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야고보서

인내에 깊이 들어가라 (약 5:7-11)

nam씨 2021. 9. 3. 20:06

인내에 깊이 들어가라 (약 5:7-11)

이 시간은 “인내에 깊이 들어가라”라는 제목입니다. 인내라는 것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의 첫 번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그만큼 인내란 중요합니다. 왜 인내해야 합니까? 세상은 완전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는 동안에 우리가 참고 살아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불의한 부자 이야기가 나온 후에 이 교훈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바로 그런 곳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고 오래 참음 없이는 주님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은혜와 함께 고난도 받는 그것이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우리에게 인내를 훈련하십니다. 생활 속에 온갖 인내해야 할 것들이 바로 그 훈련입니다. 약1:12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이 말씀은 시험에 합격하면 그런 뜻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 때부터 진짜 생명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아브라함처럼 벗이라고 불러 주십니다. 관계가 크게 달라집니다.

본문에 야고보는 성도가 인내할 것을 말씀합니다.

1.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입니다.

인내는 달다 그러나 그 열매는 쓰다는 말이 있지요? 이처럼 인내해야 할 이유가 좋은 열매를 위해서입니다. 7-8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농부가 씨를 뿌린 후 열매를 거두기까지 여러 가지 시련을 겪습니까? 심은 씨앗이 알곡 되어 돌아오기까지 하늘 쳐다보기를 몇 번이나 합니까? 비가 오지 않아도 걱정이요, 비가와도 걱정이요. 바람이 불어도 걱정이요, 바람이 너무 없어도 걱정이요. 병충해는 얼마나 많으며, 잡초는 또 얼마나 성합니까? 요즘 산간에는 멧돼지들이 극성을 부린다고 합니다. 혹은 까치가 다 익은 과일을 파먹는다고 합니다. 혹은 외국에서 날아온 곤충들이 퍼져 작물을 망쳐놓는다고 합니다. 농부는 새 양식이 나기까지 곤궁함도 참아야 합니다. 천재, 인재 등 농부는 끊임없이 자연과 도전하며 싸워야 합니다. 요즘같이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도 어려운데 2,000년 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특히 이스라엘은 열대지방입니다. 오로지 이른 비와 늦은 비 그리고 이슬에 의존하여 농사를 짓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에 좋은 환경은 없습니다. 좋아도 시험이요 나빠도 시험입니다. 그래서 풍부에 처해도 위험, 궁핍에 처해도 위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가운데서 죽고 또 죽어서 한 알의 밀알처럼 견고한 신앙을 가져 아름다운 열매를 맺길 원하십니다.

매사에 순종하면서 내가 그렇게 순종함에 감사해야 합니다. 왜 감사합니까? 그것이 나를 주님께 제물로 드림이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순종하면서 주님께 나를 산제사로 드림을 기뻐해야 합니다. 고난이 와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내가 죄에 반응하지 않고 의에 삶에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시험 당할 때만이 아닙니다. 평소 모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기도하면서 또 감사했습니다. 기도함에 감사하고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제가 은혜를 첫 경험할 때도 그랬습니다. 시험이 와도 그 시험에 나를 드리지 않고 주님께 나를 드렸고 그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죄에 드리지 않고 의에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함이 나의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감사함이 합격점에 이르렀던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아주 큰 은혜였습니다. 놀라운 임재와 생명의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순종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롬6:19에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2절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했습니다. 농부가 얼마나 작물에 나를 드렸느냐에 소출이 달렸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얼마나 하나님께 드렸는지 살펴보십시다. 이 시간도 나를 죄에 드리지 않고 주님께 드림을 감사하십시다.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예수만 나타낼 때 풍성한 열매를 주십니다.

