상에서 익숙하게 듣고 배운 세속적인 야망과 환상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신 영롱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그 꿈은 예언자들의 말씀에 담겨 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알알이 맺혀 있으며, 사도들의 글에도 절절하게 흐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 4주 동안에 성경을 연구하고 선배 신앙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갑시다.
우리가 그런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꿈을 품게 될 때, 그리고 그 꿈을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시므온처럼 이제 죽어도 좋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자신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열정을 품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기적이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