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길 렘 14:7-9
우리가 사는 길 렘 14:7-9, 막9:14-29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언약을 깨뜨린 결과로 유다 백성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재앙 곧 가뭄, 칼. 기근. 염병 등과 같은 무서운 재앙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당할 환난을 생각하고 안타깝고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드립니다. 본문 7-9절 “우리가 주께 범죄 하였나이다.”라고 하면서 유다의 죄악에 대해 고백하고 이어서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긍휼과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을 대적해 왔기에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유다에게 필요한 것은 사유의 은총이 아니라 징계의 채찍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무 오랜 기간 죄와 불신앙, 불순종으로,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면 그러한 자들을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중보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지 않고 징계가 계속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극심한 가뭄이 예언됩니다.(1-6절)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유다 땅에 오랫동안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성읍 사람들은 지친 모습으로 성문에 모여 애통하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습니다.(2-3절)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죄가 너무 중했기에 이제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라고 간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들으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금식하며 제사를 드릴지라도 받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더 심한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하시면서, 가뭄에 이어 칼과 기근과 염병이 예언됩니다.(10-12절) 용서 받기에는 유다의 죄가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10절)
신약 막9:14-29에는 귀신이 들려 시달리는 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주님께 나와 호소함으로 아들이 고침을 받아 귀신의 시달림에서 해방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우리가 사는 길”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1.늦기 전에 우리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깨닫는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도 기회를 놓치기 전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병도 깊어지면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 할지라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죄가 중하면,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면 중보의 기도로도 안 되고, 그들이 아예 돌이키지 않기를 바랄 정도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 하시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5)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간절히 소망하시며 징계의 매를 드시기도 하시는데, 그 죄악의 도가 얼마나 지나쳤으면 ‘저가 깨닫고 회개하여 내게 고침 받을까 두렵다.’ 고 하시겠습니까? 회개도 기회를 놓치면 더 이상 사는 길이 없고, 더 이상 소망이 없고, 더 이상 사유 받을 길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레미야의 중보기도 중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 주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먼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입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 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했습니다. 어찌 보면 주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하나, 하나를 살피실 때 우리 때문에 은혜를 베푸시고, 좋은 일 하고 싶으신 생각이 하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시고 많은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는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좋은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를 원하여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할 때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되기를 원하나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다음에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이십니다. 본문 8절에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에게는 나름대로의 길이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고기의 길, 짐승에게는 짐승의 길이 있고, 인간에게도 인간의 길이 있고 성도에게는 성도의 길이 있습니다. 성도의 길이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외면한 채 내 맘대로 살다가, 불순종 하며 살다가 주님께 나아와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간구할 때 사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마가복음에 아들이 귀신들려 시도 때도 없이 물, 불을 가리지 않고 넘어져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 데리고 와서 간청할 때 고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중에 계셔서 우리를 버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어찌하여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나이까..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는 분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시험에 들어도 속히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시험에 든 분들을 절대 비웃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시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완고히 하여 계속 주님을 외면한 채로 죄 가운데 빠져 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늦기 전에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이키는 슬기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소망하며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 렘14:8에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당한 때의 구원자시여’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완전히 떠나시면 모든 소망이 사라짐을 알았기에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소망하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막9:19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을 아시고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어릴 때부터입니다. 어릴 때부터 불에도 던지고 물에도 빠졌나이다.’말하면서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는 믿음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이 믿음 없는 것을 알고 24절에 보면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내어 쫒으시니 아이가 온전하여 졌습니다.
이 사실을 본 제자들이 주님께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 하였나이까?’ 그 때 주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소망하며 믿음으로 기도할 때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개인이 사는 것도 기도운동이요, 가정이나 교회가 사는 것도, 국가가 사는 것도 기도 운동입니다.
1991년,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Nelson R. Mandela)는 대통령 취임식 때,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정치가들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가장 큰 기쁨은 로번 섬 교도소에서 자신을 감시했던 세 명의 간수들과 이 자리에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간수들을 일으켜 소개하면서 허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습니다. 취임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가 말을 잃어버린 순간이었습니다.
만델라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소망이신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젊었을 때는 성격이 불같고 자주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감옥 생활을 하면서 소망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더욱 강해졌고,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만델라를 대통령으로 세우셨고,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위대한 과업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하는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위기를 만난다 해도 그것을 통해 연단되어 존귀한 인생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게 하십니다. 우리가 고통의 순간에 사람이나, 돈이나, 명예나, 권세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소망하며 믿음으로 기도하여 승리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했고, 9절에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여기의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는 원어로 ‘니크라’인데 ‘소유되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나타내며 ‘우리는 주님의 것’이라는 강한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주께서 피로 갚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는 내 것이다.', '나의 영광을 위하여 너를 구속 하였다.', '내가 너를 지명 하여 불렀다.', '나는 너의 구원자다 너를 위해 애굽을 속량 물로 구스와 스바를 대신하여 주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고 그리스도의 피로 너를 속량 했다.' '내가 너를 사랑 하노라.'고 하십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 성도들은 그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여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어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을 높이고,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생명까지 주신 예수님을 나의 주인, 나의 왕으로 내 중심에 모시고, 주님을 대접해 드리면서 기쁘시게 하고, 모든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할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은 우리 성도들입니다.
어느 폭퐁우가 몰아치는 밤이었습니다. 한 늙은 부부가 길가 여관의 현관문을 밀고 들어섰습니다. 그 들은 쉴 방을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카운터에 있던 종업원은 그 읍내에 3개의 여관이 있으나 때마침 모두 초만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여관도 빈방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기꺼이 쉬신다면 제방을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노부부는 망설였으나 그 종업원의 간청으로 그의 방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여관을 나서며 노신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같이 친절한 사람은 처음이요. 당신은 이 미국에서 제일 친절한 여관 종업원이요.. 아마도 나는 당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건축하게 될 것이요.' 종업원은 그 노신사의 말에 지나가는 말로 알고 웃음으로 답 하였습니다.
그 후 어느 날 그 종업원은 뉴욕방문을 요청하는 왕 복 비행기 표가 들어 있는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노신사로 부터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그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노신사는 그를 거대한 새 빌딩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저것은 당신이 경영하도록 내가 지은 호텔이요." 그 노인의 말은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노신사는 당시 거대한 갑부였던 W. w 아스토였고, 그 청년은 아스토리아 호텔의 첫 번째 경영자 가 된 G.C 뿔트였습니다.
세상의 유력자도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할 줄 아는데, 하물며 만유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을 왕처럼 대접하고, 기꺼이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 따르면서 당하는 고난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주님 영광 위해 사는 자들에게 하늘나라 상급과 면류관이 없겠습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며 살다가 칭찬과 상급과 면류관 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늦기 전에 우리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소망하며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