2. 그러나 불만 불평하면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9절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어려운 일이 당하면 불만 불평하기 딱 좋습니다. 이 때 낙심하고 염려하며 원망하고 다투기도 좋습니다. 시험 들기 딱 좋아요. 그러나 잘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기면 풍성한 은혜지만 이기지 못하고 원망하면 심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험은 우리에게 항상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이기면 상이요, 지면 화입니다. 감당하면 복이지만 감당치 못하면 저주입니다. 생명이냐 사망이냐? 복이냐? 화냐? 이 두 가지가 항상 우리 앞에 있어요. 같은 일을 당하고도 어떤 사람은 복을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화를 당합니다. 같은 양식을 먹고도 어떤 동물은 독을 내고 어떤 동물은 젖을 내듯 그 차이는 만사를 신앙으로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고난과 시험도 변장된 축복임을 알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복이 되지만 악으로 불평하면 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30:15-16에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불평하지 마세요. 나를 복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복임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환경을 통해서 훈련시키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환경을 온전히 감사해야지 원망하고 불평하면 심판이 있습니다.

3. 의로운 길에는 고난이 따르기 때문에 인내해야 합니다.

10절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야고보는 농부의 비유에 이어 선지자의 예로 들어 인내를 강조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악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다가 수없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세례요한도 죄를 책망하고 의를 전하다가 잡혀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어느 누가 책망이나 심판을 좋아하겠습니까? 이것이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입니다. 이것을 인내의 본 삼고 신앙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롭게 살려고 하면 고난이 따릅니다. 더 헌신해야 합니다. 더 힘써야 합니다. 이해해 주지 못해도 외길 가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해야 합니다. 날마다 악과 악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육의 사람에게는 일감처럼 보이지 않겠지만 이 얼마나 심각한 영적 세계입니까? 주의 일의 일감이 없다고요? 태산처럼 쌓여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기도부대도 필요하고, 인터넷을 통해서 역사하는 악의 세력을 대항하는 사이버선교사도 필요합니다.

성령의 감동 따라 영혼도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신부 단장도 해야 합니다. 무고한 핍박도 받고 박해도 받아야 합니다. 신령한 건축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악이 틈타지 않게 신령한 성곽도 건축해야 합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고난당하는 자의 아픔을 안고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바로 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를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 좁은 길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4. 인내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욥기를 보면 욥이 불평하고 인내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외형만 보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신음소리도 못 내나요? 잘 믿어 보려고 의문 갖는데 그것마저도 안 되는가요? 하나님은 욥의 중심을 아셨습니다. 모든 산업 다 사라지고 열 자녀 죽고 자기 몸마저 병들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그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그 인내를 보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내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왜 고난을 주신 하나님을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로 소개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고통을 이겨내도록 욥에게 사랑과 은혜를 주셔서 최종적인 복을 받도록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욥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육신의 고난은 크고 정신은 혼미하여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욱 사랑과 자비로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저는 폐암에다 늑막에 물이 차서 매일 생사를 헤매고 있어요. 작정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지만 주님이 만나주시지 않네요.” 그래서 “ㅎㅏ나님은 보이진 않지만 어려울 때 더욱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안 만나 주시는 듯함도 은혜입니다. 주님이 형제님을 부르실 것 같으면 이미 자주 만나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를 주시고 계신 줄 알고 열심히 회개하시고 투병생활 잘하세요.”라고 답해 주었습니다.

주님 발자국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요?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모래밭 위를 걷는 꿈이었습니다. 모래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것, 또 하나는 늘 동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생을 통해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당했을 때마다 모래 위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저와 늘 함께 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가 물었을 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무엇이라 대답하셨을까요? "그것은 내 발자국이다. 네가 고통 가운데 있었을 때는 내가 너를 업고 지나왔단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인내 속에 더욱 함께 하십니다. 십자가 붙든 사람과 십자가 팽개친 사람과 같겠습니까? 인내의 과정을 통과한 사람과 안 한 사람과 어찌 영적 깊이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유혹이 와도 더욱 순종하여 예수와 함께 죽어짐에 감사하고, 고난이 와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에 기뻐하고, 힘들고 응답 없고 아득해도 더욱 몸 바쳐 기도하고 충성하고 승리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엔가 주님이 생명의 풍성함으로 함께 하시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은 바로 우리가 인내에 합격하는 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 복과 화,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아래 나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인내의 자리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풍성함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하심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인내로서 승리하신 주님을 본받아 온전히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