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집 벧전 2:1-10
신령한 집 벧전 2:1-10
인생은 하나의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집을 짓되 아름다운 집을 지어야 하고 견실한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하나의 집을 지으려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우선 건강이 필요합니다. 건강은 모든 것의 가능성입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으면 모두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꿈도, 이상도, 미래도, 일터도 그 모두를 잃게 됩니다. 건강은 인생의 집을 짓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초석입니다.
여기에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또 여기에는 노력도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모여서 하나씩 쌓여져 나가다 보면 결국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집이 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하나의 집을 짓는 생활입니다. 신앙의 집도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집이 다르게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신앙의 집을 짓는 데는 꼭 들어가야 할 것이 있고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신앙의 집을 짓는 데 필요한 것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버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을 왜 버려야 하느냐 하면 우리들이 신앙의 집을 짓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사람의 마음 밭을 오염시킵니다. 악독, 궤휼,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들, 이것은 사람의 순전한 마음 밭을 오염시키고 악화시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들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근심을 가지고 있거나 불화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그 마음이 모든 생활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삶이 삭막해지고 불화해서 다투게 되고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치 식물들이 자라는데 그 위에 가시 넝쿨들이 짓누르고 있어서 성장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탈선하는 청소년들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반드시 탈선할 수밖에 없는 문제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 주위에는 좋지 않은 친구들이 모여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울려 다니다 보니 탈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좋지 않은 환경들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영향을 받아서 생활에 질서를 잃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좋은 환경으로 여러 번 이사를 했다는 말입니다. 환경은 어린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사실은 어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줍니다.
신령한 집
어른도 주위에 좋지 않은 친구가 있어서 어울리다 보면 생활의 질서를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또 주위에 술친구가 있으면 술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작심을 했다가도 또 무너져 버립니다. 그것은 친구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위에 노름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 유혹으로부터도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노름을 하면 돈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잃으면 억울하니까 잃은 것을 되찾으려는 마음에서 빚을 내서 또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만 그 세계로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친구도 바꾸어야 합니다. 환경도 바꾸어야 합니다. 때로는 직업도 가감이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관심도 바꾸고 취미도 바꾸어야 합니다. 이 같은 단절이 없으면 그곳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때로 이 단절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 삶을 살게 하고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들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왜냐하면 이것들이 신앙의 집을 짓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잡고 있는 한 그 사람은 자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제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버리라고 했습니다.
2. 취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2:2)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갓난아이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깨끗하고 순전합니까? 거기에 거짓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면 이 아이들이 먹는 것이 깨끗하고 순전해서 그렇습니다. 이 아이들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랍니다.
특히 모유는 갓난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음식입니다. 모유 속에는 영양이 고루 함유되어 있고 그 속에 지혜의 요소와 온건한 성품을 만들어 주는 요소들이 다 함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모유만 먹고 자라면 잘 조화된 성품이 조성된 온건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들에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모두 모유를 먹이지 않고 소의 젖을 먹여 키운다는 데 있습니다. 송아지가 먹는 소의 젖을 아이가 먹고 자랍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모두 망아지처럼 사나워지고 난폭해지고 소란스럽고 들이받기를 좋아합니다.
신앙인은 신앙인이 먹을 음식이 따로 있습니다. 그 음식은 순수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음식은 정신을 맑게 하고 깨끗하게 하는 음식이어야 합니다. 마음과 정신과 생각을 혼란케 하는 독주나 아편이나 마약이나 알코올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를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버리지 못하고 미련을 갖고 자꾸만 그것에 유혹되는 것을 보면 유감입니다. 이것들이 오늘 현대인들을 잡고 인질 노릇을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음식도 순수한 음식을 먹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마음과 생각과 영이 맑고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또 음악도 순수하고 조용한 음악을 듣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산란한 마음도 가라앉게 되고 어지럽던 정신도 정돈되고 갈등이 많던 마음도 안정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노래들은 너무나 시끄럽고 요란합니다. 정신이 모두 어지러워집니다. 무슨 내용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이렇게 요란하고 시끄러운 것입니다.
시편 "(시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 이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만큼 말씀에 깊이 심취를 했으면 이 같은 신앙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겠습니까? 신앙의 집은 이렇게 지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건실한 신앙의 집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3. 연결하라고 했습니다.
