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고난 vs 나타날 영광 (로마서 8장 18-30절)
현재의 고난 vs 나타날 영광 (로마서 8장 18-30절)
신약성경 중에서 ‘로마서’의 중요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를 이름 하여 “바울의 복음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바울이 쓴 13권의 신약성경책(편지) 중에서 그만큼 돋보이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전체 16장 내용 중에서도 오늘 본문이 있는 8장은 “황금장”이라고 부릅니다. 그토록 중요하다는 로마서의 핵심 중의 핵심이 8장의 내용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로마서 8장만 제대로 이해하고, 붙잡고 살아간다면, 확실한 구원과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 이전에 나오는 8장 1-17절의 내용을 잠깐 설명해 드립니다. 이 부분은 한 마디로,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이라면, 반드시 성령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 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두 가지 삶의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 나는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8장 1절에서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는 말씀이 구원의 확신을 붙잡는 믿음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믿으면 구원 받는다, 나는 예수님 믿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 나는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죄인이 아니라 완전한 의인이 되었다” 이러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 받았음(죄에서 해방)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과 불안이 틈타지 못하게 하고, 확신 안에 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삶의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는 죄에서 완전하게 해방 되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즉,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나는 여전히 죄와 멸망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죄를 이겨낼 능력이 없지만, 죄를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실 성령이 내 안에 함께 하십니다.
내가 육신으로 살아가는 한, 성령의 생명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이 끊임없이 갈등하게 만들고, 선택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도 못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오직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 절대적으로 전제 되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두 가지 대 전제를 말씀 드립니다. ① 나는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확신, ② 그리고 나는 성령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늘 인식하고, 의식하고,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간다면, 거룩한 삶의 열매들이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구원의 확신을 단단하게 붙잡으시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고난의 상황을 거뜬히 이겨 나가시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십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단 하나를 추가 하다면,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됩니다. 그러면, 삼위 일체 하나님이 나의 육신과 영혼에 항상 능력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와 염려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없을 것 같은 우리 인생이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 절인 17절을 읽어 드립니다.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아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언제 읽어도 부담감이 느껴지고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영광을 받는다?, 어떤 영광일까요?
① 예수님으로 인해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는 것,
②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는 것,
③ 죄인으로 얽매인 삶이 아닌 의인으로 자유함을 누리는 것,
④ 육신의 몸이 죽을 지라도 부활의 약속에 참예 하는 것,
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광, 그리고 영원토록 누리게 될 모든 영광의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는 말씀이 한 쌍처럼 붙어 있습니다. 영광과 고난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기에,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만약 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당연히 영광도 없었을 겁니다. 성육신-십자가고난-부활-승천-재림(심판),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연결고리로 되어 있는 것처럼, 고난과 영광도 뗄 레야 뗄 수 없는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영광을 받았으니, 고난도 함께 오겠구나 라는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영광과 함께 고난도 함께 받으라”는 성경 구절이 나올 때, 부담감이 있을 지라도, 이를 거부하거나, 외면하려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영광과 함께 고난도 함께 받으라”는 말씀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성숙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 이라는 말이 두렵고, 떨리고, 도망가고 싶은 말로 느껴 질 때, 이러한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일시에 붙잡아주는 단 한 구절의 능력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18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아멘. 표준새번역으로는, “나는,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18절은, 17절과 바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연결해서 읽어 보면, “예수님 믿고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얻으려면 반드시 고난도 함께 받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받게 될 이 땅에서의 고난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을 떠올릴 때마다, 넉넉하고, 거뜬하게 이겨내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잠깐, 아주 잠깐의 일이지만, 영광은 영원히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임을 꼭 기억 하십시오.” 이런 해석이 나옵니다.
