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일에 따른 고난 벧전 2:18-25
선한 일에 따른 고난 벧전 2:18-25
찰스 고우만의 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1년 동안 애 벌레가 나방이 되어 나오는 것을 관찰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번데기에서 나방이 기어 나오는 구멍은 매우 작습니다. 그 작은 구멍으로 큰 몸집이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와줄 양으로 가위를 가지고 그 구멍을 넓혀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방은 고맙다는 듯이 쉽게 그 구명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 나방이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순간을 기다리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큰 구멍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쉽게 빠져나온 나방은 날개를 질질 끌고 방구석을 기어 다니는 팔삭둥이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는 긴 시간의 몸부림, 이것은 나방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절대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대중 기도를 하는 분들의 기도 내용 가운데에는, "제발 어려움이나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간구가 많습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나 모면을 구하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해서 적극적인 자세보다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역설적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고난 받게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고난 받는 것이 지극히 정상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기왕 당하는 고난이라면 피해 가다가 당하느니 차라리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이 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고난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애매한 고난과 자기 죄에 따른 고난과 그리고 선한 일에 따른 고난입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세 번째의 고난입니다. 오직 선한 일을 행함으로 고난 받으라는 것입니다. 확실히 역설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명과도 관련이 있으며, 그 결과가 아름답고, 그리고 주님이 친히 당하신 고난이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1. 소명의 목적입니다(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를 위한 부르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을 가리킵니다. 즉 오늘도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목적은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도록 하게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대체로 신약에서 그러하듯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부르심의 윤리적인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윤리적인 부르심에 대하여는 데살로니가전서 4:7, 갈라디아서 5:13, 고린도전서 7:15, 골로새서 3:15에도 설명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7에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라고 하였습니다. 부르심의 단계를 넘어 하나님의 뜻이라는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안일하게 특권과 축복만을 누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일하고, 고난 받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3, 3:12, 마가복음 6:34, 요한복음 16:33, 사도행전 14:22 등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고난에 대한 생각과 자세를 달리할 것입니다. 소극적인 자세가 아닌 적극적인 자세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능동적인 자세요, 부정적인 시각이 아닌 긍정적인 시각을 가질 것입니다. 고난을 피하려고 하셨더라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게 결심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습니다(눅 9:51). 특히 요한복음 10:18에서는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원적 고난은 의미가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일찍이 가브라엘 힛터는 자식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한 바 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세우사 약할 때에 약할 줄 아는 힘을 주시며 두려울 때에 꿋꿋이 서는 용기를 주소서. 패할 적에 고개를 들며, 이겼을 때에 겸손하고 온순하게 하소서.
주여, 내 아들을 기르사 안일하고 향락하는 길로 들지 말게 하시고, 고난과 싸워서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시고 광풍 속에 혼자 설 수 있고, 넘어지는 자를 헤아리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주여, 내 아들을 가르치사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모든 참된 지식의 기초가 됨을 알게 하소서. 주여, 내 아들을 크게 하사 원대한 이상을 갖게 하시며, 높은 목적과 맑은 마음을 갖게 하소서. 다른 사람을 손에 넣기보다 먼저 제 자신을 손에 넣게 하소서.
주여, 내 딸에게 겸손함을 주셔서 단순한 것이 참으로 위대한 것임을 알게 하시고, 마음을 여는 참된 지식임과, 온화함이 참된 힘인 것을 알게 하소서. 그러면 나의 마음은 은밀한 곳에서 쉴 때 감히 속으로 말하겠나이다.
'나는 헛되게 살지 아니했노라'고...."(부모의 기도 중에서)
2. 결과가 아름다운 것입니다(19,20절).
어떻게 많은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도 이기며 나갈 수가 있는가? 그것은 고난의 의미를 알고, 그리고 그 결과를 알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당하는 고난은 나의 죄 때문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의 일환으로 주시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결과가 해피엔딩이라면, 보장된 약속이 있다면 무엇인들 마다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참고 인내한 것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도 그의 서신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권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리가.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온전한 인격을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미리 알기에 기쁨으로 고난을 감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 주는 인내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참으면 아름다운 일이라"했고 20절에서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아름답다'는 말은 "은혜"라는 말입니다. 인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새번역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느리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돌아올 결과도 소중하지만 더 나아가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제 아내가 시집와서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동기는 시어머니가 기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벽 기도만 갔다 오면 얼마나 기뻐하시며 칭찬을 하시는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한두 번 나가던 것이 그만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어머니를 위한 것이 아닌, 바로 그 자신을 위한 결과였음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합동하여 유익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입니다. 인내하기만 하면 약속이 보장된 것이 고난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본이십니다(21-25절).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대속적인 고난과 모범적인 고난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 두 가지의 의미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21절에 보면 "(벧전2:21)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은 '본'의 의미가 있습니다. 모범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기독교인들로 그 자취를 그대로 따라오도록 하기 위해서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너희를 위한 고난'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리스도 자신의 죄 때문이거나, 자신의 궤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22).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벧전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그는 고난의 과정을 겪으면서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막 14:61, 15:5, 마 26:63, 27:14, 눅 23:9, 요 19:9).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23절 하).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수고한 대로 먹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의 성격은 어떤 것입니까?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십자가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나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것은 신명기에 나온 저주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신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 그렇다면 죄도, 궤사도 없으신 분이 무엇 때문에 저주를 받으셨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가 저주를 받으므로 우리에게는 어떠한 결과가 주어지게 되었습니까? 그가 저주를 받으므로, 즉 각각 고난을 받으므로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결과가 주어졌습니다.
첫째는,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무거운 죄의 짐을 대신 지고 가셨다(요 1:29)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에서 '죄를 담당한다'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레 5:1,17). 이는 고대 이스라엘의 속죄 의식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의식 중에는 염소 한 마리를 광야의 무인지경에 보내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사셀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멀리 가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즉 의인되신 예수님이 죄를 지고, 죄인이 됨으로써 죄인 된 우리를 의인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제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살게 되었습니다(24절).
둘째는, 나음을 주셨습니다. "(벧전2:24)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고 고난받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곧 치유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치유되었다는 것입니까? 죄로 인한 상한 심령과, 죄로 인한 죽은 영혼입니다.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마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치유입니다. 우리의 영과 육을 함께 고쳐주었다는 것입니다. 병든 영혼과 육신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셋째는, 돌아오게 되었습니다(25절). 누가 누구에게로 돌아왔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때가 언제입니까? "너희가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로"입니다. 여기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일찍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그리고 감독으로 표현한 것은 그가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때가 언제냐? "이제는"입니다. 여기서 '전에'와 '이제'가 서로 대조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때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을 때를 가리킵니다.
사람은 본래 영원을 사모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전3:12)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김으로써 진정한 안식과 평강을 누리도록 지음받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13년이란 긴 방황의 세월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까지는 진정한 평안이 없었나이다."
우리나라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꿀벌을 남양에 가지고 가, 첫해에 많은 양의 꿀을 거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곳엔 꽃이 많겠다, 꿀이 많겠다, 벌이 부지런하겠다, 얼마나 좋은가, 이제 나는 큰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에 벌은 그렇게 부지런히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전혀 일하지 않고 다 벌통을 떠나 버렸습니다.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자세히 원인을 알아보니 그곳에는 겨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겨울이 없으니까 벌은 꿀을 저장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 아예 일을 안 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인은 겨울이라는 고난이 있어야 신앙의 생동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겨울이라는 고난이 있어야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