"(벧전2:5)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를 산돌이라고 했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는 모퉁잇돌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돌을 초석이라고도 하고 옛날에는 주춧돌이라고도 했습니다. 모든 집의 구조물은 이 초석과 연관하여 짓습니다. 그러니까 이 돌이 모퉁잇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의 집을 지을 때나 인생의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이 산돌 되시는 예수와 연결하여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삶의 필수입니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어야 양분을 공급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은 모두 산돌이신 예수께 연결되어야 비로소 신앙인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떨어져 나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없는 인생은 성공한 것 같으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실패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화려하게 살아도 궁극적으로 예수와 무관한 삶을 살았다면 그 삶은 성공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성공은 한순간만을 보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도 보아야 하지만 미래도 보아야 하고 심지어는 내세까지도 보아야 그 삶이 진정 성공적인 인생인가를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논어에 보면 공자가 70생애를 술회한 대목이 나옵니다. 공자는 73세를 살았습니다. 그 73세의 삶의 내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자는 15세 때에 학문을 하기로 입지를 세웁니다. 30세 때에 성격을 형성합니다. 40세 때에 불혹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50세 때에 천명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천명이라는 것은 "사생유명"이고 "부귀재천"이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부귀가 모두 하늘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50세에 가서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60세에 가서 귀에 들리는 말을 모두 순순히 이해하고 관용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했다고 합니다.
70세에 가서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도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73세에 죽습니다. 이것이 일생을 살아간 공자의 삶의 면모입니다. 거기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을 알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 인생은 어디까지나 이 땅에서 평가할 때 성공한 인생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완전한 일생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 죽은 후 중일전쟁 때 중국군이 일본군에게 쫓겨서 중경까지 후퇴할 때 누군가 말하기를 중국의 조상인 공자의 무덤을 잘못 써서 이런 일이 있다고 해서 공자의 무덤을 파 보니까 그 큰 무덤 속에 쪽박만한 두개골 하나밖에 없더랍니다. 그런데도 그 무덤은 엄청나게 크고 장엄했습니다. 그 속에는 온갖 허무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끝나고 말 것이라면 군자면 무엇하고 성현이면 무엇 할 것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 산 돌이신 예수와 연결하여 인생의 집을 건설하고 신앙의 집을 지으라고 합니다. 예수와 연합하여 지어진 집이라야 그 집이 신령한 집이고 영원한 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이대로 살다가 죽는다 해도 예수를 알고 살다 죽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죽어서 그까짓 두개골이 땅 속에 있건 없건 그것이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신앙의 집을 짓되 산돌이신 예수와 연결하여 집을 지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 삶을 구체적으로 살라고 했습니다.
"(벧전2:5)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삶을 살되 구체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집을 짓는 이유는 지어 놓고 구경하려고 짓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지어 놓고 그곳에서 살려고 짓습니다. 어떻게 사느냐 하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 짓는 이유도 구경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예배냐 하면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고 구체적인 삶을 드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5절을 보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다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 제사가 바로 신앙인의 구체적인 삶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없으면 형식만 남게 됩니다.
오늘날은 꾸밈과 위장과 형식이 많은 시대입니다. 오늘날은 삶의 모습들이 구체적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형식적이고 포장된 것이 많이 보이는 때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포장되어 있습니다. 방송에 나오는 모습들을 보면 다 꾸며진 모습입니다. 탤런트들도 모두 얼굴을 꾸미고 TV에 나옵니다. 그래서 모두 미인같이 보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꾸며 놓으면 그들보다 훨씬 예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촛불 아래서는 여자하고 색실은 고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촛불 아래서는 모든 사람이 예뻐 보이고 모든 아름답게 꾸며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분위기에 위장되어서 그렇습니다. 집도, 인생도, 얼굴도, 아름다움도, 교회도 사실 그대로가 아니고 일단 꾸며지면 그 속에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 없어지게 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구체적인 삶이 없고 꾸며진 모습과 만들어진 모습만 보이면 그 삶에는 생명력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껍데기만 남고 형식만 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구체적인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그 삶이 세상으로 전파되고 전해져서 이 세상이 밝은 세상이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은 그 나름대로 이 세상에서 역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선전하라고 했습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선하신 덕을 세상에 선전하게 하시려고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선전원들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해방시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순전히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출9: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9: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10: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
해방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해방이라는 말은 곧 예배라는 뜻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곧 하나님 예배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과 똑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택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까?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선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목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살아갈 집도 잘 지어야 합니다. 대충 지으면 무너지기 쉽습니다. 집이 금이 가고 무너지는 것은 잘못 지어서 그렇습니다.
또 우리의 인생의 집도 잘 지어야 합니다. 불성실하게 지으면 도중에 실패하고 낙오되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아주 불성실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의 집을 잘못 지어서 그렇습니다. 인생의 집을 잘못 지으면 사람이 불성실해집니다. 어느 날 그 인생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도중에 실패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타락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신앙의 집도 잘 지어야 합니다. 신앙의 집을 잘 지으려면 무엇보다도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해야 합니다. 버릴 것과 버리지 말 것을 함께 지니고 있으면 좋은 신앙의 집이 잘 지어질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집을 짓되 구체적인 삶으로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곳에 하나님이 와 계시고 성령께서 내주해 계시는 축복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런 신앙의 집을 지으시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