18절 구절은, 이달의 암송 말씀이기도 하며,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암송하고 간직하시는 가운데, 어떤 고난, 어떤 근심, 어떤 고민, 어떤 상처, 어떤 아픔, 어떤 괴로움, 어떤 연약함, 어떤 사고, 어떤 죽음 등등, 인간에게 닥칠 모든 고난들을 통째로, 한꺼번에 시원하게 날려 버릴 수 있는 통쾌한 능력의 말씀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 진짜 사이다 마신 것 같이 속이 시원하다 말이 있죠. 고구마 잔뜩 먹고 사이다 한 병 마신 것처럼 속히 후~련 하구나, 이런 기쁨의 탄식이 절로 나오는 기분 좋은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고난이 닥쳐 올 때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한 말씀 붙잡으면, 누구라도 넉넉히 그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고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이 고난이라는 것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견뎌야 하는 삶이 주는 고난들을 말하는 것보다, 사도 바울이 겪었던 것처럼, 복음을 위해 일하다가 발생하는 고난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라고 했습니다.
마커스 예배 팀의 이름인 ‘마커스’가 바로 ‘흔적(헬-스티그마, 영-markers)’ 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흔적의 원어상 의미로는 ‘낙인이 찍혔다’는 뜻으로, 바울이 복음 전하면서 핍박을 당하면서 매를 맞거나 혹은 부상을 입어서 생긴 지워지지 않는 몸의 흉터를 말합니다. 바울이 당한 고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한 가지 사명 때문에 생긴 겁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쏟아놓았던 처절한 고백들은 언제들어도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가 버림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고전 9:27, 표준새번역), /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아멘.
이렇게 복음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불같은 인생을 살았던 사도 바울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매를 맞을 때마다 현재의 고난보다 나중에 나타날 영광만을 생각했습니다. 육신의 질병에 시달릴 때 현재의 고난보다 나중에 나타날 영광만을 생각했습니다. 저주하고 욕설을 퍼부을 때 고난보다 나중에 나타날 영광만을 생각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내면의 갈등을 부추길 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외치면서 나중에 나타날 영광만을 바라보며 이겨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수없이 다다랐을 때, 오직 부활의 영광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고난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참으로 처절한 사투를 벌인 사도 바울이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었던 단 한마디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을 위대한 인물로 세운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처럼 복음에 매인 자, 복음에 목숨을 거는 자, 복음에 미친 자처럼 헌신하고 충성하려는 결단과 용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구원을 가장 먼저 이루어 가고, 그 다음 내 가족, 그 다음 내 이웃, 그 다음 내가 만나게 될 모든 사람에게, 오직 복음, 오직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자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사명입니다.
그렇게 하시겠다면 단단히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낙인찍히는)이 남는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과 고난이 올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을 앞세우며, 울면서 이겨내고, 이를 악물며 이겨내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열정으로 예수님을 향해서, 천국을 향해서, 영광의 그날을 향해서 전진, 또 전진해야 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고, 이렇게 살아가라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제가 로마서 1장 강의 하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다”라고 말한 내용을 말씀 드리면서, 이 고백이 사도바울의 고백이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를 했습니다. “택정”이라는 말이 따로 구분되었다는 말인데, ‘교회’(헬-클레시아)라는 말도 세상에서 따로 분리 되었다. 라는 뜻이기 때문에, 두 단어가 일맥상통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가 건물이 아니고, 구원 받은 성도, 즉 나 자신이 교회라면, 우리는 따로 구분되어진 존재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미 택정함을 얻었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당연히 복음을 위해서 따로 구분 되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고,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을 일평생 앞세워,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으며, 복음 때문에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내 자신이 누구보다도 먼저 앞서서, 이 시대의 사도 바울이 되기를 바라시고, 기대하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살아가도록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이 내가 빨리 결단하기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나를 통해 단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돌이키는 복음의 열매가 맺어진다면,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실 것이고, 우리는 당당하고도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천국문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만 황홀하고 감동과 기쁨이 넘쳐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버티고, 견디고, 참으며 그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합니다.
