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4대 질문 (마 16:13-17)
성경의 4대 질문 (마 16:13-17)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시간에 “성경의 4대 질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유대에서 랍비란 선생을 말하는데 유대인 랍비가 강조한 교육 방법 중에 인상적인 것은 ‘좋은 질문을 권장하라’는 것입니다. 학교에 다녀온 아이에게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지 말고 ‘어떤 질문을 했느냐’고 묻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질문은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내지만 잘못된 질문은 스스로를 시험의 수렁으로 빠뜨리는 중대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타락은 사탄의 잘못된 질문을 받아들이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엇보다 질문을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위대한 질문을 성경에서 봅니다. 그 질문은 우리가 반드시 알고 대답해야 할 우리 인생사활이 걸린 질문입니다.
그럼 성경이 하는 질문은 어떤 질문입니까?
1. 성경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질문합니다.
마16:15에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절). 그러자 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가장 먼저 내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지 그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을 4대 성인 중 하나로 생각한다면 대단히 큰 문제입니다. 혹은 예수님을 여러 구세주 중의 한 분으로 생각한다면 역시 문제입니다. 거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라고 대답했습니다. 잘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칭찬하셨습니다.
이 답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구주요 왕으로 믿고 영접할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예수님을 영접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고후13:5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 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이실 뿐 아니라 예수밖에는 다른 구원이 없음을 확신하고 오직 주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책임져 주셨고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으며 예수와 함께 승리의 우편에 앉혀졌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2. 성경은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고 질문합니다.
행19:2에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우리는 요한의 세례만 받았다. 세례 요한이 베푼 물세례는 우리가 받는 세례와는 다른 나는 회개해야 할 죄인이라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에게 주는 그런 세례가 아닙니다. 그 수준은 아직 구원의 수준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를 전도하고 믿으니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차로 예수 믿어야 성령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행11:17에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믿을 때 성령을 주신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진정 나의 구주로 믿는 자는 기본적으로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가 계속하여 충만하심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엡5:18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은 현재 명령 복수 수동형 문장으로 원문을 직역한다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라"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성령은 샘물과 같아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고, 강물과 같아서 마르지 않고 계속하여 우리 심령 가운데 충만하게 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고 또 계속하여 충만하게 받아야 한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걸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믿어도 성령 못 받았으니 천국 가지 못할 것이라 낙심하거나, 반대로 예수 믿어 성령 받았다면서 더 충만하게 받기 위해서 애쓰지 않는 폐단이 생기게 됩니다. 두 가지다 해롭습니다. 전자는 구원의 확신이 체험에 따라 흔들리니, 후자는 성령이 역사하는 역동적인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가 계속하여 충만함을 구했던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계속하여 더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더욱 예수 닮은 장성한 믿음이 되고, 능력 받아 약하여지지 않고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묻습니다.
요21:15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원문으로 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헬라어에서 사랑의 종류에 4가지가 있는데 아가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리키고, 필레오는 우정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스톨게는 자식사랑이나 나라사랑과 같은 본능적인 사랑을, 에로스는 남녀 간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주님이 먼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αγαπας)하느냐 물으시자 베드로는 내가 주를 필레오(φιλω)하는 줄 주님께서 아신다고 대답합니다. 두 번째 질문과 답변도 똑 같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거듭 신적인 사랑을 요구했으나 베드로의 수준은 우정의 수준밖에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필레오(φιλω)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물으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필레오(φιλω)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친구 간의 사랑 수준으로 예수를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필레오 수준일지 그보다 못할지 모르지만 장차는 아가페 수준으로 장성해야 한다는 힌트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나중에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신랑으로 삼고 예수님 외에 다른 신이나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랑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고전16:22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사랑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4. 성경은 우리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눅17:17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명을 깨끗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러 온 사람은 그 중에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매우 섭섭해 하시면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신령한 측면에서 보면 우리들은 모두 죄로 말미암아 영의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어 죄를 용서 받고 치유 받아 우리의 죄병을 고쳐 주시고 하늘의 영광까지도 주셨습니다. 이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멸망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찬송해야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갑니까? 원하는 것은 육신의 소원 뿐, 육신의 소원에 막혀 나를 택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얼마나 찬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구원해 주심을 날마다 찬양해야 합니다.
찬송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너 위해 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찬송은 F. R. 하버갈 양이 지었습니다. 그녀는 신구약을 원전으로 읽을 만큼 천재였는데 그녀가 독일에 유학해 있을 당시 몸이 아파 휴향 차 뒤셀도르프에 있는 학우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집 거실에 걸려 있는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램브란트의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 그림 밑에 "나는 너를 위해 생명을 주었는데 너는 날 위해 무엇을 주었느냐"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놀라운 충격을 받고 영감을 얻어 이 찬송시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고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 버려 피 흘려주셨고 우리에게는 장차 영원한 생명과 행복밖에는 없는데 우리는 더욱 감사하며 감격 속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그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또 너희는 성령 충만과 은사를 받았느냐고 물으십니다. 또 너희는 그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구원해 주신 구속의 은총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 모두 인생 사활이 걸린 이 중대한 질문에 진실로 우리 중심에서 바로 대답하실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