19-25절에서는 구원을 기다리는 두 존재가 나옵니다. 하나는, 인간이 아닌 모든 피조물들(생물, 무생물)까지도 함께 탄식하며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이 죄를 저질러서 땅이 저주를 받았을 때(창 3:17, 하나님이 아담아게 이르시되~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와,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창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땅이 저주를 받은 것을 기억 하실 겁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모든 피조물들도 계속해서 악에 물들고 저주 받으며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됩니다.
또 하나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먹은 우리(좁게는 바울과 같은 지도자 그룹, 넓게는 모든 그리스도인)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피조물과 모든 그리스도인, 구원을 기다리는 이 두 존재의 공통점은, 소망 가운데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소망이라는 것이,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요,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놓치기 쉽다는 것입니다. 당장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5절에,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사도 바울은 그저 참고 견디며 끝까지 기다리라는 이 말 밖에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에게, “참고 기다리세요.,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고난을 끝까지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의 그 날이 옵니다. 기다리세요...”라고 밖에 말씀 드릴 것이 없습니다. 너무나 죄송하지만, 사도 바울이나, 저나, 더 이상의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현재의 고난을 참고, 참고, 또 참고, 오직 소망을 품고 묵묵히 기다리는 것,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자, 유일한 출구의 수단입니다.
그렇다고 낙심하거나 실망 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평생의 응원자요, 동행자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능력과 용기도 주십니다. 우리 다 같이 26, 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아멘.
언제 읽어도, 언제 들어도, 참으로 가슴 벅차고, 위로가 되고, 새 힘이 되는 말씀이 아닙니까? 남편이, 아내가, 가족이, 친구가, 동료가, 음식이, 놀이가, 돈이,... 그 어떤 것도 아닌, 성령님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과 기다림의 동반자가 되어 주십니다. 성령님과 함께라면, 외롭지 않습니다. 지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사라지고 나타날 영광만 가득하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고 기다리는 것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모든 구원 받은 성도들은 28절 말씀처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예배하고, 봉사하고, 교제하며 천국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 붙잡고 고난 가운데 눈물로 기도 하실 때, 반드시 우리는 혼자가 아니하는 사실을 일평생 잊지 마십시오. 성령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끝까지 우리 편, 내 편으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본문의 마지막 말씀 29-30절은,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일련의 과정을 설명해 주는 구절입니다. 신학에서는 이 구절을 ‘구원의 서정(라-Ordo salutis, 영-order of salvation), 혹은 구원의 순서라고 말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 각자를 “미리 아셨고 –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고 - 정하신자들을 부르시고 - 부르신 자들을 의롭게 하시고 – 의롭게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아시고-정하시고-부르시고-의롭게 하시고-영화롭게 하시고, 이 과정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시고 계시며, 우리는 다 이런 과정 속에 놓여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세밀하심, 신실하심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순서를 잘 읽어 보시면,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은, 한 번 구원의 은혜를 내려 주신 사람을 절대로 버리시거나, 방치해 두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의 날에 이를 때 까지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과 고통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고통과 고난을 모른 체 하시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고난 가운데, 눈물 가운데, 낙심 가운데 항상 함께 하시고,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참으로 좋으신 우리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원 받았다는 것은 일시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절대로,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소망 주신 그대로 다 이루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그의 험난한 고난의 시간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을 붙잡고 참으며 기다렸습니다. 그는 구원의 확신속에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을 늘 고백하고, 감사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의 인내는 한계점에 다다랐습니다. 더위 때문에 짜증이 그냥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때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으며, 성령님의 위로가 있음을 잊지 마시고,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말씀을 크게 외치며 꿋꿋하게 다시 일어 서십시오.
00교회 모든 성도들이 8월 한달 동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을 암송하는 가운데, 현재의 고난과 근심과 눈물은 다 사라지고, 오직 나타날 영광만이, 소망만이, 은혜만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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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살아가면서, 현재의 고난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미래의 소망만을 바라며, 성령님의 위로 가운데, 참고 기다리는 구원받은 성도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영광으로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